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전승 장군 (2)
막바우도 강 건너 상황을 눈치 채고 서둘러 절벽을 올랐고, 온달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뒤따라 올랐다.
‘군선 서른 척에 작은 나룻배 오십여 척. 대규모 도하다. 놈들이 배에서 내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부터 점령해야 할 것인데… 여기가 놈들의 눈이 되어 사방을 주시하며 시야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
온달의 이 판단은 정확했다.
그들은 아차산성 위에서 사방을 관찰하여 고구려군의 동향을 강 건너에 전하고는 신라군의 도하 위치와 시기를 정하고 있었다.
“막바우 서두르세.”
온달이 막바우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자, 막바우는 대답 대신 절벽을 기어오르는 손에 힘을 주고 더 빨리 올랐다.
힘겹게 절벽 끝까지 올라간 막바우가 절벽 위로 머리를 쑥 올려보니, 아차산성 바로 뒤에 난 작은 성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성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신라군 넷이 서 있는데, 조금 전 항아리를 메고 내려간 군사들을 기다리며 문을 열어 둔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절벽 끝에도 신라군 대여섯이 강 건너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였으나, 성문을 통과해 성 내로 잠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온달도 절벽 위로 머리를 올려 주위를 살피고는 막바우에게 손짓으로 작은 성문을 가리켰다.
“내가 신호하면 저 성문으로 들어가 길을 확보하게.”
“장군님은요?”
막바우의 이 물음에 온달이 몸을 번쩍 솟구쳐 절벽 위로 오르며 답했다.
“지금이네! 뒤따르겠네.”
절벽 위에서 갑자기 사람이 솟아오르니 신라군이 놀라 당황하였다.
이 짧은 순간에 온달은 재빨리 등에 멘 검을 연달아 뽑아 던졌다.
비검술로 날린 검들은 급히 성문을 닫으려 하던 신라군의 목을 정확히 꿰뚫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 틈에 막바우가 성문으로 달렸다.
그제야 정신 차린 신라군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고, 이내 온달의 양손이 쉬지 않고 등으로 움직이며 검을 날려 모두를 제압했다.
결국 온달은 막바우가 확보한 성문을 통해 성 내로 진입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좁은 아차산성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신라군이 주둔한 탓에 온달의 이 잠입은 단번에 눈에 띄고 말았다.
“애써 몰래 들어왔건만…….”
모든 신라군의 시선이 중얼거리는 온달에게 향하는 가운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넌 뭐 하는 놈이냐?”
좁은 성 내에서 이제 막 막사를 나오던 슬호화가 온달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이때 막바우가 방패로 삼고자 성문 한쪽을 완력으로 뜯어내어 들고 오며 말했다.
“내가 막을 테니, 어서 가시오.”
온달에게 작게 속삭인 막바우는 이내 신라군을 보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내가 바로 온달이다! 네놈들이 덤비지 않아 내가 직접 왔느니라! 어서 내게 덤벼라!”
막바우의 이 외침에 온달과 신라군들이 모두 놀라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는 온달이 답답한 막바우가 버럭 역정을 내었다.
“이놈! 막바우 뭐하는 게냐! 이 힘만 센 멍청한 놈아!”
목청만큼은 온달을 능가하는 막바우였다.
우렁찬 지청구에 그제야 정신 차린 온달이 반대편 성문으로 내달렸다.
그 뒤에 이어진 막바우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산성을 뒤흔들었다.
“이 몸이 바로 고구려의 대영웅 검신! 대모달 위장군 온달이다! 뭣들 하느냐? 당장 무릎 꿇거라!”
막바우의 이 도발에도 슬호화가 멍하니 막바우를 살피기만 하는데, 소란에 놀라 뒤이어 나온 각간 김서현이 신라군에게 엄히 명하였다.
“저놈이 뒈지려고 찾아왔구나! 뭐 하느냐? 당장 잡아 꿇리거라!”
김서현의 이 명에 주위의 신라군이 일제히 막바우를 온달로 인정해 달려왔다.
사실 체격만으론 온달이 막바우보다 훨씬 컸으나, 막바우의 두툼하고 굵직한 상체도 범상치 않아 신라군들이 막바우를 온달로 여길 만했다.
온달은 이틈에 앞에 세워진 수레를 뒤집어 번쩍 들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성벽 위에 신라군들이 놀라 화살을 날려도 온달이 머리 위로 치켜든 수레에 박혀 조금도 그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슬호화가 이 광경을 지켜보며 내심 감탄하였다.
‘성문을 뽑아 들고 있는 온달도 대단하고, 수레를 머리 위로 들고 뛰는 막바우란 놈도 대단하구나.’
이렇듯 모두가 온달과 막바우를 뒤바꿔 오인하고 있는 동안, 아차산성 밖에서 공격 기회를 노리던 기 씨 사 형제는 성 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온달과 막바우가 난입했음을 깨닫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장군께서 성문을 여실 것이다! 돌격하라!”
좁은 길로 고구려군이 내달려오자, 성벽 위에 신라군들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온달은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맡기고, 기 씨 사 형제가 이끌고 오는 고구려군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막바우는 성문을 양손에 쥐고 다가오는 신라군을 후려쳐 날려 버리며 성 내를 온통 뒤흔들었다.
그 덕에, 공격을 받지 않은 온달이 그대로 성문으로 내달려 문을 지키는 신라군들에게 수레를 집어 던졌다.
수레를 피하기 위해 신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온달이 바닥에 나뒹군 수레를 밟고는 그대로 성문에 달려들어 빗장부터 확 벗겼다.
“저놈을 막아라!”
장수로 보이는 자가 성문을 열려는 온달을 향해 소리쳤으나, 온달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마저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순간에도 성의 중앙에선 막바우가 성문을 계속 휘두르며 신라군의 접근을 막았다.
보다 못한 슬호화가 마침내 두 자루 도끼를 들고는 허공에 몸을 날려 막바우를 공격했다.
“온달! 나와 겨뤄 보자꾸나!”
허공에서 들려오는 슬호화의 천둥 같은 외침에 막바우가 시선을 돌리려 할 때.
양손에 쥔 성문에 강한 충격이 일어 막바우의 몸이 휘청이며 의지와 상관없이 두어 걸음 물러나야 했다.
술호화의 한 차례 공격으로 양손에 쥔 성문은 이미 박살이나 더 이상 방패로 쓸 수 없게 된 상태라 막바우가 미련 없이 등에 멘 단창을 쥐며 부리부리한 눈매로 슬호화를 노려보았다.
슬호화도 당당한 체격에 두 자루 도끼를 쥔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뭐야? 나무꾼이야? 이 난리통에 나무하러 온 거야?”
막바우가 일부러 빈정거리며 슬호화를 자극하였으나, 슬호화는 놀리는지도 모른 채 답하였다.
“나무하러 온 것은 아니고, 물론 이 도끼로 나무를 벨 수는 있으나, 아무튼, 나는 나무꾼은 아니다.”
‘이놈도 어지간히 모자란 놈이구나.’
막바우가 이렇듯 생각하며 손짓으로 덤비라 신호하니, 슬호화는 망설임 없이 두 자루 도끼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도끼의 움직임이 매우 빠르고 한 동작 한 동작 힘이 실려 막바우의 단창은 이내 곧 부러졌다.
슬호화의 도끼질이 매우 사나워 막바우가 피하기 급급한 가운데, 성문을 돌파한 고구려군이 아차산성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온달이 위기에 처한 막바우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성 내의 신라군은 기세가 꺾였음에도 맹렬히 저항하며 온달의 앞을 막았다.
온달은 당장 막바우의 머리가 슬호화의 도끼질에 쪼개질 상황이라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신라군을 양손에 하나씩 잡아 무작정 슬호화를 향해 던졌다.
자신의 등 뒤에서 광풍이 불어오니, 놀란 슬호화가 몸을 획 돌려 두 자루 도끼로 날아오는 신라군을 후려치고는 몸을 옆으로 날려 다음 공격을 대비하였다.
이 틈에 막바우가 땅에 떨어진 신라군의 칼을 주어 들고 온달을 향해 혼신을 다해 달음질 쳤다.
“나 좀 살려 주시오! 저 쌍도끼 나무꾼 놈이 여간 아니오!”
“막바우 애썼네.”
온달이 막바우를 구하는 사이, 기 씨 사 형제도 성 내로 들어오며 커다란 전투 도끼를 마음껏 휘두르니, 곳곳에서 신라군의 시신이 널브러졌다.
전투는 완벽한 고구려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나, 각간 김서현과 부장 슬호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혼전 중에 절벽 아래로 도망친 듯하였다.
* * *
비교적 작은 산성이고, 막바우가 잘 버텨 준 덕에 고구려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승리였다.
아차산성을 점령한 온달이 주위를 살피니, 성 내 중심에 자리한 망루에선 사방이 시원히 뚫려 사위의 움직임이 훤히 들어왔다.
“과연 요충지로구나.”
작은 산성이지만, 전략적 가치가 충분한 요새였다.
이 승리로 신라군의 도하를 당장 저지할 수 있을 듯하였다.
“시야가 확보되어 한강 저 멀리까지 훤히 들어오니, 적의 도하를 예상하여 막기 좋습니다. 장군,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기악도 망루에 오르며 온달에게 공손히 말하고는 성 내 고구려군을 둘러보며 이곳저곳 정비를 명하였다.
“과연 망우산 도적 떼 산채 수괴답게 산성 정비를 잘하는구나.”
막바우도 망루에 오르며 기악을 칭찬하니, 기악은 그저 허허 웃었다.
“이제 우리가 강을 건너야 할 것인데, 이곳에선 한강 너머 적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니, 며칠 살펴보며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아보세.”
온달이 이렇듯 말하며 막바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막바우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강 너머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어디, 나도 좀 봅시다.”
산 아래 경우는 승전보를 전해 듣자마자 기룡에게 명해 전령을 평양성으로 보내 아차산에 주둔할 군을 요청하였다.
또한, 아차산성에서 전한 위치로 강을 건널 배를 신라군 몰래 준비하였다.
산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며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은 덕에 고구려군의 도하는 무척 수월하였다.
경우가 군을 끌고 배에 올라 먼저 강을 건넌 후, 온달과 막바우가 다시 군을 끌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 곧 평양성에서 주둔군을 보내와 산성에 남았던 기 씨 사 형제도 도하하여 합류하였다.
생각보다 빠른 도하로 토성에 주둔한 신라군의 본진에선 고구려군이 바로 곁에까지 당도했음을 깨닫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 토성은 한수(한강)에 기반을 둔 한성백제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몽촌성이라 하였다.
이 토성의 앞은 시야가 탁 트인 넓은 모래밭과 갈대밭이 우거진 강변이었다.
그 뒤로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토성 뒤로는 한수 이남의 또 다른 요충지 위례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뻗어 있었다.
그곳에는 앞을 가로막는 높은 산이 없고 낮은 구릉만 존재하였다.
위례성으로 향하는 길을 꺾어 돌면 일장산(남한산)과 그 줄기인 명덕산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산성이 자리하였다.
그러나, 전략적 가치가 낮아 그다지 많은 병력을 주둔할 필요성이 없어 주둔한 신라군의 수가 아차산성보다 적은 규모였다.
한편, 몽촌성은 본성과 이보다 작은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성의 외곽 둘레는 방어용 하천인 해자와 성의 방비를 위한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자연 지물을 이용해 축조되었고, 성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는 모두 아홉 개로 바둑판식의 도로가 잘 뻗어 고구려의 국내성과 내부 구조가 비슷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제법 규모가 커 성 내에 주둔군 일만 이상이 충분히 머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이 토성을 점령하는 나라가 한강 하류 이남의 세력을 취할 수 있으며, 위례성까지 이르는 드넓고 비옥한 토지를 얻어 힘을 비축하기 수월하였다.
이토록 전략적 가치가 높은 몽촌성에서는 아차산성에서 각간 김서현이 슬호화와 함께 도망쳐 와, 위례성에 주둔한 장수들을 불러 고구려군을 대적할 회의에 분주하였다.
“아직, 적의 군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도하 전인 듯하옵니다.”
몽촌성의 수비를 맡은 장수 소판 김인문이 이렇듯 각간 김서현에게 고하니, 아찬 박춘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견을 내었다.
“아닐 것입니다. 이미 아단성(아차산성)을 취한 고구려군은 훤히 우리 상황을 파악하여, 재빨리 군선을 취해 우리의 경계가 허술한 곳으로 도하하였을 것입니다.”
박춘수는 아찬의 관등으로 육두품이 최대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나, 몽촌성의 수비를 맡은 성주 김인문의 소판이란 관직보다 한참 낮은 관등이었다.
하지만 그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스러워 제 뜻을 굽히길 무척 싫어하였다.
안타깝게도 육두품은 결코 군을 이끄는 장군이 될 수 없었다.
이를 잘 알기에, 자신은 더 이상 오를 관등조차 없음에, 김서현을 도와 제 꿈을 펼치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천문, 지리에 능통하고 병법을 통달하였으며 한 자루 검을 잘 다루는데, 이 박춘수의 지혜와 슬호화의 무용으로 김서현이 온갖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공을 취해 각간에까지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이번 고구려 침공에서도 박춘수의 지혜와 슬호화의 무용이 돋보여 이곳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도하했을 것이라…….”
김서현이 박춘수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