소설리스트

검신검귀-110화 (110/328)

110화 태왕, 수문제에게 선전포고하다.

태왕의 명을 받은 온달이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 수복을 위해 출병할 당시.

태왕은 돌궐과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조의대두형 동금호를 사신으로 보냈다.

그런데 수의 황제 양견 또한 대돌궐 총사령관 공손승과 함께 복속한 돌궐의 충성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금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원을 통일하고 이민족까지 복속시킨 양견의 위세는 대단하여 행차 수행 인원은 삼십만에 달하였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황성을 옮겨 황제의 첫 행차였다.

양견은 이 행렬의 막강한 힘으로 돌궐은 물론이요.

돌궐의 지배를 받는 철륵부 열다섯 부족마저 두 번 다시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굴복시키려는 계산이었다.

양견이 금산에 도착해 한껏 위용을 과시하며 으스대니.

처라가한(莫何可汗)의 뒤를 이은 동돌궐의 새로운 지배자 계민가한은 물론이요.

철륵부의 모든 가한들이 머리를 숙였다.

마침 그 자리에 복색이 다른 이가 있어 양견이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대고구려의 조의대두형 동금호라 하오며, 태왕 폐하의 명을 받고 새로 가한에 오른 처라가한(莫何可汗)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동금호의 대답은 공손하고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계민가한이 그를 극진히 대하고 있음을 느낀 양견이 일부러 꼬투리를 잡았다.

“동금호 그대는 어찌 내게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는가?”

자신이 수의 황제라 하여도 동금호는 고구려의 대신이고 돌궐에 사신으로 온 귀빈이었다.

그렇기에 양견의 이 물음은 고구려의 태왕을 자신의 신하로 여기고 동금호에게 예를 갖추지 않음을 꾸짖은 것이다.

“이 동금호 한평생 고구려의 녹봉을 먹고 살았으나, 그 녹봉 속에 수의 황제가 내리신 쌀 한 톨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저를 신하라 여기시는지요? 폐하께 감히 여쭈오니, 조의대두형이란 직함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아시옵니까?”

동금호의 이 물음은, 내 관직도 모르며 신하로 여기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훗날 개황의치라 칭송받는 총명한 양견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이놈의 두 다리를 분질러 무릎 꿇리는 것은 쉬운 일이고, 말로 다스려 충성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반드시 말로 굴복시키리라.’

양견이 이렇듯 다짐하며 동금호에게 인자하게 말하였다.

“내가 선대 고구려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봉작을 받으라 좋은 말로 권한 바 있다. 헌데 답을 내놓지 않고 세상을 떠나더구나.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수작이 분명할진대,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에 동금호가 머뭇거림 없이 바로 답하였다.

“선대 태왕 시절, 고구려는 오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고 수는 몇 해 되지 않은 나라로, 태왕 폐하가 세상을 바라보시던 해보다 개황(開皇, 수문제 때의 연호)이 적으니, 어찌 바로 따를 수 있겠나이까?”

태왕의 나이보다 수나라의 역사가 짧음을 비꼬는 말에도 양견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껄껄 웃더니 대범히 말하였다.

“하하하, 그러하더냐? 좋아, 좋다! 이제 새로 고구려에 왕이 들어섰다 하니, 천하의 왕은 황제가 봉하는 법! 내가 고구려왕에게 국서로 봉작을 내릴 것이다. 너는 이것을 받아 왕에게 조속히 황성으로 입조해 나를 알현하라 전하거라.”

국서로 고구려의 왕을 봉할 터이니, 고구려의 왕은 감읍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조속히 입조하여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란 뜻이었다.

동금호가 분을 삭이며 양견의 국서를 품고 평양성에 돌아왔을 땐, 고토 수복을 떠난 온달이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평원 태왕이 동금호가 올린 국서를 펼쳐보니, 그 내용이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대 고구려의 땅이 넓다 한들, 우리 수나라만 할 것이며, 요하가 넓다 한들, 어찌 장강만 하겠는가.

어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려 하는 것이며, 창과 검을 만들고 활을 만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너희 고구려의 왕은 판단을 잘하여 멸망의 화를 자초하지 말라.]

“어찌 이리 오만할 수 있는가!”

태왕이 크게 노하는데도 수의 힘을 두려워한 오부 귀족들의 의견은 제각각이라 이를 지켜보던 연태조가 격분해 나서려 하였다.

이때 마침 요동에서 돌아온 강이식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앞으로 나오며 쩌렁쩌렁 아뢰었다.

“폐하! 이런 무례한 서찰은, 붓이 아니라 칼로 응대함이 옳습니다.”

강이식이 이렇듯 강경히 주장하니, 그의 무용을 두려워하는 오부 귀족들은 감히 화친하자 입을 열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태왕이 명하여 회신이 작성되었다.

[도의를 상실한 귀국의 문건은 참으로 잘 받았소.

허나, 우리는 도의도 모르는 족속들의 밑에 들어갈 의사는 하나도 없으며, 차후로 우린 붓으로 화답지 않고 오직 칼로서 화답을 할 것이오.

더 이상 붓대를 놀리지 말고, 정당히 칼로서 상대를 하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든 받아들일 용의가 있소.]

태왕의 화답을 장안의 양견이 읽는 그 순간부터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필연이 될 것이었다.

* * *

또 다른 전운이 고구려를 감싸오는 가운데, 온달은 본의 아니게 제물이 되어 위례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시점, 고악 일대로 진격하던 막바우는 그 어느 성에서도 신라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고악 일대의 성들은 그 크기가 작은데다 위례성에 원군까지 보낸 터라 지키는 군사가 부족하였다.

“저기 왜 문이 열려 있나?”

해질녘이 되어 고악 일대 여러 산성 중 일장산성과 가장 가까운 산성에 도착한 막바우가 불을 환히 밝히고 활짝 열린 성문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와 엎드려 투항을 하였다.

일장산성에서 신라군을 성과 함께 생매장한 막바우가 온다는 소식에 장수는 죽령 일대로 도주하였고 남은 군사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투항한 것이다.

“묶지 말고 잘 대해 주거라. 고향에 갈 사람은 가고, 고구려군이 되고 싶은 자는 남게 하라.”

막바우가 투항한 군사들을 자유롭게 대하라 명하니 모두가 반겼다.

이 소식을 접한 다른 여러 산성들은 막바우가 아직 당도하지도 않았음에도 미리 사람을 보내 성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이틀 동안, 비록 크기가 작으나 고악 일대 십여 개 산성들을 점령한 소식이 평양성에도 전해져, 태왕을 흡족케 하며 온달에게 전승 장군이란 칭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고구려는 남북 위아래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기에 고토 수복은 잠시 미루고 온달을 평양성으로 불러들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전장에 나선 장수를 급히 불러들일 경우, 적에게 뒤를 공격당할 수 있사오니, 신중해야 하옵니다.”

연태조가 이렇듯 고하였으나, 오부 귀족들은 온달이 공을 세우는 것 자체가 싫었기에 한사코 군을 물려 수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고구려의 여력으로는 남과 북으로 두 곳의 전선을 형성할 수 없사옵니다. 한수 이남에 주둔한 군을 불러들이고, 속히 온달도 불러들여 군을 아끼심이 옳습니다.”

“전승 장군이란 칭호마저 얻은 위장군 온달이 고작 군을 돌려 평양성까지 오늘 길에 뭔 변고가 있겠습니까?”

“모를 소리요! 온달은 지금 죽령까지 진군하였을 터인데, 어찌 급히 군을 되돌린단 말이오? 온달이 점령한 각 성들에 주둔군을 보내고 안정시키며 군을 돌림이 순서이지!”

“주둔군 파견은 고사하고 주둔한 군마저 돌리면 애써 투항한 성들까지 배신하여 회군하는 온달을 공격할 우려가 있소. 폐하, 물러설 때는 나아갈 때보다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강이식이 오부의 귀족들을 꾸짖고 태왕에게 아뢰었으나, 귀족들의 반발 또한 거세었다.

“대장군은 수와 전쟁을 원한다 하시지 않았소? 그렇다면 소국이 대국을 상대함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어찌 이리 태평하시오? 폐하, 정녕 군을 물려 수의 공격에 방비하지 않으실 것이오면, 수와 화친을 함이 옳습니다.”

오부의 귀족들이 강이식에게 따지고 태왕에게 거세게 안을 올리니, 보다 못한 연태조가 나서 아뢰었다.

“폐하, 소신 막리지 연태조, 죽령으로 내려가 온달과 함께 돌아오겠나이다.”

막리지가 친히 내려가 온달의 회군을 돕겠다고 하니, 그제야 태왕과 강이식의 얼굴에 근심이 걷혔고, 오부의 귀족들도 더는 입을 열지 못하였다.

궁을 나오며 강이식이 연태조의 손을 덥석 잡고는 크게 감사를 표했다.

“막리지! 온달 아우의 무사 회군을 부탁드리오. 소장은 태왕 폐하의 명을 따라 수의 군사 기지가 될 영주를 불태우러 갑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소.”

영주의 군사적 가치는 북주와 돌궐 연합군을 대적하며 익히 잘 알게 되었기에.

개전 전에 미리 영주를 불태워 수의 출병지를 영주가 아닌, 하북 탁현으로 멀리 두고자 강이식이 청하였고 태왕이 받아들인 것이다.

“대장군은 온달의 회군은 염려치 마시고, 영주 공략에 힘써 주시오.”

연태조가 이렇듯 말하며 돌아서니, 강이식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참 알 수 없는 인물이야. 권력욕이라면 고구려에서 연 씨 일족만 한 집안도 없는데, 다른 오부 귀족과 달리 말이 통한단 말이야. 허허, 참.”

연 씨 일족은 연노부라 칭할 만큼 그 세력이 막강하여 고구려의 초기엔 태왕을 연 씨들이 선택할 정도로 그 위세가 막강하였다.

이들 연 씨들의 권력욕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은 없었다.

다만 그 세력이 약해졌을 뿐이라 아직도 오부의 귀족들이 연 씨 일족을 극히 경계하였다.

이는 선대 태왕인 평원 태왕은 물론이요.

태왕의 왕권 강화를 원하는 을지문덕과 강이식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된 연유인지, 현재의 태왕인 영양 태왕은 연태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힘을 실어 주는 편이었다.

아마도, 그 연유는 강이식의 생각처럼 오부의 귀족과 달리 연태조가 그나마 말이 통하기 때문일 듯싶었다.

* * *

자신의 사저로 돌아온 연태조는 모용상과 모용설에게 죽령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라 명하고 올해 열 살 된 아들 개소문이를 불렀다.

“아비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느니라.”

연태조의 나이 쉰에 얻어 갓쉰동이란 아명이 붙어야 할 개소문이는 연태조의 나이 마흔에 태어나 손발이 꽤나 야무져 있었다.

모용설의 말에 따르면 십 년 먼저 태어난 아이라, 귀살이 붙었다고 한다.

비록 귀살이 붙어 피를 부를지언정, 손발이 야무진 개소문이는 연태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합하, 온달이 출병할 때, 그는 살아오지 못할 것이라 아뢰었건만, 어찌 구하러 가시옵니까?”

모용설이 조용히 다가와 연태조에게 말을 건네니, 연태조가 개소문이에게 물러가라 손짓하고는 답하였다.

“운명은 변하는 법이고, 고구려가 온달을 필요로 한다. 나는 구할 것이다.”

“운명은 바꿀 수 있사오나, 누군가 대신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목원의와 우연순을 따르던 오부의 귀족 대부분은 온달의 죽음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

“헌데 합하께서 구하신다면 그들은 합하에게 적개심을 품게 될 것이며 우리 공자께서 그 대가를 치를 수도 있사옵니다.”

여전히 모용설이 근심을 담아 우려를 표하나, 연태조 역시 강경하였다.

“온달이 죽을 것이라 네가 말한 것, 나는 믿는다. 하지만 온달은 고구려를 위해 수와 전쟁이 끝난 후 죽어야 한다. 네가 다른 이의 죽음을 보니, 네가 방법을 찾거라. 그래야 한다. 나는 온달을 구할 것이다.”

연태조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모용설도 더는 이견을 내지 않았다.

다음날 연태조의 집으로 평강이 찾아왔다.

“공주께서 어찌?”

평강의 방문에 연태조가 의아해 묻자, 평강이 예를 갖추어 답하였다.

“합하께서 제 부군의 회군을 돕고자 죽령으로 떠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큰 도움은 못 되겠으나, 저도 따라 부군의 회군을 돕고자 청하오니, 부디 함께할 수 있도록 청하옵니다.”

“공주께서도 이 길이 험난할 수 있음을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온달은 전승 장군이라 회군 길이 제아무리 험하여도 신라군은 결코 온달을 대적하지 못할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고 이곳 평양성에서 소식을 기다림이 옳을 듯합니다.”

연태조가 정중히 평강의 청을 거절하나 마냥 물러설 평강도 아니었다.

“뒤를 신라군이 노릴 것이고, 앞을 결코 내주지 않을 회군이라 모두가 우려하고 있사옵니다. 사지를 헤맬 부군의 회군 길을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 은혜 평생을 두고 갚겠나이다.”

평강이 이토록 간절히 청하니, 연태조도 마냥 거절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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