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전승장군 (5)
당시 위례성은 파진찬 건품(乾品)과 이소벌이 지키고 있었다.
각간 김서현의 원군 요청에 건품이 직접 휘하 장수 대감(大監) 무은과 함께 군을 이끌고 몽촌성을 구하러 오던 중이었다.
경우가 신라군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날린 두 대의 화살은 선두에선 대감 무은의 휘하 소감 둘의 목숨을 끊었다.
이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 신라군을 고구려군이 순식간에 에워싸고는 일제히 화살을 날리며 돌격했다.
이에, 대감 무은의 아들 소감 귀산(貴山)이 오랜 벗 소장 추항(箒項)과 함께 각기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힘차게 맞섰다.
소감은 대감 아래 무관으로 소장과 관등이 같았는데, 대감이 직접 임명하였다.
올해 열다섯인 귀산은 아비 무은을 따라 출병하여 소감이 되었으나, 그 실력은 매우 출중하여 한 자루 장창을 잘 다루었다.
추항은 특이하게도 커다란 방패와 짧은 검을 잘 다루었는데, 두 벗은 원광 대사의 제자로 이 출병이 이들에게 첫 출전이었다.
“귀산! 내가 화살을 막을 테니, 길을 여시게!”
추항이 커다란 방패로 달려드는 고구려 기병을 말까지 밀어붙이고는 귀산에게 소리쳤다.
실로 놀라운 괴력이었다.
이에 호응해 귀산이 창을 휘두르며 길을 여니, 경우가 두 대의 화살을 활에 먹이고 겨누다가 아직 이 둘이 솜털도 벗지 않은 소년임에 놀라 활을 내리었다.
십오 세 동갑내기 두 벗이 각기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고구려군의 급습을 겨우겨우 버티니, 파진찬 건품과 대감 무은이 급히 살 길을 찾아 길을 뚫고 내달렸다.
그제야 귀산과 추항도 패주하는 신라군의 뒤를 맡으며 물러서는데, 이 모습에 경우가 나름 감탄하며 더 이상 추격을 금하게 하였다.
“어린 것들이 꽤 열심히 하는구나. 더 크고 더 살아야 할 나이니, 그만 쫓거라.”
경우의 이 명이 없었다면 건품을 포함한 모든 신라군이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이 모두가 소년 장수 귀산과 추항의 공이라 할 것이다.
경우가 위례성에서 출병한 신라의 원군을 격파할 시점.
온달이 쏘아 올린 효시가 몽촌성 위를 날며 긴 매의 울음이 신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었다.
이를 신호로 막바우가 창병들을 이끌고 토성으로 뛰어올랐다.
돌로 쌓은 성벽보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힘에 겹더라도 내달려 오르면 토성 위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막바우의 돌진에 장창병과 창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를 따르니, 김서현이 놀라 다른 방면의 수비군을 급히 돌려 성벽을 올라 지키라 명하였다.
“이곳을 지켜라! 활을 당겨라!”
이때를 노려 기악이 동북 방면 성문으로 내달려 양날 도끼로 성문을 내리치며 독려하니, 환도수와 부월수를 이끌고 기범이 토성에 올랐다.
또한 기훈이 궁노병을 독려하며 토성으로 화살을 쏘아 붓게 하였다.
온달과 박춘수의 예상대로 몽촌성은 평지에 올린 토성으로 요새의 기능이 산 위에 돌로 성벽을 쌓은 산성보다 현저히 떨어져 이 한 번의 양동 공격으로 성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부터 성 안을 휩쓸어 버린다. 가자!”
온달의 외침과 함께 기병들이 동북 방면 성문으로 밀려들어갔다.
그 선두엔 온달이 운철 대검을 휘두르며 신라군을 풀 베듯 넘기며 길을 열었다.
막바우도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들어와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찌르며 앞서 나가는데, 슬호화가 막바우를 발견하고는 두 자루 도끼를 쥐고 달려들었다.
“이놈 온달! 나와 겨루어 보자!”
슬호화는 막바우가 아차산성에서 자신이 온달이라 외친 것을 상기해 그를 아직도 온달로 여기며 덤벼든 것이었다.
막바우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온 고구려군들이 슬호화를 막고자 달려들었다.
그러나 슬호화의 쌍도끼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속절없이 머리가 으깨지고 흉곽이 부서져 쓰러지기만 하였다.
고구려군에게 사위가 둘러싸임에도 슬호화가 두려운 기색 없이 막바우만 노리며 달려드니, 이 모습에 막바우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저 괴물 같은 놈이… 왜 나를?”
이미 아차산성에서 슬호화를 대적한 경험이 있는 막바우인지라, 자신이 슬호화보다 한참 모자람을 잘 안 것이다.
막바우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계속 슬호화에게 덤벼들어도 슬호화는 거침없이 쌍도끼를 휘두르며 계속 막바우에게 다가왔다.
슬호화가 맹렬히 도끼를 휘두르며 달라붙으니, 아직 재주가 부족한 막바우가 밀리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말을 몰아 성 안을 누비던 온달이 이 광경을 보고는 생각할 겨를 없이 누렁이를 재촉해 달려왔다.
“막바우! 버티시게!”
온달의 외침에 막바우는 물론이요.
동남 방면을 돌파한 고구려군의 사기가 드높아지며 신라군을 밀어붙이니, 이 기세에 놀란 슬호화가 막바우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네놈은 온달이 아니구나! 오늘은 살려 주겠다.”
공성보다 수성이 수월하나, 성문이 열리고 성벽을 넘는 순간부터 기세가 바뀌어 수성하는 군은 패주하는 법이라.
각간 김서현도 더는 이 몽촌성을 지킬 방도가 없다 생각하며 도주하기 시작했고, 박춘수와 김인문이 그를 호위하여 남서 방면 성문을 열고 패주하였다.
슬호화도 단신으로 고구려군의 포위를 뚫고는 무작정 성을 빠져나왔다.
“위례로… 위례로 가야 한다.”
슬호화는 뒤쫓아 몰려오는 고구려군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말처럼 튼튼한 두 다리로 땅을 박차며 내달렸다.
그때였다.
멀리 앞에서 창과 칼이 부딪치며 신라군의 비명이 들려왔다.
앞서 간 김서현 일행이 경우가 이끈 기병에게 걸려 처참히 죽임을 당하는 소리였다.
“앞에도 고구려 놈들이 있구나!”
슬호화는 피해 돌아갈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이 곧장 전투가 벌어지는 전방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 헛구역질이 나올 때쯤, 자신이 신라군의 시신을 밝고 있음을 깨달은 슬호화가 울분에 차 크게 부르짖었다.
“이 쌍도끼로 찍어 죽일 고구려 놈들아! 여기 슬호화가 왔다! 내 쌍도끼 맛 좀 보아라!”
이 외침에 사지에 몰렸던 김서현이 크게 반가워 소리쳤다.
“나 좀 구하게!”
김서현은 자신을 따르는 군사를 거의 잃고 김인문과 박춘수와 함께 사로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각간 김서현의 도움 요청에 슬호화가 쌍도끼를 춤추듯 휘두르며 종횡무진 돌파하니, 이 모습에 가만히 있을 경우가 아니었다.
“무모하기가 멧돼지만큼 저돌적이구나! 사나운 짐승 사냥엔 이 화살이 제격이지. 받아라!”
경우가 두 대의 화살을 활에 먹여 슬호화를 향해 날리니, 여지없이 슬호화의 등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슬호화의 돌진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섣불리 쏜 화살에 맞은 범 마냥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각간! 이곳은 내가 막을 터이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어느새 슬호화가 각간 김서현 앞까지 달려와 고구려군을 향해 몸을 획 돌리는데, 그의 등에 화살 십여 개나 박혀 피가 등을 시뻘겋게 적시고 있음이 김서현의 눈에 들어왔다.
“어찌, 이다지도…….”
김서현이 슬호화의 모습에 감격했지만, 한편으론 애처로워 말을 잇지 못하였다.
냉정한 박춘수가 말을 끌고 와 김서현을 태우고는 자신도 다른 말에 오르며 슬호화에게 잠시 시선을 둔 후 바로 도주를 시작하였다.
박춘수처럼 냉정하지 못한 김인문이 슬호화를 돕기 위해 칼을 고쳐 잡으니, 아직도 자신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림에 술호화가 벼락 치듯 호통을 질렀다.
“어서 가라 하지 않았소! 정녕 함께 죽을 셈이오?”
이 와중에도 슬호화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고, 삭(기병창)을 쥔 고구려 기병들이 달려드니, 그제야 김인문도 말에 올라 도주하였다.
자신의 등 뒤에서 모든 인기척이 사라지니, 슬호화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지고 그의 쌍도끼가 다시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기병의 삭을 피해 말 머리를 내리찍고 몸을 솟구쳐 또 다른 고구려 기병의 머리를 찍으며 광분해 날뛰니.
피를 흠뻑 뒤집어쓴 슬호화의 모습이 악귀와도 같아 고구려군들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는 다가서지 말고 활을 당겨라!”
경우가 침착히 명을 내리자, 슬호화가 눈빛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데리고 갈 것이다!”
이 외침과 함께 슬호화가 경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이를 막으려 고구려 기병들이 삭을 들이밀고 화살을 날렸다.
어깨와 가슴, 팔과 다리에 십여 개의 화살이 더 박히고, 삭에 찔려도 슬호화의 내달림은 조금도 멈춤이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군의 시신이 말과 함께 널리기만 하였다.
경우도 공포에 질려 연달아 화살을 날리었다.
모든 화살이 슬호화에게 명중하였으나, 슬호화는 기어코 경우의 앞까지 다가와 한 발 한 발 내디디다가 끝내 양 무릎에 화살이 박혀 걸음이 멈추었다.
“이… 이 고구려 놈아…….”
슬호화는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에 양손마저 힘이 풀려 도끼를 놓쳤다.
그 모습을 본 경우가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 들고는 슬호화의 곁에 서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년이다.”
“뭐라? 이 고구려 놈이 뭐라는 것이냐?”
슬호화가 경우의 말을 이해 못 해 되물으니, 경우가 슬호화의 귀에 대고 그만 듣도록 차분하면서도 낮게 속삭였다.
“내가 놈이 아니고 년이란 말이다. 이 신라 놈아.”
이 말을 끝으로 경우가 검을 슬호화의 목에 깊이 박아 계속 밀어 넣었다.
검날이 뼈를 가르고 근육을 자를 때마다 슬호화가 컥컥 소리만 내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한 모금의 피를 경우에게 내뱉고는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다.
“참 지독한 놈이다. 이놈의 시신을 말에 실어 나르거라!”
슬호화의 무용과 기개에 질린 경우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명을 내렸다.
* * *
“장군, 소장이 각간 김서현을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고작 이 한 놈 때문에 놓쳤나이다.”
슬호화의 시신을 말에 싣고 와 경우가 보고하자, 온달은 피범벅이 된 슬호화의 싸늘한 시신을 알아보고 이 정도면 훌륭하다며 경우를 칭찬하였다.
“이자의 무용이 상당하던데, 이 시신만으로도 충분하오. 고생하였소.”
온달의 칭찬에 이어 슬호화의 시신을 들추던 막바우가 경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하였다.
“내가 이놈에게 두 번 죽을 뻔했구먼. 아무래도 경우 자네가 나보다 뛰어난가 보네. 아주 이놈 몰골이 넝마가 되었구먼.”
고구려군이 모두 달려들어 삭과 화살을 날린 것도 모르고, 경우 혼자 슬호화를 이토록 처참히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걸 말이라 하오? 아무렴 내가 막바우 그대보다 위이지.”
막바우 앞에서 괜히 사실대로 말하기 싫어진 경우가 이렇듯 말하니, 그녀가 이끈 기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경우가 홀로 슬호화를 넝마로 만들었다 믿게 되었다.
이때 기악이 온달에게 다가와 슬호화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장군, 이자가 두 자루 도끼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슬호화란 장수가 분명합니다.”
“슬호화라?”
온달이 되물으니, 기악이 마저 이야기했다.
“신라군 총사령관 각간 김서현의 심복 장수로 만부적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자의 목을 잘라 창에 꽂아 진군하면 적의 기세가 꺾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기악의 이 제안에 온달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아닐세. 그토록 대단한 장수라면 예를 갖춤이 도리일세. 시신을 정갈히 수습해 좋은 관에 담아 김서현에게 보내시게나.”
“어찌 적에게 관용을?”
경우가 놀라 되물으니, 온달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만일 그대가… 아니지, 그대는 살아야지. 아무튼 만일 내가 전사한다면 나는 죽어서도 신라군이 이런 처사를 해 주길 바랄 것일세.”
온달의 이 말에 경우도 더는 이견을 내지 않고, 군사들에게 슬호화의 시신을 예를 갖춰 수습하라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