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09화 (109/328)

109화 전승 장군 (9)

온달이 일장산에서 산 채로 매장된 신라군을 측은히 여겨 그들의 혼백을 달래 주겠다 말하니, 기훈이 조심스레 이견을 내었다.

“장군, 우리가 위례성 앞에 단을 세우고 제를 올리면 이를 신라군이 잠자코 볼 리 없습니다. 하여…….”

이때 경우가 기훈에게 눈짓으로 말을 끊으며 온달의 명을 받았다.

“날이 밝으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영리한 기훈은 경우가 따로 생각이 있음을 간파하여 믿고 따르기로 하였다.

* * *

날이 밝아 위령제(慰靈祭)를 위한 단이 위례성 앞에 세워지니,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신라군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오?”

각간 김서현이 소식 듣고 나와 물으니, 파진찬 건품이 아뢰었다.

“저 오만방자한 것들이 일장산성의 혼백을 위로하겠다고 제를 지내려 하옵니다.”

“뭐라? 자신들이 생매장하고 제를 올린다니? 죽은 이를 조롱하겠다는 것이란 말이오? 어찌 이다지도 인면수심이란 말이오.”

김서현이 온달의 마음을 곡해하여 노하니, 신라 장수들이 덩달아 성토하며 울분을 토하였다.

김인문이 장수들의 뜻을 대표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각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밤새 고악 일대 산성들에서 원군이 도착하여 위례성도 저 고구려 놈들 못지않은 병력을 확보하였으니, 이 무도한 놈들에게 장수의 예란 무엇인지 가르침을 줘야 하옵니다.”

기본적으로 신라군의 병종은 보병 위주였고, 여러 산성에서 원군으로 온 군사 역시 보병들이었다.

그 수만큼은 고구려군 못지않아 어느덧 위례성의 군사는 팔천 가까이 이르렀다.

아직 당항성에서 대군이 도착하지 않았으나, 분노한 장수들은 당장 일전을 주장하였고 각간 김서현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좋소! 당장 출진 준비를 하시오! 내 친히 나가 저 흉악무도한 고구려 놈들의 목을 쓸어 담아 일장산성의 원혼을 위로하겠소!”

신라군이 분주히 출진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위례성 앞 고구려군은 열심히 단을 쌓고 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 * *

당항성의 성주는 석원으로 그에겐 두 아들이 있으니, 장남은 석보요, 차남은 석진이었다.

위례성의 급보를 전해들은 석원은 장남인 소성주 석보에게 기병 일천과 보병 칠천을 내어주며 각간 김서현을 도우라 명했다.

그렇게 석보는 책사 장솔과 함께 출병하였다.

“이보게 장솔, 온달이 대단하다지?”

“소성주께서 무예를 논하고 싶으신 듯하옵니다.”

석보는 체구가 작으나 담이 크고, 특이하게 쇠도 자르는 커다란 가위를 다루는 재간이 좋아 누구와도 겨루길 즐겼다.

“삼한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온달 아니오. 오죽하면 각간 김서현 공이 시기하여 겨뤄 보고자 아차산성까지 올랐겠소. 하하하.”

석보의 유쾌한 웃음에 장솔이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답하였다.

“무예를 겨뤄 보고 싶으셔도 아니 될 일입니다.”

“어찌 안 된단 말이오?”

“항우의 무예가 천하를 호령할 때, 그와 무예를 겨룬 이들은 필패하였고, 참고 또 참으며 지혜를 겨룬 한신이 승리하였습니다.”

“…….”

“온달 같은 장수는 힘으로 대적하면 어려운 일이고, 지혜로 겨루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소? 하하하, 뭐 쉬운 길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야겠지요. 굳이 위험을 자초할 만큼 나도 어리석지 않으니 염려 마시오.”

석보가 이렇듯 시원시원 답하니 장솔이 소리 죽여 말을 이었다.

“하여, 우리는 진군 속도를 조금 늦출 것입니다.”

“아니, 어찌 그렇소?”

“지금의 고구려군을 평지와 다름없는 위례성에서 대적함은 필패를 뜻하옵니다.”

“뭣이오?”

“온달의 고구려군을 대적하려면 죽령의 두억산이나 덕절산까지 깊숙이 끌어들인 후, 고구려 기병들의 발을 묶고 대당(서라벌의 군대)이나 상주정의 도움을 받아 포위 섬멸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기병 전력이 우월한 고구려군을 대적하기에 평지보다 산지를 택하고, 고구려군을 죽령의 두억산이나 덕절산까지 끌어들이는 전술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찬 박춘수와 같았다.

“온달을 너무 높이 평하여 소극적인 것 아니오?”

“소극적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아주 적극적인 유인책으로 필승 전략이옵니다. 소성주께서도 말씀하셨듯 온달은 삼한에서 가장 유명한 장수로 선대의 고구려왕이 검신이라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는 곧 우리 신라군 마음속에도 그를 두려워함이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다는 소리도 되지요.”

장솔은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아직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전승 장군이기에, 기세 또한 드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온달을 유인해 죽일 수만 있다면, 이후의 판세는 확연히 바뀔 것입니다.”

“음…….”

“이 계책은 천 보 전진을 위한 고작 일 보 후퇴일 뿐입니다. 아주 훌륭한 책략이니, 따르셔야 합니다.”

장솔의 장황한 설명이 귀에 쏙쏙 잘도 들어오니, 석보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다가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럼 우린 위례성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고, 즉 위례성은 함락될 것이란 뜻이겠구려. 맞소?”

“역시 소성주님은 영민하시옵니다. 위례성에 들어앉은 중앙 귀족들을 구하러 가면 어리석은 그들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그리하면 소성주께서 공을 세우실 수 없으십니다.”

“…….”

“위례성은 우리가 조금 빨리 가든 조금 늦게 가든 함락될 것이니, 차라리 죽령으로 돌아가 온달을 소성주께서 대적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나이다.”

“좋소! 내 영웅이 되어 보이겠소. 하하하.”

석보는 각간 김서현과 달리 책사의 말을 잘 따르니 어린 나이에도 군을 이끌 충분한 재목임은 분명하였다.

* * *

마침내 위례성 앞에 단이 세워지고 단상 아래 고구려군은 간단히 무장만 하였다.

또한 불경한 것들은 근처에 두지 않고자, 갑주를 걸치고 무장한 군사들은 거리를 두었다.

위령제를 진행하기 위해 온달도 갑주를 벗고 무기마저 내려놓은 채 몸을 정갈히 하고 단에 오르니.

이때를 노려 위례성 성문이 활짝 열리며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신라군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일장산성의 원혼들마저 욕보이는 저 무도한 온달과 고구려 놈들을 응징하라!”

각간 김서현이 친히 말을 몰아 성 밖까지 나와 독려하니, 대대감과 대감들이 기병 삼백여 기를 이끌고 선두에 서고 뒤를 이어 창병과 환도수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위례성과 가장 가까운 온달은 위령제를 지내려던 자신을 욕하는 김서현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는 자신이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단에 올랐음을 생각하며 껄껄껄 웃었다.

“위령제는 지내고 전투를 벌여도 족하지 않은가? 어찌 이리도 사람들이 박정하단 말이오? 허허허.”

온달의 이 말은 진심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신라군의 입장에선 너무도 거만하게 들렸을 듯했다.

“저 오만방자한 온달이 아직도 여유를 부리는구나! 제아무리 검신이라 칭송받은들 온달은 맨손이다! 놈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포상을 하리라!”

김서현이 이렇게 포상을 약속하며 소리치니, 선두에선 대대감과 대감들이 기를 쓰고 온달이 오른 단상을 향하였다.

이때, 단상 뒤 고구려 진영에서도 크게 북이 울리며 기훈이 노궁수를 끌고 나와 화살을 쏟아부었고, 경우도 기병을 끌고 말을 달리며 기사를 지시하였다.

“선두를 겨냥해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 거리를 벌려 재차 날려라!”

온달을 염려한다면 단상까지 내달려 신라의 기병과 난전을 벌여야 하는데도.

냉정한 경우는 이 기회에 신라군의 수를 확 줄이고자, 고구려군의 장기인 질주하는 마상에서 적을 몰고 물러나며 화살을 날리는 기사를 택한 것이다.

덕분에 온달을 향해 돌진해 오는 신라군의 수가 줄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화살을 피한 기병 백여 기가 제단 아래까지 당도해 온달을 에워쌌다.

제단 위에 홀로 선 온달이 세상 만물을 굽어살피는 천궁의 열두 별을 상징하는 청동검 열두 자루와 북두칠성을 뜻하는 청동 도끼 일곱 자루를 내려다보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에 청동검을 하나씩 쥐고는 비검술을 발휘해 제단 아래 신라군을 향해 날리니, 말에서 내리던 대대감과 대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이 광경에 대감들이 놀라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몰아 제단에 오르는데.

온달이 또다시 청동검 두 자루를 동시에 날리자 대감 둘이 말 위에서 고꾸라지며 절명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의 기세는 아직 꺾이지 않아 계속 제단을 올랐다.

그때, 말과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제단이 와장창 무너지며 온달이 중심을 잃었다.

이 틈에 무너지는 제단으로 신라의 기병들이 일제히 돌진해 왔다.

“장군!”

멀리서 신라군을 몰다가 물러나며 화살을 날리던 경우도 이 광경에는 적지 않게 당황해 크게 비명을 지르며 군을 몰아 구하려 내달렸다.

무너진 제단에서 신라군의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고.

두 자루 도끼를 양손에 쥔 온달이 이리 후려치고 저리 내지르며 제단 아래에 내려놓은 운철 대검 앞까지 종횡무진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달 장군은 만부적이시다! 염려 말고 신라군을 밀어붙여라!”

가뜩이나 수가 적은 신라군의 기병이 온달에게 모두 달라붙은 상황에서 경우가 이끈 고구려의 기병이 신라의 보병들을 유린하였다.

또한 기훈이 노궁수로 지원하니, 곳곳에서 신라군의 시신이 널렸고 경우는 더욱 기병을 독려해 열린 성문마저 돌파하였다.

보급과 전령을 담당하던 기룡도 부월수와 장창병을 이끌고 재빨리 제단으로 향하여 온달을 도우려 하였다.

어느새 운철 대검을 쥔 온달이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치자, 무너진 제단이 또다시 박살나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 결과, 신라의 기병들이 말과 함께 내장을 쏟으며 널브러졌다.

이미 경우와 겨루다 부상 입은 대감 무은은 각간 김서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딱 벌렸고, 그의 아들 소감 귀산과 소장 추항도 온달의 이 신묘한 검술에 압도되어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품지 못하였다.

이때, 경우가 기병을 이끌고 돌진해 오며 화살을 날리니, 성문을 지키던 신라군들은 정신이 아득해 피하기 바빴다.

추항만이 간신히 방패로 김서현을 보호해 성 안으로 도주하려 애썼다.

그러나 언제 나타났는지 돌비수가 기병과 부월수들을 이끌고 달려오며, 위례성의 성문을 막고는 닥치는 대로 마구 쇠망치를 내리찍어 대었다.

기악에게 훈련받은 부월수들은 모두 커다란 양날 도끼를 지니고 기 씨 일족의 가전비기인 파천진마저 익혔다.

그들이 파천진을 제법 능숙히 펼치니, 위례성 안의 신라군과 밖의 신라군 모두 양단되어 성문 안팎 모두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경우가 온달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온달을 위령제의 제물로 삼은 계책이 성공한 것이다.

도저히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없음을 깨달은 김서현이 말을 돌려 남동 방면으로 도주하니, 대감 무은과 소감 귀산, 소장 추항만이 그 뒤를 따르며 호위할 뿐이었다.

일식경이 지나, 온달이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운철 대검을 어깨에 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엔 위례성 앞 넓은 들은 신라군의 시신과 피로 사방이 붉었고, 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장군, 대승이옵니다.”

경우가 실컷 온달을 미끼로 사용하고는 말을 몰아 달려와 온달을 향해 환히 웃었다.

얼마나 많은 신라군을 베었는지 그녀의 검은 반 토막 나 있었고, 검은 머리는 핏빛으로 붉었다.

“고생하셨소.”

경우와 달리 심신이 지친 온달은 간신히 입을 열고는 핏물이 흐르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달이 이토록 지친 모습은 경우도 처음인지라 조금은 미안한 심정이 되어 말에서 내려 온달을 부축하며 함께 성문으로 향했다.

“혹시, 나를 위령제의 제물로 삼은 것은 아니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온달님만 한 제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온달의 물음에 경우가 정색하며 답하다가 호쾌히 웃으니, 덩달아 온달도 사람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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