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전승 장군 (4)
고구려군은 총공세를 펼치지 않고 병종별로 몽촌성을 괴롭혔다.
기훈이 궁노병을 이끌고 북을 울리며 당장이라도 몽촌성을 공격할 듯 고함을 지르다가 실컷 화살을 날리고는 뒤로 쑥 물러나면.
기악이 북을 울리며 부월수에게 고함을 지르게 하고.
또다시 기범이 환도수를 끌고 한바탕 소리 지르는 식으로 밤새 소란을 부리니.
몽촌성 북동 방면을 지키는 군사를 포함한 모든 신라군이 밤새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고구려군은 경계를 단단히 한 채, 교대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고구려군이 이제부터 아차산성에서 몽촌성을 굽어보며 전해올 정보를 취합해 공격 준비하는 것에 비해, 신라군의 전략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맞춰 수성하는 것 외에 달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곧 놈들의 공세가 있을 것이오. 이대로 수성을 하느니, 나가 싸웁시다.”
김인문이 성문을 열고 일전을 벌이자 주장하니, 김서현이 박춘수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아찬,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이미 전날 박춘수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전황이 어려워졌으나, 혹여 박춘수가 또 다른 안을 낸다면 받아들일 요령으로 물은 것이다.
이에 박춘수는 막사 안으로 동이 터오며 비치는 햇살에 시선을 두고 차분히 답하였다.
“소인, 크게 패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저 푸른 한수 건너로 되돌려 보낼 안이 떠올랐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안이 아니라 크게 패하지 않을 안이라 말하니, 김인문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불편한 심사를 내비쳤다.
“이길 방도를 내야지. 에이!”
“적이 우리의 동향을 훤히 내려다보며 싸우는데,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장군께선 피해 없이 적을 물리칠 수가 있사옵니까?”
김인문에게 박춘수가 되물으니, 이 물음에 김인문이 답하지 못함은 당연하였다.
“그만들 하시게. 아찬은 어서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시게나.”
김서현이 두 사람을 자중시키고 박춘수에 마저 안을 내라 명했다.
박춘수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매복을 우려한 고구려군이 나루의 배들을 급습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
“서둘러 군선을 미추홀(彌鄒忽, 현재 인천 지역)과 당항성(唐項城, 현재 화성의 바다와 인접한 산성)으로 보내 미추홀 문학산성 군을 퇴각하게 하고, 구봉산(九峰山)의 당항성에선 원군을 실어 이곳으로 오게 하면 온달은 한수를 우리가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퇴각할 것입니다.”
“…….”
“그때 우리가 이 몽촌성을 버리고 위례로 옮겨 재정비한다면 이 일대는 여전히 우리 신라가 세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이에 김인문이 언성을 높여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대는 어찌 이 몽촌성을 포기하고 퇴각만 고집하오? 고작 강 건너 작은 산성 하나 잃었다고 이리도 겁먹는 게요?”
김서현도 이번엔 김인문의 편을 들며 박춘수에게 물었다.
“미추홀마저 포기하고 군을 퇴각시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데다가 당항성에서 원군을 이곳에 보내게 함에도 어찌 우리가 위례로 퇴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위례에는 어찌 원군을 청하지 않는 것인가?”
김서현의 추궁에도 박춘수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본래 미추홀은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沸流)가 문학산에 터를 잡은 곳으로, 당항성에서 바닷길로 급습하여 취하긴 했으나, 우리가 한수를 넘어 육로로 올라가지 못하는 한 평양성과 가깝고 근처에 고구려의 관미성과 오두미산성 및 교동도가 있기에 지키기 어렵습니다.”
설명하는 박춘수의 마음 한편엔 한수 하구와 서해의 여러 고구려 수군 기지가 걸렸으나, 애써 이 부분까지 언급은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경계도 피하지 못하고 원군을 배에 실어 온다면 장수의 무능함으로 모두 수장될 터, 애써 생각하지 말자.’
그의 마음속은 ‘만일 하구에서 고구려 수군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려 수군의 눈을 피해 당항성에서 원군이 온다면 온달은 당연히 놀라 일시 군을 강 건너로 되돌릴 것입니다.”
“…….”
“그러나 아차산성에서 시야를 확보한 후 다시 군을 정비해 올 것이니, 결국 당항성의 원군마저 이 몽촌성에서 잃게 될 것이옵니다.”
“음…….”
“병법에 이르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는데, 저 아차산성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례성에서 원군을 청하지 않음은 우리가 군을 보전해 물러나 뒤쫓는 고구려군을 위례 앞에서 군을 합하여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고 보니, 박춘수의 의견은 어느 하나 이치에 맞지 않은 부분 없이 순리대로였다.
그러나 군을 이끄는 김서현의 입장으로선 미추홀뿐만 아니라 이 몽촌성마저 너무 쉽게 내어주는 듯해 썩 내키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대는 이 몽촌성을 내어주잔 말이로군.”
“그러합니다. 이 몽촌성은 비옥한 토지와 뱃길을 이용해 교역하기 좋은 자리이오나, 저 아차산성이 있는 한 요새로서 가치가 낮아 지키기 어려운 단점이 있사옵니다. 버려야 하옵니다.”
초지일관 몽촌성을 버리자 주장하는 박춘수를 잠시 바라보던 김서현이 무겁게 입을 열어 엄히 명하였다.
“포구에 전령을 보내 군선들은 미추홀과 당항성으로 보내라! 당항성은 몽촌성으로 원군을 보내고, 미추홀은 포기하니 퇴각하라 전하라! 또한 전령을 위례에도 보내 당장 이곳으로 원군을 보내게 하라.”
미추홀은 포기하여도 몽촌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김서현의 의지에 박춘수도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나루의 신라 군선들은 온달의 고구려군이 공격해 불태우기 전에 보전하러 하구로 나아갔다.
위례로 떠난 전령도 곧 원군을 이끌고 올 것이 분명했으나, 박춘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 * *
“장군님, 나루의 신라 군선이 이동하였다 합니다.”
경우가 온달에게 소식을 전하니, 온달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위례와 당항성에서 시일을 두고 원군이 오겠군.”
온달의 이 말대로 위례는 말을 달려 두 시진이 걸리는 거리고, 당항성은 뱃길로 빨라도 왕복 사나흘 거리라 원군이 도착할 시점은 사흘 정도 시일의 차이가 예상되고 있었다.
“전령을 보내 미추홀과 당항성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알리고, 그대는 위례에서 올 적의 원군을 대비하시게.”
온달의 명을 받은 경우가 전령에게 적이 뱃길로 움직일 것을 알리는 서찰을 작성해 준 후, 바로 군을 이끌고 조용히 몽촌성 뒤로 돌아갔다.
온달은 당항성에서 올 신라의 원군을 조금도 우려하지 않았다.
이는 한수가 넓으나, 대해보다 넓지 않다는 것과 미리 전령의 보고를 접한 관미성의 고구려군이 향후 하구에서 신라군의 움직임을 봉쇄하리라 믿은 것이다.
관미성(關彌城)은 그 옛날 광개토 태왕이 수군 일만 명을 군선 오백사십여 척에 나누어 싣고 황해도 조읍포에서 출발해 공략하여 취했다.
이때 선단의 길이만 십오 리에 달하고 뱃길로 사흘이나 걸렸으며, 전투 보조 인원은 이만오천이 넘어 일곱 방면에서 이십여 일간 공략해 취한 성이었다.
이 관미성 이외에도 서해의 교동도(橋洞島)와 한수 하구 조강의 오두산성(鰲頭山城) 등도 건재했다.
그래서 한수 하구에서 신라군의 움직임을 고구려 수군이 막을 수 있으리라 믿고, 온달 자신은 육상의 신라군을 물리치기로 처음부터 작심했던 것이다.
박춘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온달은 더 침착하며 애써 욕심 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해상에서의 신라군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고구려 수군에게 맡기기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신라의 매복 위험이 있는 나루의 군선을 공략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전투 인원을 싣지 않은 신라 군선의 움직임을 고구려 수군이 한수를 뒤져 찾아낸다면 이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 됨은 당연하였다.
“날이 밝았으니, 군사들에게 든든히 배를 채우라 명하고, 우린 저 토성을 둘러나 보세.”
온달이 막바우와 함께 몽촌성 앞으로 나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기는 하나 성벽을 넘기에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단숨에 군을 몰아 사방에서 몰아붙이면 저 토성 넘는 것은 일도 아닐 듯합니다.”
막바우 역시 아차산성을 접했을 때에 비해 몽촌성 공략을 더 수월히 여기는 듯하였다.
든든히 배를 채운 고구려군은 기악의 부월수를 선두로 동북 방면 성문을 공략하고 궁노병이 활을 날리며 환도수가 토성을 기어오르니, 그 기세가 사뭇 강대하였다.
온달 군의 맹렬한 기세를 지켜보던 박춘수는 몽촌성이 자신의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어렵다 판단하여 김서현을 찾아가 직언을 고하였다.
“각간, 이 성은 해질녘까지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위례에서 원군을 기다리지 마시옵고 서둘러 군을 빼십시오.”
“뭐라? 죽을힘을 다해 막고 있거늘 그대는 어찌 이리도 사기가 하락할 소리만 계속하는 것이오?”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란 박춘수의 말에 김서현이 노기 서린 음성으로 꾸짖었으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곧 위례에서 원군이 올 것인데, 어찌 이 성을 버리라 하오? 한 번 더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다면 아무리 아찬 그대라 하여도 내 용서치 않을 것이오!”
그러나 박춘수는 두려움 없이 계속 직언을 하였다.
“전투는 이기기도 하고 질 수도 있는 것이오나, 군사는 한번 죽으면 되살릴 수 없습니다. 군을 보전하여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싸움은 당연한 이치이온데, 어찌 어려운 곳에서 싸워 군을 잃으시려 하십니까?”
김서현은 박춘수의 말이 이성적으로는 모두 옳아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노기 어린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밀치고 밖으로 나와 크게 호령할 뿐이었다.
“전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몸을 사리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내 이 검으로 목을 베리라!”
이 외침은 박춘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그도 허리 숙여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허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들 몽촌성을 훤히 들여다보는 고구려군을 대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온달은 아차산성에서 전한 정보를 취합하여 비교적 신라군의 수비가 약한 곳을 파악하였다.
그럼에도, 몽촌성 아홉 개의 성문 중 계속 동북 방면만 공략하게 한 것은 따로 막바우에게 명하여 동남 방면 공략을 준비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기악이 몰아치는 동안, 자네는 내가 신호를 보내면 저곳을 공략하시게. 신라군이 당황해 군을 돌리면 기악이 공략하기 쉬울 것이고, 자네가 먼저 성을 넘는다면 그 틈에 기악도 성문을 뚫기 쉬울 것이네.”
“명을 받듭니다.”
막바우가 온달의 명을 받아 장창병과 창보병을 끌고 몰래 몽촌성 동남 방향으로 이동하여 온달의 신호를 기다렸다.
한편, 경우는 몽촌성 뒤로 돌아 위례성에서 보내올 신라의 원군을 기다렸는데, 두 시진이 못 되어 급히 달려오는 신라군을 볼 수 있었다.
말과 함께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긴 고구려 기병의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위례성의 원군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몽촌성을 구하고자 달렸다.
모두 기병 이백여 기에 보병 삼천여 명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듯 무척 지쳐 보였다.
“급히 군을 추려 온 모양이구나. 추가 병력은 아직 없는 듯한데.”
각간 김서현이 한수에 사활을 걸고 몽촌성을 지키며 독려했다.
그리하여 위례성에서 원군을 급파한 것으로 이후에도 주위 성에서 군을 추려 몽촌성에 원군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우가 살며시 활을 들어 두 대의 화살을 먹인 후, 선두의 장수 둘을 동시에 겨냥해 날렸다.
천하의 명궁 경우가 날린 화살은 여지없이 신라 장수 두 명의 이마에 박혔다.
이와 동시에 경우가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몸을 날려 말에 오르니, 고구려군들도 이를 따라 행동을 취하였다.
이는 북방 초원의 민족이 하던 매복 기술을 경우가 익혀 가르친 것이다.
말에 오른 고구려 기병 일천이 동시에 활을 당겨 날리는 동작까지 너무도 매끄럽고 신속하여 경우가 날린 화살에 맞아 즉사한 신라 장수 둘이 아직 말 위에 앉은 상태였다.
“살을 날리며 에워싸라!”
경우의 명이 떨어지자, 일천여 대의 화살이 일시에 바람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