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전승 장군 (1)
아차산 위에 자리한 아차산성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고, 우물을 파지 않아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런 작은 산성에 신라의 각간 김서현이 머물게 된 계기는 온달과 겨루고자 함도 있으나,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진군하던 중 이곳까지 와서 온달의 출병으로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추게 된 사연도 있었다.
작은 산성인 탓에 주둔군의 수가 적어 사실상 온달과 정면 대결은 불가한 상황으로 한수(한강) 너머 제법 규모가 큰 토성에 주둔한 신라군이 이들의 본진이었다.
각간 김서현이 아차산성에서 고구려군의 발을 묶는 동안, 강 건너 토성의 신라군이 한수(한강)를 도하해 배후를 노림이 김서현의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 온달의 고구려 군이 밀리게 될 경우 신라군의 진격이 평양성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고, 역으로 도하한 신라군마저 물리치고 아차산성을 수복한다면 고구려 군은 쉽게 한수를 도하해, 남으로 향하는 진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양측 모두에게 이 작은 산성은 그 크기와 달리 나름의 가치를 지닌 셈이다.
날이 밝자, 온달은 막바우와 기 씨 사 형제를 대동하고 산에 올랐다.
장창병과 창보병, 부월수, 환도수 등 삼천 명과 궁노병 오백 등 도합 삼천오백 명이 뒤를 따랐다.
경우는 산 아래에 마련한 진영에서 대기하였는데, 이는 언제 신라군이 도하할지 알 수 없어 미리 방비한 것이다.
온달은 공성전이 처음이며 더구나 산성을 공략하는 것은 평지의 성보다 더 고난한 일인지라 무척 근심이 컸다.
온달이 막상 산에 올라 신라군이 차지한 아차산성을 올려다았다.
삼면이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고 한수를 내려다보는 뒤편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는데, 이런 험준한 위치에 돌로 쌓은 성벽마저 높이 솟아 있었다.
성문으로 이어진 길 역시 양옆이 가파른 경사에 그 길 또한 폭이 좁아 겨우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걸을 정도였다.
“이거, 어렵겠는데요. 공격이 쉽지 않겠어요.”
산을 오르기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막바우도 공략할 곳이 보이지 않는 아차산성의 모습에 기가 질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성을 남겨 둔 채 한강을 넘을 수도 없고 난처한 노릇이었다.
본디,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제 주장을 강하게 펴지 않는 온달인지라, 막바우의 이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에 기악이 차분히 온달에게 말하였다.
“장군, 삼한의 성들은 거의 모두가 산성입니다. 이 조그만 아차산성조차 점령하지 못한다면 한수를 넘어 진격한들 우리가 수복할 성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기악의 말에 고작 작은 산성 때문에 고심한 것이 부끄러운 온달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내 경험이 미천해 싸우기도 전에 걱정부터 하였소. 그래, 그대는 방도가 있는 것이오?”
이처럼 온달이 예의를 갖춰 물으니, 기악이 웃으며 답했다.
“계책이랄 것까지는 아니옵고, 이런 산성의 구조를 잘 알고 있사옵니다.”
기악의 이 말에 막바우가 대뜸 끼어들었다.
“알면 빨리 좀 말해 보시오! 나도 산골 출신이나 저런 절벽을 올라 성벽을 넘을 방법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 무엇이오?”
“허허허, 산골 화전민과 산속에 산채를 세운 산적과는 다르지요.”
기악이 이렇듯 답하니, 막바우가 그제야 깨닫고 크게 웃었다.
“아하! 맞다! 산적 괴수였지? 하하하.”
막바우의 이 말에 기악은 불쾌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산적이었지요. 산적이 산에 산채를 세우는 것과 군이 산에 산성을 쌓는 방법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네.”
“산채는 노출되지 않게 짓고 산 아래를 살필 수 있어야 하며 남몰래 퇴로도 만들어야 하고, 산 속에 살기에 물자 보급이 원활해야 하지요.”
“그럼 산성도 같은 이치오?”
막바우가 다시 물으니, 기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산성은 산 위에 오르면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지요. 그러나 다른 부분은 거의 비슷합니다. 장군, 산에서 가장 필요한 물자가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온달에게 물었으나, 이번에도 막바우가 답하였다.
“밥 아니오? 밥! 식량!”
“하하하, 아닙니다. 특히나 이 정도로 작은 산성의 경우는 주둔 인원 자체가 적어 사냥과 채집으로 자체 식량 조달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요.”
“그럼 무엇이오? 밥이 아니면 무엇이 더 필요하지?”
막바우가 도통 답을 내지 못하니, 지켜보던 기범이 답답해 소리쳤다.
“아! 그것도 모르오? 산꼭대기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이지! 물! 우물 파서 물이 나오면 좋지만, 그건 중턱에 세워진 산성의 경우고 꼭대기는 땅을 파도 물이 잘 안 나온단 말이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 물이 산성 공략과 뭐가 관련 있단 말이오?”
알 듯 모를 듯하니 답답한 막바우였다.
기악이 막바우를 진정시키며 차분히 설명하였다.
“저 산성은 우리 고구려가 세운 산성으로 앞에 보이는 길 말고도 따로 길을 마련해 두었을 것이나, 신라군이 점령하며 길을 부수고 땅을 허물어 절벽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음…….”
“그러나 물은 반드시 필요해 조달할 길을 따로 마련했을 것인데, 아마도 저 산성의 뒤편이 절벽이고 그 아래가 한수(한강)이니, 절벽 사이로 신라군이 비밀리에 길을 만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 길을 찾아 별동대를 산성 안으로 들여보내 성문을 열면 됩니다.”
망우산에서도 기범이 기룡과 기훈을 옆구리에 끼고 목책 사이에 난 작은 문으로 도주했었고, 팽무일은 절벽을 날듯 기어올라 도망쳤다.
어쨌든 망우산 산채에도 비밀리 만든 샛길은 있었던 셈이었다.
“오호라! 그거 좋겠소!”
막바우가 기악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하여 맞장구쳤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절벽 사이에 난 샛길을 찾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성 내로 들어간 후 성문을 여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 샛길은 누가 찾고 성 내에 들어가 경비병은 누가 제압해 성문을 연다는 말이오? 많은 수가 몰려다니면 적이 눈치 챌 것인데.”
막바우의 이 물음에 기악이 답을 쉽게 내지 못하자, 온달이 막바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막바우, 좋은 지적이네. 많은 수가 움직일 수 없으니, 나와 자네 둘이서 해봄세.”
온달과 막바우 두 사내 모두 산골 출신에 신력이 뛰어나고 무예 또한 출중해 성 내에 몰래 잠입만 한다면 성문을 지키는 군사 몇 제압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어찌 올라가냐가 문제였다.
“장군님, 제가 비록 산골 출신이나 절벽을 기어오를 재주는 없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막바우의 이 물음에 온달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허허허, 나도 절벽 오를 재주는 없네. 일단 산을 뒤로 돌아 한수를 등지고 샛길부터 찾아보면 어떻겠나?”
온달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냥 안 된다 할 수 없는 막바우였다.
“그럼 장군님 일단 샛길만 살펴보는 겁니다.”
* * *
일단 군을 돌려 산 아래로 다시 내려오니, 경우가 정찰병이 전한 보고를 온달에게 들려주었다.
“강 건너에 작은 나룻배 오십여 척과 제법 큰 군선 열 척이 준비된 듯합니다. 곧 신라군이 한수를 넘으리라 예상되오니 대비해야겠습니다.”
경우의 이 말에 기훈이 재빨리 계산하고는 안심한 듯 말하였다.
“아직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가?”
기훈의 이 말에 경우가 물으니, 기훈이 손가락을 꼽으며 답하였다.
“배의 수가 부족합니다. 섣불리 작은 수를 여러 번 나르다간 우리의 정찰에 걸려 각개격파 될 터이니, 필경 우리를 대적할 수만큼의 대군을 실어 나를 배가 모일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기엔 적어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나룻배와 군선이 필요하지요.”
기훈의 설명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며칠 여유가 있겠군. 경우와 기룡은 배의 수를 항상 확인하기 바라오. 나는 막바우와 샛길을 찾아 산성에 오르겠소. 기악, 그대는 군을 이끌고 산성 아래에서 대기하여 주기 바라오.”
온달이 이처럼 간략히 작전을 설명하고는 절벽을 오르기에 무거운 운철 대검과 철궁을 경우에게 맡기고 등에 짧은 검 열두 자루를 매었다.
막바우도 장창 대신 단창을 등에 메고 온달의 뒤를 따라 산 뒤편으로 향하였다.
갑작스레 뭔가를 떠올린 기악이 떠나는 온달의 뒤를 쫓더니 숨을 헐떡이며 말하였다.
“장군, 저 아차산성은 망우산에 제가 세운 산채와 비교 시 조금 작은 편입니다. 그러하다면 주둔한 적의 수는 결코 사백을 넘지 못할 것이니, 부디 참고하여 주십시오.”
“사백? 사백! 사백이면 몇 안 되는데 그냥 공격해 밀어붙이시죠?”
절벽 오를 생각에 겁이 난 막바우가 괜한 소리를 하니, 온달이 웃으며 막바우의 등을 두드렸다.
“허허, 괜한 소리. 병력으로 밀어붙이면 공략이야 하겠지만, 사백을 상대로 일천 이상, 아니 사천 이상의 피해를 입을 수 있네.”
“…….”
“더구나 저 성에 신라의 각간 김서현이 있다는 소리는 우리 몰래 퇴로를 숨기고 있다는 뜻도 되네. 기악, 좋은 정보 고맙네. 성 내에 잠입하면 참고하겠네.”
온달이 이렇듯 말하며 막바우의 손을 끌고 산 뒤로 향하니, 기악도 형제들과 함께 군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
* * *
온달과 막바우가 산을 돌아가니 바로 푸른 한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차산성의 신라군들은 이쯤에서 물을 길어 산으로 올랐을 듯했다.
산성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산 중턱을 지나자, 시야에 깎아지른 절벽이 들어오는데, 도통 절벽 사이로 샛길은 보이지 않았다.
“장군님, 안 보이는데요.”
막바우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살펴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분명 있을 것인데, 눈에 띄지 않도록 잘 가린 모양이구나. 허허, 이를 어쩐다.”
온달도 살펴보았으나 샛길로 보일 만한 곳이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
막바우는 온달의 실망한 모습에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어깨도 풀며 말하였다.
“어휴, 별수 없죠. 샛길을 못 찾으면 그냥 절벽을 기어 올라가죠. 어휴, 팔자야. 나 높은 곳 무서운데.”
온달의 낙담한 표정과 고구려군의 피해를 생각해 막바우가 투덜대면서도 성큼성큼 절벽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깎아지른 절벽을 손아귀의 힘으로 움켜쥐고 발로 밀며 기어오르다 보니, 십여 장쯤 올랐다.
그때, 꽤 떨어진 절벽의 바위틈 사이로 줄을 엮은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고 막바우가 사다리를 향해 아슬아슬 절벽을 타며 옆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 순간, 절벽 위에서 사람들의 음성이 들리며 등에 항아리를 맨 군사들이 사다리로 내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막바우는 들키지 않고자 절벽에 바짝 붙어 숨을 죽였고, 미처 인기척을 깨닫지 못한 온달도 막바우의 행동에 숨죽여 절벽에 바짝 몸을 붙였다.
샛길이 노출되지 않은 것은 샛길이 바로 이 줄 사다리로 필요할 때만 내려 물자를 나르는 듯했다.
‘뭐여, 실상 샛길은 없던 거잖아.’
막바우가 이렇듯 생각하며 꽤나 점잔 부리며 샛길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던 기악에게 속으로 욕을 버럭버럭하였다.
한 무리의 신라군이 사다리를 타고 절벽을 내려간 뒤에도 사다리는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러나 막바우는 위를 지키는 군사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맨손으로 돌 틈을 움켜쥐고 절벽을 올랐고, 온달도 막바우의 뒤를 따라 절벽을 올랐다.
그때, 절벽 위가 소란스러워지며 절벽 아래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온달이 밑을 내려다보니, 항아리를 등에 메고 내려간 신라군들이 강 건너를 가리키며 환호하고 있었다.
‘뭐지?’
온달이 불길함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 돌려 강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이미 모인 군선과 나룻배 이외에도 하류에서 군선 이십여 척이 서서히 올라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류에서 군사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구나. 곧 도하할 것이다.’
신라군이 곧 도하할 것이란 판단이 서니,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