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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108화 (108/328)

108화 전승 장군 (8)

막바우를 보좌하는 모달은 전장에서 세월을 보낸 백발의 범치라는 장수였다.

그는 창술도 검술도 궁술 또한 평범하고, 기마술도 변변치 않은 장수였다.

그러나 생존력만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 막바우 휘하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장군, 수성이란 본디 성벽 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래 버티느냐가 관건입니다.”

범치의 이 말에 막바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우린 공성을 할 것인데, 왜 수성 타령이오?”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아무튼 저 일장산성은 그 크기가 작아 주둔군 자체가 적은데다 그나마 위례를 구하러 갔으니, 위협만으로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야 막바우가 범치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음, 그럼 항복을 권하란 말이오?”

“아니지요. 그냥 권한다고 옜소! 하며 성을 바치겠습니까? 동기를 줘야 하지요.”

“그 동기란 무엇이오?”

이에 범치가 웃으며 일장산성 위 절벽을 가리켰다.

깎아지른 절벽은 기암괴석이 삐죽빼죽 솟았고, 절벽 가장 위엔 모양이 둥글고 커다란 바위가 마치 하늘의 신장이 올려놓은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 바위 덕에 산을 돌아 절벽 위를 오른들 산성을 향해 화살을 날릴 자리조차 없었다.

이렇듯 일장산성은 절벽을 등지고 세워져 배후는 걱정할 것 없는 천혜의 요새로 비록 그 크기가 작지만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지세였다.

이런 지형의 이점을 신라군도 알고 있을 터라, 쉽사리 항복을 받아내기란 어려울 듯하여, 절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막바우를 대신해 기범이 범치에게 물었다.

“공략도 만만치 않은 산성인데, 적의 항복을 어찌 받습니까? 혹시 저 절벽에 답이 있는지요?”

기 씨 사 형제는 기악만 모달의 지위를 얻고 나머지 셋은 모두 당주의 지위였으나, 각기 부대를 이끌고 당주도 거느려 모달 못지않은 위치였다.

하지만 전장을 곧 제집이라 여기고 살아온 범치를 극히 존중하여 항상 공손히 대하였으니, 손주 뻘의 막바우와 기범에게 범치가 자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신라군과 싸울 필요조차 없습니다. 군사들의 일부를 돌려 산을 오르게 하면 저 절벽 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마, 저 절벽에서 뛰어내리자는 말은 아니겠지?”

아차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온달과 절벽을 올랐던 막바우가 이번엔 절벽을 내려가 성을 공략하냐고 물으니, 범치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뛰어내리면 살겠습니까? 줄 타고 내려가도 신라군이 화살을 날릴 것이니, 불가한 일이지요.”

“하면 설마?”

그제야 막바우가 어렴풋이 범치의 계책을 헤아려 물었다.

눈치 빠른 막바우가 기특한지 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절벽 위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저 바위를 굴려 절벽 아래로 떨구면, 절벽에 삐죽빼죽 솟은 바위들이 무너져 함께 떨어질 것이니, 저 작은 성은 낙석과 토사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제야 막바우도 범치의 계책을 모두 깨닫고 절벽 위 바위를 다시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밀면 밀릴까?”

터무니없는 소리에 기범이 제 의견을 더해 권하였다.

“장군의 완력이 뛰어나지만, 그 힘은 다른 곳에 사용하십시오. 저 바위가 보통 큰 것이 아니나,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망치와 정으로 아래를 깎고, 나무를 받쳐 밀면 분명 흔들리다가 굴러 떨어질 것입니다.”

“좋아! 절벽을 믿고 세운 산성이 절벽 때문에 무너지겠군. 진행하자고!”

배움은 부족하지만, 눈치는 매우 빠른 막바우였기에, 좋은 의견은 적극 수용해 받아들였다.

“헌데, 기범 자네 형제들도 예전 망우산 산채를 절벽 아래에 세우지 않았던가?”

막바우의 이 물음에 기범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랬습지요. 만일 범치님 같은 장수가 토벌대를 끌고 왔다면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하하.”

이 괴이한 작전은 곧 수행되어 범치가 힘 좋은 군사 일백을 이끌고 산을 돌아갔다.

이를 신라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기범이 노궁수를 지휘해 산성 앞에서 화살을 날리며 일장산성을 공략하였다.

성에 주둔한 신라군들은 절벽 위는 끔에도 신경 쓰지 않고 정면 기범의 공격만 경계하였다.

* * *

온달이 기병 일백 기를 이끌고 남동 방면으로 달리니, 곧 주변을 경계하던 건품의 군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당항성에서 출발한 원군을 위해 고구려군의 매복을 살피던 건품은 뒤에서 나타난 고구려군에 당황하였으나, 그 수가 고작 기병 일백여 기에 이내 곧 안심하였다.

“원군에 피해를 입힐 수준은 아니구나! 그래 뭐하러 온 게냐?”

서로 군사의 수가 비슷한 상황에 누구도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었다.

온달이 건품의 물음에 귀먹은 듯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운철 대검을 단단히 쥐었다.

이내 신라군을 향해 돌진하니, 그 뒤를 따라 고구려 기병들도 질주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장수가 물으면 상대편도 답하는 것이 전장의 예의라 믿었던 건품인지라, 온달의 이 돌격에 적지 않게 당황하여 급히 명을 내렸다.

“이 상식 없는 놈들! 전장에도 예의가 있거늘! 모두 저 무례한 놈들을 쳐 죽이거라!”

건품의 명에 신라군도 고구려군을 상대로 돌진을 시작하였다.

허나, 이미 누렁이를 재촉해 달려온 온달이 선두의 신라군들을 운철 대검으로 마구 후려치니, 뼈가 부러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너무도 끔찍했다.

결국 그는 신라군의 말발굽마저 얼어붙게 하여 누구도 단 한 걸음조차 옮기질 못하였다.

“이 빌어먹을 말들이!”

신라군들이 말 잔등을 발 뒷굽으로 차 겨우 말이 움직이려 하나, 때는 이미 늦어 온달의 뒤로 고구려 기병들이 밀려들며 거세게 신라군을 몰아쳤다.

그 선두에 온달이 무쌍을 보이며 길을 뚫었다.

이미 승세는 뒤집기 어려웠고, 감히 온달과 대적할 엄두도 못 내는 신라군들이 건품의 명도 듣기 전에 내빼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샅샅이 흩어지자 건품도 내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온달은 패주하는 신라군은 두고 다시 고악 방면으로 말을 몰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고악 일대에서 오는 원군을 위해 주변을 살피는 이소벌의 뒤를 치기 위함일 것이다.

* * *

절벽에 오른 범치는 군사들에게 집채만 한 바위 밑을 파고 나무를 박아 지렛대로 삼게 했다.

또한 망치와 정으로 바위의 뿌리를 쪼개라 시키니, 정으로 바위를 쪼는 이 괴이하고 불길한 굉음이 절벽 아래 일장산성에까지 메아리쳐 전해졌다.

기범이 이끈 군사들이 날리는 화살에 정신 팔렸던 신라군들이 굉음이 들려오는 절벽 위를 돌아보았을 땐, 거대한 바위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뭐지? 왜?”

“저 바위… 왜 흔들리고, 이 소리는 도대체?”

이제는 모두가 머리 위를 지나는 화살 따위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온 신경을 절벽 위에만 두었는데, 바위의 흔들림은 차츰 더 격렬해지며 이젠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설마…….”

일장산성의 신라군 모두가 이미 바위의 들썩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으면서도 애써 이 상황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바위는 산 전체가 흔들릴 굉음을 내며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충격에 토사가 일고 바위가 지나는 모든 곳이 무너지며, 절벽에 형성된 기암괴석들을 뿌리째 뽑아 함께 떨어져 내려왔다.

거대한 토사와 낙석들이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되어 절벽을 내려오며 더욱 기세를 올리더니.

산 전체를 덮을 듯한 충격과 함께 겁에 질려 멍하니 절벽만 응시하던 신라군을 일장산성과 함께 집어삼켰다.

이젠 항복을 받아낼 신라군 한 명 남지 않을 정도로 일장산성은 토사와 낙석으로 뒤덮였다.

막바우를 비롯한 고구려군들 조차 흙먼지로 시야가 흐려진 일장산성을 바라보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 생매장…….”

원했던 것은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는 것이었으나.

이젠 취할 산성도 항복 받을 신라군도 없는 상황이라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고구려군들은 다리가 풀려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날 절벽을 허물어 일장산성 신라군을 생매장한 일은 두고두고 막바우를 따라다니며 그가 상대하는 모든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게 된다.

“무식한 인간 백정 막바우에게 대항하면 성과 함께 생매장 당한다.”

적들은 항상 이런 공포와 함께 막바우를 대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 가장 놀라고 두려움에 가득찬 이가 바로 막바우였으니, 꽤 억울한 누명이 되겠다.

* * *

이소벌이 이끈 기병마저 가볍게 패퇴시킨 온달은 신라의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빠르게 진영으로 돌아갔다.

고구려군의 빠른 기동력을 몸으로 느낀 위례성의 신라군은 함부로 쉬이 성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니, 비록 작은 피해를 주었더라도 상당한 성과임이 분명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어 일장산성에서 원군이 도착했다.

그 뒤 두어 시진 지나 일장산성이 통째로 토사와 낙석에 파묻혔다는 비보를 접하니, 원군의 도착으로 기뻐하던 위례성의 열기가 금세 차갑게 식었다.

밤이 깊어 동남 방면 고악 일대 산성에서 속속들이 원군이 도착했고.

뒤이어 일장산성을 파묻어 버린 고구려 장수 막바우가 동남 방면 고악으로 향한다는 첩보를 접했다.

이에 또다시 위례성의 모든 신라군들이 놀라고 황망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녕 막바우란 놈이 동남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단 말이더냐?”

김서현이 재차 물으니, 정찰병이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통곡을 하였다.

아마도 그의 친지 중 누군가가 그곳에 주둔한 모양이다.

“놈은 일부러 항복을 받지도 점령하지도 않은 모양일세. 필경 성을 취해 포로가 생기면 속도를 내어 다른 성을 공략하지 못함을 알고 그랬을 것이야. 이런 악귀 같은 백정 놈.”

김서현이 이를 바드득 갈며 말하니, 듣는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분개하였다.

김서현의 이 생각은 상당히 일리 있는 판단이나, 어쨌든 막바우의 의도와는 달랐으니.

막바우로선 억울한 일이지만 변명한들 믿어줄 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군조차 이 일을 막바우가 없는 곳에선 조심스레 이야기하며 온후한 온달의 성품과 비교하곤 했다.

그러나 신라군의 입장에선 온달 또한 흉악무도한 존재일 뿐이었다.

“저들의 우두머리 온달이란 놈도 전장의 예를 모르는 흉악한 놈이니, 그 휘하 막바우가 저리 극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이 원한을 일장산의 원혼들이 결코 두고 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장의 격식을 따지다가 온달에게 호되게 혼이 난 건품이 이렇듯 말하니, 모두가 주먹을 불끈 쥐며 동의하였다.

* * *

“장군, 막바우께서 일장산성을 통째로 파묻고 동남 방면의 고악 일대로 진군 중이라 하옵니다.”

정찰병에게서 일장산성의 일을 전해들은 기룡이 조심스레 온달의 안색을 살피며 아뢰었다.

온달은 처음엔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승리를 했다는 소리요? 일장산성에 주둔할 군을 요청하는 전령을 평양성으로 보내시구려.”

온달이 이렇듯 명하니, 기룡이 머뭇거리며 다시 고했다.

“장군, 송구하오나, 이제 일장산에는 성이 없습니다.”

기룡의 이 말에 온달이 또다시 눈만 끔뻑거리다가 되물었다.

“일장산에 일장산성이 있지 않소? 거기 산성이 있는데 왜 없다는 것이오?”

말재주가 없는 기룡이 온달의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갖은 설명을 하였고, 밤이 아주 깊어서야 온달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허… 이런 참혹하고 잔혹한 일이… 내일 날이 밝으면 단을 세우고 신라군의 혼백을 달랠 제를 올릴 것이니, 준비하시구려.”

온달의 이 자애로운 마음은 또 한 번 신라군의 심기를 불편케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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