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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106화 (106/328)

106화 전승 장군 (6)

간신히 위례성에 도착한 각간 김서현은 파진찬 건품과 이소벌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몽촌성에서 도망쳐 온 김인문, 박춘수와 함께 향후 대책을 논하였다.

“아찬, 그대는 이곳 위례 앞에서 적을 맞아 싸우자 하였는데, 지금도 가능한가?”

김서현의 이 물음에 박춘수가 한숨을 속으로 삭이며 차분히 답했다.

“지금 우리에겐 상책과 하책 두 가지 안이 있사옵니다.”

“두 개라… 어서 말하시게.”

김서현이 이야기를 재촉하니, 박춘수가 먼저 상책부터 아뢰었다.

“상책은, 이곳 위례는 성이 넓으나 병사가 적고, 근처 일장산의 산성 역시 성은 견고하나 군사가 부족한 터, 이 두 곳의 군을 이끌고 당항성으로 옮기는 것이옵니다.”

“아니, 이 사람 춘수! 이곳을 또 버리잔 말인가?”

김서현이 짜증을 담아 물었으나, 박춘수는 담담했다.

“당항성은 산성임에도 바다와 연결된 요충지며, 미추홀의 주둔군마저 옮겨온 터라, 군세가 상당합니다. 이 위례성의 동남은 고악이요. 남서는 평야이고, 좀 더 아래로 내려가야 산지가 나오나, 그 아래는 백제의 영토이옵니다.”

“…….”

“고구려군은 이 위례를 차지한 후 당항성과 동쪽 산성들을 놓고 고심하다가 끝내 동남 방면을 공략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악의 산성들은 죽령까지 이어졌으니, 우리가 당항성에 군을 옮긴 후, 재정비하여 동쪽의 험준한 고악 여러 산성들을 공략하는 고구려군의 배후를 칠 수 있어, 고구려군은 결코 죽령을 넘지 못하고 전멸할 것이옵니다.”

동남 방면 산지에 세워진 십여 개 산성들이 죽령 위까지 쭉 이어져 있어, 박춘수는 고구려군이 산성들을 공략하며 점령할수록 군세가 약해질 것이라 판단하였다.

하여, 잠시 참고 숨을 고른 후 맞서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제안에 김서현이 잠시 고심하는데, 소감 귀산이 군사들과 함께 관을 들여오며 고하였다.

“고구려군이 슬호화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보내왔나이다.”

이 말에 김서현이 한걸음에 관으로 달려가 눈물 흘리며 통곡하였다.

“이 사람, 슬호화! 자네가 어찌 이 좁은 관에 들어 있는가? 내게 온달과 겨루어 목을 취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어나시게. 슬호화 이 사람 어서 일어나시게.”

김서현이 애통히 통곡하는 통에 대책 논의를 더 진척하기 어려워지니, 박춘수가 관을 들여온 소감 귀산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장군들이 전술을 논하는 회의 중에 어찌 소감 따위가 하명도 듣지 않고 관을 들여와 방해하느냐! 내가 네놈의 목을 베어 군령의 지엄함을 보이겠노라!”

박춘수가 칼을 빼어 들고 귀산의 목을 베려 하니, 건품과 이소벌이 놀라 막으며 사정하였다.

“고정하시오. 이 아이는 앞서 출진에 공이 큰 아이로 아직 어려서 모르고 저지른 일이오. 부디 살려 주시오.”

이 소동에 김서현도 더는 통곡하지 못하고 귀산에게 관을 밖으로 내어가 잘 묻으라 명한 후 다시 회의를 진행시켰다.

“내가 잠시 이성을 잃고 회의를 멈추었소. 이제 내가 아찬의 안을 듣고 내린 판단을 말하겠소이다.”

아직 박춘수의 하책이 남았음에도 이미 김서현의 심중엔 결심이 굳은 상태였다.

“일장산성과 당항성에 전령을 보내 조속히 원군을 보내라 명하고, 주위 산성들에도 전령을 보내 원군을 보내라 하시오.”

“…….”

“이 위례성이 군사가 부족해 고구려군을 대적하기 어렵다면 군을 모아 대적하면 되는 일. 바로 진행하시오!”

슬호화의 시신을 마주한 후, 김서현은 이곳 위례에서 고구려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온달이 시신을 수습해 위례로 보낸 것은 고구려군에게 득이 되는 행위가 된 셈이었다.

‘곧 고구려군이 위례성 앞에 당도할 터인데, 그 뒤에 소수 병력으로 도착하는 원군들은 고구려군에게 각개격파 될 것이다.’

박춘수가 이렇듯 생각하며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오니, 김인문이 다가와 살며시 하책을 물었다.

“하책은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죽령까지 군을 물린 후, 산성들을 힘겹게 점령하며 진군해 온 고구려군을 급습하는 것입니다."

“…….”

“성을 점령할수록 주둔시킬 군이 필요하여 온달이 이끈 군이 쪼개지고 나누어질 터이니, 아마도 두억산이나 덕절산 인근에 이르면 우리가 물리칠 수 있을 터입니다. 이후 다시 위로 진군하면 반드시 이곳까지 되찾을 것이니, 이것이 하책이지요.”

박춘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김인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였다.

“어차피 그 하책은 각간께서 택하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어린 화랑들에게 늘 강조한 것이 임전무퇴인데, 어찌 계속 퇴각하여 반격을 노린단 말이오? 아니 될 소리.”

“장군, 이길 수 있다면 퇴각이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박춘수의 이 물음에 김인문은 대답을 피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튼 안 되는 일이오. 그럼 나는 성을 둘러보러 가리다.”

* * *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위례성은 주위 땅이 비옥하고 성이 넓었다.

그러나 백제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성을 옮긴 이유는, 수성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온달이 몽촌성에 주둔군이 당도할 때까지 기악에게 지키라 명하고 빠르게 군을 이끌고 진격하니, 이번에도 선봉은 경우가 맡았다.

몽촌성과 위례성까지 거리는 지척이라 서둘러 말을 달렸다.

그들은 한 시진 조금 지나 위례성 앞 벌판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아직 추수 전이라 들판에 곡식이 농부의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고, 가을 햇볕이 너무도 따가운 날이었다.

“속도를 늦추고 사위를 경계한다. 필경 매복이 있을 것이다.”

경우의 지시에 휘하 모달과 당주들이 각기 부대를 지휘해 속도를 늦추며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경우의 눈엔 신라군이 들판에 충분히 매복 가능하고 잘 익은 곡식들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실상 위례성에선 대책 회의 끝에 여러 성에서 원군이 도착하면 그때 힘을 실어 일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니, 공연히 진군 속도만 늦춰 아주 조금이나마 신라군에게 시간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낮은 구릉과 평지에 넓게 성벽을 두른 위례성 앞까지 경우가 진격하였을 땐, 이미 원군을 명하는 각간 김서현의 서찰을 전령들이 지니고 떠난 뒤였다.

“고구려의 대모달 위장군 온달께서 남동위장군이 되시어 우리 고구려의 고토를 침범한 너희에게 죄를 묻고자 오셨으니, 신라의 각간 김서현은 당장 나와 엎드려 용서를 구하거라!”

경우가 당당히 말을 몰아 위례성 앞에 홀로 서서 이렇듯 외쳤다.

그러자 마침 성벽을 살피던 김인문이 가소롭다는 듯 화답하였다.

“계집같이 비리비리한 놈이 목청은 좋구나! 어디 성 앞까지 온 김에 그 목청으로 노래 한 곡조나 뽑다 가거라! 하하하.”

김인문의 이 비아냥에 경우의 눈꼬리가 획 올라가며 활을 당기니, 성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 김인문이 쓴 투구에 꽂힌 깃털을 날려 버렸다.

“아니, 이런!”

김인문이 놀라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때마침 곁에 있던 대감 무은이 부축해 겨우 망신은 면할 수 있었다.

이 모습에 경우가 깔깔깔 웃으며 조롱하였다.

“너는 어찌 내가 노래도 부르기 전에 춤부터 추는 것이더냐? 뭐가 그리 흥에 겨운지 어디 사연이나 들어보자. 하하하.”

경우의 이 조롱에 김인문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칼을 빼어 들고 성 밖으로 나가려 하니, 곁에서 지켜보던 대감 무은이 소매를 잡고 만류하였다.

“장군 고정하십시오. 소장이 나가 저 버릇없는 놈을 잡아 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은이 이토록 만류하며 청하니, 김인문이 바로 승낙하였다.

“대군을 움직여 싸움을 벌임은 각간의 명을 받아야 하나, 저 시원찮은 놈 하나 잡아들임은 내 재량으로도 가능하다. 그대는 당장 나가 저놈을 잡아 오거라! 내 친히 저놈이 사내구실 할 수 있는 종자인지 발가벗겨 놓고 매질을 하겠노라!”

김인문의 명이 떨어지자 무은이 말 위에 올라 성문을 나섰다.

고구려군은 위례성의 성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리자 모두 경계하며 활을 겨누었다.

“아서라! 누가 나오는 듯하다.”

경우가 모달과 당주들을 진정시키며 성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긴 수염이 멋들어진 장수가 땅까지 끌릴 만큼 긴 월도를 비켜 쥐고 천천히 말을 몰아 나오는 것이 들어왔다.

“김서현이란 놈을 불렀는데, 졸개가 대신 엎드려 절하러 나온 것이더냐?”

대감 무은의 갑주가 크게 화려하지 않고, 여기저기 흙과 피로 얼룩져 있음에 경우가 졸개라 놀린 것이다.

무은은 경우의 조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몰아 나오며 월도를 경우에게 들어 올려 가리키며 말하였다.

“신라 장수 대감 무은이다. 비록 직책은 높지 않으나, 네놈을 상대함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이 말에 경우가 무은을 살펴보고는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고작 대감이더냐? 나는 대고구려의 말객 경우다! 네놈을 상대할 겨를 없으니, 돌아가 더 높은 놈 내려오라 하라!”

고구려의 말객은 대모달 다음가는 무관으로 신라의 대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관이었다.

나라가 달라도 서로의 관등은 존중하는 법이라.

파진찬 건품, 이소벌이나 아찬 박춘수 혹은 소판 김인문 정도의 장군들이 경우를 대적함이 그 격에 맞았다.

대감 무은이 경우를 잠시 응시하더니, 가볍게 머리 숙여 예를 표하고는 중후하게 답하였다.

“장군이 말객 경우님이시구려. 소장 익히 장군의 위명을 접하여 흠모하던 중이었소. 불초 소생 실력이 보잘것없으나, 감히 장군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백 합만 선보여 주십시오.”

이렇듯 무은이 공손하면서도 당당히 화답하니, 성미 까탈스런 경우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때 모달 돌비수가 당주들과 함께 말을 몰아오며 경우에게 권하였다.

“저런 수졸을 장군께서 친히 대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주 중 아무나 나가 상대하여도 되오니, 잠시 뒤로 오십시오.”

돌비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으로 개마무사의 갑주를 만들고, 병장기로 사용할 쇠를 두드리던 인물이었다.

사람됨이 지혜롭고 힘이 장사라 고구려군에서 장수로 삼은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장수들과 달리 창과 도검이 아닌 커다란 쇠망치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손에 익어 무척 가벼이 다루었다.

고구려인들은 이름에 돌과 산, 바람과 비, 구름과 하늘, 물과 흙 등 눈에 익은 자연을 사용하길 좋아하였기에, 투박하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많았다.

“아니요. 내가 저자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테니, 그대는 지켜보시오.”

경우가 딱 잘라 말하며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무은을 피해 물러설 리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비 대식과 해진에게 검술을 배운 터라, 단기 접전에도 자신이 있는 경우였다.

이때 슬호화의 목을 벤 고구려 장수 경우가 대감 무은과 단기 접전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군들이 위례성 성벽 위로 몰려왔고, 그 속에 각간 김서현과 무은의 아들 소감 귀산도 있었다.

“어디 그 길고 둥근 월도 솜씨 좀 보자!”

먼저 경우가 외치며 달려드니, 무은도 월도를 휘두르며 일격에 그녀의 머리를 가르고자 높이 치켜들며 내리쳤다.

깡!

쇠와 쇠가 맞닿으며 불꽃이 일고, 경우의 검이 무은의 월도를 밀어내니, 무은도 연약해 보이는 경우를 다시 보며 재차 월도를 휘둘렀다.

“장군, 보기보다 완력이 상당하오! 어디 이것도 막아 보시오!”

무은이 이번엔 곱절의 힘을 더하여 경우를 향해 월도를 휘둘렀고, 경우도 이를 피하지 않고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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