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03화 (103/328)

103화 전승 장군 (3)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각간 김서현이 아찬 박춘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찬, 그대는 대비책이 있는가?”

“두 가지 방도가 있사옵니다.”

박춘수가 머뭇거림 없이 말하니 모두가 기뻐하였다.

“두 가지나? 그래 무엇인가?”

김서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서리며 물으니, 박춘수가 차분히 답했다.

“일 책은 이곳을 버리고 위례로 군을 물리시는 것이옵니다.”

“뭐라? 힘겹게 얻은 이곳을 버리라?”

김서현이 노기 서려 물었으나, 박춘수는 여전히 차분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적은 저 아차산성에서 한수는 물론이요. 이 몽촌성까지 굽어볼 터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이미 강을 건너온 온달에게 전서구와 깃발을 이용해 알릴 것이니, 이 몽촌성에서 적을 맞아 싸움은 극히 불리하옵니다.”

“…….”

“하여, 여기서 군을 물려 위례성 앞에서 일전을 벌임이 합당하옵니다.”

시야가 넓고 밝은 요동 일대의 군사들이 아차산성 망루에 올라 한수 너머를 주시하면, 몽촌성 내의 깃발과 많은 무리의 사람 움직임까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보다 먼 곳도 창날과 검날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으로 대략적인 병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듯 박춘수가 우려함은 당연하였다.

박춘수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김서현이 한숨을 내쉬며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대의 의견이 옳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얻은 이 성을 싸우지도 않고 내어줄 수야 없지 않은가? 아니 될 일이야. 그래, 다른 한 가지 의견은 무엇인가?”

남은 의견을 재촉하니,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춘수가 입을 열었다.

“다른 계책 하나는 바로 군을 이끌고 다시 한수를 건너 아차산성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박춘수의 이 제안에 소판 김인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견을 내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오? 적이 내려다보고 있다면서 한수를 넘으면 적은 이미 대비할 것 아니오?”

“…….”

“설령 피해를 감내하고 도하를 하더라도 저 아차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지난번 우리가 점령할 때도 수많은 피해와 한 달이 넘게 적의 보급을 끊어 항복을 받아 낸 것이오. 지금은 그럴 시일이 없지 않소? 가당치도 않은 소리요.”

소판 김인문이 이토록 반대하는데도 아찬 박춘수는 안색의 변화 없이 제 의견을 마저 이었다.

“고구려군은 이미 온달이 일만이나 이끌고 도하하였을 것이고, 강 건너는 아차산성에 주둔한 삼사백이 전부일 것입니다.”

“…….”

“우리가 서둘러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면 온달이 되돌아 배를 타고 아차산성을 돕기 어려울 것입니다.”

“음…….”

“또한 설령 온달의 군사가 배에 올랐더라도 이미 도하한 우리 군과 몽촌성의 군이 한수 양쪽을 모두 취해 막을 것이니, 한수에 두둥실 뜬 고구려군이 배에서 내릴 때 앞뒤로 공격이 가능합니다.”

“적이 일부만 도하한다면 어찌하오?”

이 물음에도 박춘수의 답은 막힘이 없었다.

“만일 고구려군이 일부를 남기고 배에 올랐다 하여도 우리 군이 먼저 강을 건넌 상태라 뒤이어 배에서 내리는 고구려군을 급습할 수 있습니다.”

“그 말대로라 하여도 아차산성은 어찌 공략할 것이오?”

김인문의 이 물음에 박춘수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답했다.

“이 역시도 두 가지 방도가 있는데, 하나는 산 중턱부터 불을 질러 아차산성까지 태우는 것입니다.”

“불을 지른다?”

“산에서 나는 불은 바람이 불꽃을 멀리까지 날리니, 제아무리 아차산성의 성벽이 높다 하여도 화기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간신히 버틴다 하여도 산을 다 태운 화염에 지쳐 감히 우리를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산까지 태우겠다는 말을 쉬이 한 연유는 해가 좋은 가을이라 초목이 마른 상태였고, 북서풍도 간간히 불기에 중턱에서 일어난 불이 바람에 실려 정상까지 불씨를 나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춘수는 좌중의 안색을 잠시 살피고 다음 계책도 마저 말하였다.

“다음 방도는 삼천이든 사천이든 우리 군을 저 아차산성에 밀어 넣어 점령한 후, 우리도 고구려도 취하지 못하게 허무는 것이지요.”

“허문다?”

“아차산성만 없다면 우리는 이 토성에서 수성하며 원군을 기다려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온달은 아치산성이 허물어지는 순간 배를 타고 한수를 넘어 되돌아갈 것입니다.”

박춘수는 제 할 말을 모두 마치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각간 김서현은 박춘수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 그동안 아찬의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며 함께 공을 세웠고, 이번 출병에서도 그대의 공으로 이곳은 물론이요. 아차산성까지 취하였소. 허나…….”

여기까지 말한 김서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 그대의 여러 의견들은 너무도 극단적이라 따르기 어렵소. 취하지도 않을 성을 뺏고자 너무도 큰 피해가 예상되고, 또한 이 몽촌성을 적에게 고이 내어 주기도 어렵소. 이번만큼은 소판의 안을 듣겠소.”

김서현이 이렇듯 잘라 말하니, 박춘수도 머리 숙여 명을 따르며 더 이상 이견을 내지 않았다.

소판 김인문이 새로 안을 내는데, 몽촌성을 지키며 서둘러 정찰병을 사방에 보내 고구려군의 동태를 파악한 후 급습하자는 제안이었다.

김서현이 그 안을 받아들여 모두가 따르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박춘수가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김서현이 다가와 위로하였다.

“미안하이. 허나 전쟁이란 이성과 이치만으로 할 수는 없네. 시실 본디 싸움이란 감정과 감성으로 하는 것 아닌가?”

이 말에 박춘수가 빙긋 웃으며 답하였다.

“각간의 말씀이 옳습니다. 비록 이곳에서 우리가 패한다 하여도 저 하늘의 장군성을 보니, 온달은 전승을 거두고도 곧 죽을 운명인지라, 최후의 승자는 각간께서 되실 것이옵니다.”

박춘수의 이 말은 몽촌성에서는 신라군이 반드시 패할 것이고, 온달은 계속 승리를 취할 것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온달이 멀지 않아 죽을 터이니, 온달이 죽은 뒤엔 김서현이 승자 아니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듣기에 따라 불쾌할 수 있는 말을 박춘수는 너무도 쉽게 하였다.

김서현은 박춘수의 이 말에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잠시 그의 눈빛을 들여다보다가 몸을 돌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아, 공연한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 * *

온달의 고구려군은 몽촌성 인근 강기슭에서 북동쪽으로 걸어서 반나절 거리 되는 곳에 배를 대고 내린 후.

경우가 기병 일천을 이끌고 선두에 서며 온달과 막바우가 중군을, 기 씨 사 형제가 후군을 맡아 몽촌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였다.

기병이 말을 몰아 달려가면 한 시진도 못 될 거리이지만, 경우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길을 열었다.

강기슭에 우거진 갈대밭을 거의 통과할 무렵, 전방에서 상당한 수의 인기척을 느껴 급히 전령부터 불렀다.

‘매복이 있는가?’

당연한 의심이었고, 곧 전령은 중군으로 달려 이 사실을 알렸다.

잠시 긴장이 흐르고, 한 손을 들어 행군을 멈추게 한 경우가 모달과 당주들에게 손짓으로 전방을 경계케 했다.

그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경우가 화살을 날리자, 순간 쥐 죽은 듯 짧은 고요가 흐르다가 전방에서 크게 북소리가 둥둥 일더니, 이내 곧 신라군이 함성과 함께 갈대밭으로 밀려들어 왔다.

소수의 기병을 선두에 두고 양옆은 구겸창을 쥔 보병들이 몰려왔는데, 그 수가 경우의 기병 일천 기를 충분히 에워쌀 만하였다.

“기습이다! 반격하여 길을 뚫어라! 돌파한다!”

경우가 적을 돌파한 후 말을 돌려 배후를 치는 전형적인 기병 전술 명령을 내리자, 고구려 기병 일천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말을 몰아 내달리며 신라군의 기병과 격돌을 벌였다.

근접에서 펼쳐지는 기병들의 첫 격돌은 기세가 중요한 법.

삼면이 에워싸여 난전을 벌이기 전 먼저 돌격 명령을 내린 경우의 판단이 옳았다.

말 달리며 활을 당겨 신라군의 기병을 이끄는 장수의 가슴팍에 경우가 화살을 먹인 것 또한 효과가 있어, 생각보다 많은 수의 고구려 기병들이 신속히 돌파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적진을 뚫은 경우가 급히 말을 돌리며 다시 명을 내렸다.

“돌격! 이제부터 우리가 놈들을 공격한다! 돌격하라!”

경우의 명에 고구려 기병들은 돌진하면서 능숙히 기사를 펼치며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는 삭(기병창)을 들고 닥치는 대로 신라군을 찌르고 짓밟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전령의 보고를 접한 온달이 막바우에게 기병 일천을 내주며 급히 경우를 도우라 했다.

이에, 막바우가 비호처럼 갈대밭을 날듯이 말을 몰아 신라군의 배후를 급습하였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선발대와 중군의 호응이 신속함에 자신들의 기습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급히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갈대밭 속을 달려 퇴각하였다.

막바우가 신라군의 뒤를 쫓으려 하니, 경우가 막바우의 말고삐를 잡으며 만류했다.

“이 방향으로 쫓으면 신라군은 화공으로 맞설 것이네.”

경우의 말을 듣고 보니, 신라군이 갈대밭 속을 달리며 퇴각한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막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매복이 있을 거란 말이군. 그래 그럴 만해 보이네.”

강기슭에 펼쳐진 갈대밭은 북서풍이 불고 있어 신라군도 함부로 화공을 펼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미리 갈대밭에 몸을 숨겨 매복한 후, 도주하는 신라군의 뒤를 고구려군이 쫓아 지나치면 그때 배후에서 일어나 화공을 펼치고.

이 불길은 마른 갈대밭을 활활 태우며 신라군을 쫓던 고구려군의 뒤를 덮칠 것이 분명했다.

경우와 막바우가 군을 이끌고 속히 갈대밭을 벗어나자, 잠시 뒤 온달도 중군을 이끌고 갈대밭에서 나오며 바람의 방향을 살폈다.

아마도 온달 역시 신라군의 화공을 염려해 바람의 방향이 혹시 바뀌지 않았나 확인한 것이다.

이렇듯 가벼운 전투가 있었으나, 고구려와 신라 양측 모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진군해 강 건너 아차산이 보이는 위치에 이르자, 멀리 아차산성의 망루에서 깃발로 신라군의 동향을 알리는 신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전방에 매복이 있고, 그 수는 기병 천에 보병 이천입니다.”

아차산성에서 보낸 신호를 경우가 확인해 온달에게 전하니, 온달이 고개를 끄덕인 후, 경우에게 적의 배후로 돌아가라 지시하였다.

이렇듯 신라군의 모든 동향을 파악한 채 전투에 임하니, 매복이 있더라도 역으로 공격이 가능해 승기는 고구려군에게 있음이 확실했다.

계속하여 아차산성에선 깃발로 시시각각 정보를 알리는 한편.

전서구까지 날리며 신속히 시야를 확보해 주니, 신라군의 그 어떤 변화에도 고구려군은 가볍게 대응할 수 있었다.

전방에 매복한 신라군을 격퇴한 경우가 다시 돌아와 온달에게 전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시 길을 여니, 조금 느리지만, 진격은 매우 순조로웠다.

이 모든 것은 박춘수가 이미 앞서 예견한 것으로 이젠 그의 말을 따라 행동을 취하기에도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어느덧 고구려군은 몽촌성 동북 방면에 도착하여 가볍게 진영을 꾸렸고.

아차산성에서 날린 전서구가 전한 정보를 취합하여 지도에 신라군의 배치를 표시하였다.

“대략 아홉 개의 성문과 성벽에 이렇듯 군사가 배치되었고, 우리가 동북 방면에 진을 꾸리니, 이곳 성벽과 성문에 신라군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몽촌성 내부까지 훤히 살펴 정보를 보내오니, 이보다 쉬운 전쟁은 없을 듯했다.

“일단 오늘 밤은 야습하는 기미만 보여 적을 잠들지 못하게 한 후, 내일 아침부터 공략을 시작합시다.”

곧 날이 저물 시간인지라, 전서구가 날 수 없기에 온달이 이렇듯 명하니.

이에, 경우가 야습할 것 같은 기미를 신라군이 느껴 밤새 경계하도록 기 씨 사 형제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돌아가며 때때로 북을 치고, 때때로 쥐죽은 듯 움직이시오.”

경우의 지시에 눈치 빠른 기훈이 환히 웃으며 명을 받았다.

“명을 받습니다.”

이미 기훈의 머릿속엔 밤새 신라군을 괴롭힐 방도가 꽉 찬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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