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전승 장군 (7)
무은이 긴 월도를 휘두르면 경우가 가벼이 검으로 살짝 쳐내고.
경우가 빈틈을 노려 무은의 가슴팍을 검으로 노리면 무은이 월도로 급히 막으니.
이 둘의 실력은 가히 백중지세였다.
다만 합을 더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무은보다 체력이 약한 경우의 호흡이 가빠지고 검 끝이 살짝 흐트러지니, 위례성 성벽 위 신라군들의 함성이 점점 더 거세져 갔다.
“무은! 저놈의 머리를 베어 슬호화의 원한을 풀거라!”
각간 김서현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질러 응원하니, 무은이 한층 더 힘을 내어 경우를 공격했다.
무은의 월도가 갈수록 기세를 더하자, 끝내 경우가 버티지 못하고 등을 돌려 도주하니, 성벽 위 신라군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기세를 놓칠 무은이 아닌지라 말을 몰아 쫓으며 힘껏 월도를 휘둘러 경우의 머리를 노렸다.
이때 고구려군은 탄식하며 신라군이 기뻐 주위 모든 소리를 뒤덮은 가운데.
경우가 갑자기 몸을 돌려 화살을 날리니, 너무도 신묘하여 지척의 무은이 피할 새가 없었다.
“헉!”
무은은 고통도 잊고 자신이 경우의 꾀에 빠졌음을 한탄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어깨에 박힌 화살로 인해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그가 월도마저 떨구니, 이틈을 노리며 경우가 활로 무음의 안면을 가격하였다.
안면을 경우의 활에 얻어맞은 무은이 코피를 쏟으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 급히 말을 돌려 도주하니, 이번엔 경우가 그 뒤를 쫓았다.
“아버지!”
아비 무은의 위급에 성벽 위에서 관전하던 귀산이 놀라 부르짖으며,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그는 땅에 발이 닿음과 동시에 몸을 솟구쳐 경우를 향해 달려왔다.
추항도 벗이 홀로 경우를 향해 돌진하니, 마냥 보고 있을 수 없어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에 들고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면 다리가 부러질 높이임에도 두 소년은 산양이 솟구치듯 오히려 땅에 발이 닿자마자 탄력을 받아 더 가뿐히 달렸다.
이 모습에 경우가 감탄하면서도 결코 무은을 놓아줄 마음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손에 쥔 활에 화살을 먹여 날렸다.
무은은 등 뒤에서 바람이 이는 기척을 느껴 납작 말 등에 엎드렸다.
그러나 천하의 명궁 경우가 날린 화살은 실수 없이 무은의 등에 박히며 그를 땅으로 처박았다.
이 기회를 노려 경우가 다시 검을 빼어 들고 말을 몰아갔다.
그러나 어느새 달려온 귀산이 창을 휘둘러 공격하고, 추항이 커다란 방패로 앞을 막아섰다.
아직 어린 티가 남은 두 소년의 얼굴엔 아비를 구하기 위한 결의가 가득했다.
두 소년은 경우를 상대로 조금도 물러섬 없이 오히려 그녀를 몰아붙였다.
추항이 방패로 경우의 검을 막고, 말을 밀어붙이면 귀산이 창으로 위협하니, 말 위에 앉은 경우의 검이 이들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잘한다!”
이 모습에 김서현이 감탄하며 성문을 열고 구하라 명하였다.
마침 고구려군의 모달 돌비수도 경우를 돕기 위해 긴 쇠망치를 들고 말을 몰아오는데, 벌컥 열린 위례성에서 기병 오백여 기가 맹렬히 쏟아져 나왔다.
이에 고구려군 당주들도 기병을 이끌고 달려드니,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이 틈에 귀산과 추항이 잽싸게 무은을 업고 성 안으로 사라졌다.
“아예 이참에 고구려의 선봉을 무찔러라!”
김서현이 재차 명을 내리니, 건품과 이소벌도 보병을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경우는 수와 기세에서 밀림을 깨닫고 급히 명을 내렸다.
“물러나라! 잠시 퇴각한다!”
그녀의 명에 모달 돌비수와 당주들이 군을 수습해 퇴각하려 하는데, 이들의 머리 위로 긴 매 울음이 날카롭게 울리며 싸움을 알리는 북소리가 뒤에서 힘차게 둥둥 울렸다.
온달이 온 것이다.
“대모달이 오셨다!”
“위장군 온달이 오셨다!”
패색이 짙던 고구려군이 환호를 지르며 악착같이 버티는 가운데.
누런 말을 탄 거한이 시커멓고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신라군의 선두로 쑥 들어가 종횡무진하니, 성벽에서 이를 내려다보던 김서현이 놀라 소리쳤다.
“돌아와라! 퇴각하여 성문을 닫아라!”
김서현의 명에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일었다.
그러자, 신라군들이 일제히 성문으로 몰려가니, 이 혼란한 틈에 온달도 끼어 연신 운철 대검을 휘둘렀다.
온달 혼자서라도 이 신라군 틈에 섞여 성문까지 달려 문을 열어 두려는 심산인 듯하였다.
멀리서 막바우도 군을 몰고 와 경우를 흘깃 보고는 수고했다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곧바로 온달의 뒤를 쫓아 군을 끌고 돌진하였다.
전세가 순식간에 변하니, 신라군이 당황하여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성문마저 내어줄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박춘수가 성벽 위 병사들에게 소리 높여 명을 내렸다.
“성문 아래로 화살을 날리고 기름을 부어라!”
아직 신라군이 퇴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가 내린 명에 당혹해 누구도 따르지 않으니, 박춘수가 칼을 빼어 들고 성벽 위를 지키는 소장에게 달려가 가차 없이 목을 쳤다.
박춘수의 칼이 두려워 모두가 미친 듯이 화살을 성문 아래로 쏟아붓고 끓는 기름을 들이부으니, 성문 아래는 실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 틈에 수문장이 급히 성문을 닫아걸어 잠그고 성벽 위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관계없이 계속 활을 날리니, 홀로 신라군 속에서 용맹을 펼치던 온달도 위급해졌다.
“장군! 뭐 때문에 혼자 다 상대하시오!”
이때 막바우가 땅에 떨어진 신라군의 방패를 주어 들고는 온달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름과 화살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성벽 위 박춘수의 눈에 온달의 모습이 정확히 들어왔다.
“저놈이 온달이다! 저놈만 죽여라!”
이 명에 신라군의 모든 활시위가 온달을 겨냥했다.
아무리 대담한 온달이라도 위급함을 느껴 퇴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경우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활을 들어 성벽 위에서 신라군을 지휘하는 박춘수를 겨냥해 두 대의 화살을 날렸다.
이에, 곧게 뻗은 화살이 박춘수의 목과 가슴에 박혀 숨을 끊었다.
박춘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니, 김서현을 비롯한 신라의 장수들이 모두 겁에 질려 성벽 밑으로 납작 몸을 감추었다.
장수들이 이 모양이니, 활을 당기는 병졸들의 기세도 꺾여 퍼붓던 화살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온달이 무사히 돌아와 위례성 성문 아래를 바라보았다.
높이 쌓인 시신 대다수가 신라군의 것으로 단숨에 성을 함락시키진 못하였어도 대승을 거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아쉽지만, 성문은 내일 엽시다.”
온달이 이렇게 명을 내리자, 고구려군은 빠르게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 * *
“날이 밝으면 내가 앞에 설 터이니, 바로 성을 넘도록 준비하시오.”
온달이 길게 말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이는 곧 해가 뜸과 동시에 위례성 성문을 뚫어야 하는 지엄한 명이 되어 모두가 바짝 긴장하여 따랐다.
항상 가장 위험한 곳에 먼저 나서고 가장 늦게 나오는 온달을 모든 고구려군이 진심으로 따르니, 이 명에 이견을 내는 이가 없음은 당연하였다.
날이 밝아 온달이 공격을 알리는 신호로 효시를 날리기 위해 누렁이에 올라 철궁을 쥔 순간, 전령이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장군! 어제 일장산으로 원군을 청하는 전령이 향한 듯합니다.”
이에 온달이 동요치 않으며 경우를 바라보니, 경우가 씩씩히 일어나 선봉으로서의 책무를 하였다.
“소장 경우 군을 끌고 나가 일장산에서 올 신라군을 격퇴하겠습니다.”
아침 햇살에 경우의 여린 어깨가 환히 빛나며 매우 늠름해 보였다.
이때 또다시 전령이 들어와 아뢰니, 이번엔 동남 방향의 상황이었다.
“장군 어제 동남 고악 방면으로 원군을 청하는 전령을 여러 무리 보낸 듯합니다.”
이 보고와 함께 서쪽으로 나갔던 정찰병도 돌아와 급히 아뢰었다.
“위례성에서 당항성으로 전령을 보낸 듯하옵니다.”
모든 보고가 위례로 곧 신라의 원군이 향함을 뜻하자, 온달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군, 저도 나가 한바탕 쓸고 오겠습니다.”
막바우가 고심에 잠긴 온달에게 의견을 내니, 온달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아닐세. 막바우 자네는 기범과 함께 지름길을 택해 서둘러 일장산성을 공략하시게.”
“…….”
“기악이 몽촌성에서 오면 지원 보낼 터이니, 일장산을 점령한 뒤엔 바로 동남 방면 고악 일대의 산성들을 차례차례 취하시게나. 분명 수비하는 신라군의 수가 적어 쉬이 얻을 수 있을 걸세.”
“명을 받습니다.”
“기룡, 자네는 막바우와 몽촌성을 연결하여 주둔군 파견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고, 경우는 기훈과 함께 위례성을 지속적으로 공략하여 신라군을 지치게 하되 군사를 아껴 무리해 접근하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그동안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온달이 낸 계책이라 모두가 이견 없이 명을 받았다.
“장군 그럼 제가 시원하게 주변 성들을 싹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헌데, 당항성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막바우가 조심스레 당항성 공략을 물으니, 온달이 웃으며 답하였다.
“당항성은 미추홀의 신라군마저 합류하고 본디 산성에다가 해로마저 열려 있어 상주하는 신라군의 수가 상당하네. 비록 위례로 원군을 보냈다 하여도 여전히 수비군의 수가 많아 우리의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일세.”
“…….”
“힘으로 뺏기보다 우리 고구려의 수군이 해상을 장악하고 우리가 주변 신라성들을 모두 점령한다면 스스로 무너질 터이니, 그때 공략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온달의 이 말을 들으며 경우는 그가 그동안 당항성과 주변 성들에 관해 무척 많은 조사와 관심을 가졌음을 느끼고는 온달이 이젠 단지 신력과 무용만 지닌 장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온달님의 발전이 하루가 다르구나. 이는 곧 우리 고구려의 복이고 적들에겐 재앙이 되리라.’
* * *
고구려군이 위례로 향하는 원군을 급습하리라 예상한 각간 김서현이 건품과 이소벌에게 명하여 군을 이끌고 나가 주위를 돌보라 명했다.
많은 수의 병력이 일시에 나가면 도리어 공격받을 우려가 있어 소수의 기병만 끌고 건품이 동남 방면으로, 이소벌이 일장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도 사방에 퍼진 정찰병들이 기범에게 전하여 곧 온달이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경우 자네는 기훈과 계속 위례성을 공략하고 있게나. 나는 주변을 살피는 신라군들을 잠시 골려 주고 오겠네.”
온달이 고작 기병 일백여 기만 끌고 떠난 뒤.
기훈이 노궁수를 이끌고 위례성에 화살을 퍼붓다가 멈춘 후 둥둥 북을 치니, 고구려군의 총공세를 두려워한 신라군이 바짝 긴장하여 성벽 위로 모두 몰려들었다.
“공성보다 수성이 수월하다 말 하나, 얼마나 수월한지 한번 겪어나 보거라.”
기훈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성벽 위 신라군에게 화살을 퍼붓다가 멈추고 북을 울리길 반복하였다.
신라군도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렸으나, 노궁수의 수가 적어 그리 위력적이지 않았다.
경우 역시 기병을 끌고 성을 빙 돌며 기사로 화살을 날리니, 성벽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고구려군을 상대로 신라군은 섣불리 나가 싸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성벽 위에서 고구려군의 화살만 피하며 숨어 있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고구려군의 이 화살 공격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신라군은 아주 조금씩 군사를 잃어만 갔다.
“오냐! 저놈들이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구나! 잘 되었다! 놈들이 지체하여 총공세를 취하지 않는 동안 우리의 원군이 속속 도착할 것이다. 이 죽일 놈의 고구려군에게 슬호화와 박춘수의 복수를 하리라!”
김서현이 이렇게 다짐하는 동안, 막바우와 기범이 이끈 군은 쉬지 않고 달려 어느새 일장산 앞까지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