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00화 (100/328)

100화 태자 원, 태왕에 오르다.

배찰산 전투 후, 사발략가한의 진노를 두려워한 아파가한은 철륵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금산에 돌아온 사발략가한에 의해 진압되고, 아파가한은 돌궐 정벌에 나선 공손성의 수나라 군에 투항한다.

수나라 군은 고구려와의 전투로 지친 사발략가한의 돌궐군을 크게 격파하고, 사발략가한이 세상을 떠나자, 동돌궐의 가한을 승계한 처라가한(莫何可汗)이 마침내 수에 항복하며 나름의 평화를 만들어 낸다.

우문도웅은 수하 몇을 이끌고 하북에 숨어 지내며 선비족의 나라인 북주를 재건하기 위해 암암리에 인재를 모은다.

개선장군으로 평양성에 입성한 온달은 평원 태왕에게 부마로 인정받고, 대형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를 따랐던 막바우, 경우, 독고선과 해진도 공적을 크게 인정받아 온달의 휘하에 남게 되었다.

막바우와 경우는 모달의 관직을 내려 받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신크마리 해진과 독고선은 관직을 거듭 사양하여 호위총관과 행군총관이란 직함만 내려 받았다.

카사르와 호타크는 태왕에게 직접 고구려와 동등한 동맹 관계로 대접받으며 태왕이 선사한 구름 떼 같은 소와 양 무리를 끌고 기쁘게 북방 초원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평화가 찾아온 고구려에 늙은 태왕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니 모두가 비통에 잠기는데, 총명한 태자 원이 승계 절차에 따라 태왕에 오르며 새로운 고구려의 태왕이 되었다.

이가 바로 수나라의 네 차례 침공을 막아 낼 영양 태왕이다.

담대하고 위엄 있는 평원 태왕의 승하는 삼한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처 젊은 태왕을 업신여긴 신라가 군을 이끌고 죽령 일대를 모두 점령하며 계속 진격해 한수(한강) 하류마저 차지하니 또다시 고구려의 위기가 닥쳐왔다.

현명한 영양 태왕은 영주의 지배권을 바로 수나라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신을 수의 황제 양견에게 보내는 한편 영주에 세력을 둔 거란과 동맹을 맺는다.

고구려의 비밀 기지 적봉진은 우랑에게 맡기고 카사르의 몽고 부족과 호타크의 커레이트 부족에게 미리 후한 선물을 하니, 이 또한 고구려의 힘을 비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서로 죽일 듯 생사를 겨루던 돌궐과도 화친을 맺는 사신을 수나라 몰래 보내 북방을 안정시킨 후, 드디어 신라 정벌로 눈길을 돌렸다.

태왕이 선택한 신라 정벌의 장수는 선대 태왕이 검신이라 기뻐하던 대형 온달이었다.

북방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하여도 쉽게 국제 정세가 변하기에, 대장군 강이식과 서부총과 을지문덕은 요동 안정화에 주력해야 했다.

야심만만한 연태조는 부친 연자유 사망 이후 다시 연 씨 일족이 힘을 지니게 되며, 오부 귀족들의 견제로 군을 통솔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그나마 아직 중앙 오부 귀족들의 견제가 덜한 온달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온달 아우가 애 좀 써야겠네. 고토 수복을 부탁하네.”

태왕이 온달을 따로 불러 대모달의 지위와 함께 위장군에 봉하고, 군을 지휘할 검을 내어주며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 수복을 당부하니, 온달은 이견 없이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평양성 내에 마련한 집에 돌아온 온달이 평강과 휘하 장수 막바우와 독고선, 해진과 경우를 불러 상의를 시작하였다.

“군을 이끌고 출병하기 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온달이 무겁게 입을 여니, 평강이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장군께서 전장의 상황 때문에 근심스러운 것은 아니실 듯하옵고, 혹여 금강대도 때문이십니까?”

평강이 정확히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니, 온달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소. 공주, 나는 본디 내 것 아닌 물건을 지녀 본 적 없고 탐해 본 일 없으나, 이 금강대도가 두 해나 내게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오. 더구나 전장으로 나서는 처지라 더욱 마음에 걸리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온달의 이 물음에 성미 급한 막바우가 번쩍 손을 들고 나섰다.

“우리 장군님께서 고작 칼 한 자루에 시름이 깊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칼 들고 후딱 탁현에 가서 팽가장 장주 팽무성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되도 않는 소리! 당신은 중국인 말도 못 하지 않소? 이 일은 독고선님께서 맡으셔야 합니다.”

경우가 냉정히 딱 잘라 말하는데, 독고선이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아 말하였다.

“사실, 저와 제 누이는 수나라 황실에서 수배하는 처지로 탁현까지 가는 길은 경계가 삼엄해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 듯하옵니다.”

독고선이 난색을 표하자, 막바우가 또다시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말하는데, 이때 문밖에서 온동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다.

“송구하옵지만, 지가 한 말씀 올리겠구먼유.”

“온동이구나. 들어오거라.”

평강이 귀밝은 온동이 의도치 않게 대화를 들었구나 생각하며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아홉 살이 된 온동은 아직도 아랫녘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애써 고치려 하지 않는 듯하여 온달과 평강도 따로 말하지 않았다.

“지가 하북과 산동 사투리에 능하구먼유, 독고선님과 영이가 탁현에 갈 때, 지도 따라 함께 가족으로 위장혀 탁현으로 향하면 두 사람을 찾는 이들이 세 사람으로 늘어난 일행은 덜 의심하지 않을까 생각드는구먼유.”

크게 타당한 의견은 아니었으나, 평강은 영리한 온동이 독고선 오누이를 돕는다면 안심할 만하다 생각하여 온달을 바라보니, 조용히 듣던 해진도 의견을 내었다.

“그 일행에 나처럼 비쩍 마른 노인도 끼면 더 의심받지 않을 듯합니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해진마저 함께한다는 말에 그제야 독고선의 안색이 펴지며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 절차로 해진과 독고선 오누이, 온동이 금강대도를 지니고 하북 탁현의 팽가장으로 향했다.

온달은 막바우와 경우를 부장으로 삼고 기병 삼천 기에 장창병과 창보병, 부월수, 환도수 등 육천 명과 궁노병 일천 등 도합 일만 정병을 이끌고 평양성에서 출병하였다.

막바우와 경우는 말객으로 또다시 지위를 높여 이젠 각기 모달과 당주들을 이끄는 어엿한 장수가 되었다.

경우가 선봉으로 기병 일천을 이끌고, 막바우가 중군에서 온달을 도와 기병 이천과 창병을 이끌었다.

기 씨 사 형제도 함께해 기악이 부월수의 수장을 맡고, 둘째 기범이 환도수를, 사 형제 중 막내 기훈이 궁노병을 맡았으며 끝으로 지혜가 모자라나 인내심 강한 셋째 기룡이 보급과 전령을 담당하였다.

* * *

한수(한강)를 넘기 전 첫 번째 관문은 아차산이었다.

이 산의 정상에는 돌로 쌓은 규모가 아주 작은 산성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한강을 등지고 산 위에 세운 이 산성은 본래 고구려가 세운 것이었으나, 신라가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급습해 점령한 상태로 아직도 산 아래까지 치열한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참 깊이도 쳐들어왔다.”

막바우가 아차산성까지 점령한 신라군을 생각하며 혀를 차니, 경우도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러게나 말이오. 이놈들을 모두 아차산성에서 밀어붙여 저 강물에 수장시켜야겠소.”

막바우와 경우가 전의를 불태우는 동안, 온달은 낮지만 산세가 험하고 나무가 울창한 아차산을 올려다보며, 저 위 산성에서도 자신들을 주시하리라 생각하였다.

‘과연 천혜의 요새다. 어디부터 공략해야 할 것인가?’

지혜로운 평강과 병법에 능한 독고선, 노련한 해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 것이다.

아차산 아래에 진을 치고 막사에 막바우와 경우를 불러 논하는데, 딱히 좋은 수가 나오지 않아 모두가 기가 한풀 꺾인 채로 밤을 맞이했다.

* * *

온달이 고심에 잠겼을 무렵, 아차산성을 장악한 이는 각간(角干, 신라의 최고위급 관직) 김서현(金舒玄)이었다.

그의 부친은 각간 김무력(金武力)이고, 조부는 금관가야의 구충대왕(仇衝大王)이며 증조부는 겸지대왕(鉗知大王)이었다.

증조부 겸지대왕 때부터 신라 귀족과 혼인으로 맺어졌으며 각간 김서현의 부인은 신라의 정통 왕족으로 만명(萬明)부인이라 불리었다.

이 만명 부인은 진평왕의 모후인 만호태후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私通)해 낳은 딸로 김서현과 만명은 한눈에 반해 몰래 사귀었는데, 숙흘종과 만호태후가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하자 함께 도망가 살다가 아들을 낳고서야 둘의 혼인이 인정받게 되었다.

족보가 묘하지만, 어쨌든 진평왕의 동생을 부인으로 맞은 김서현이 각간에 오른 것은 이후 일 년 뒤로, 그가 군을 이끌고 아차산성을 점령하기 이 년 전 일이었다.

각간이란 높은 직책에도 금관가야 출신이 부인을 잘 얻어 출세한 것이란 주위 시샘에, 공을 세워 능력을 인정받고자 출병한 것이니, 어찌 보면 온달과 일견 비슷한 팔자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김서현 역시 잘 알고 있기에, 각간의 신분으로 이 조그만 산성에 머문 속내엔 반드시 온달을 물리쳐 자신이 온달보다 우월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의도가 다분하였다.

한편 김서현이 만명 부인과 가진 아들은 훗날 삼한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장수 중 하나가 되는데, 이가 바로 신라의 대장군이며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이다.

만명 부인과 도망가 숨어 지내던 시절, 김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熒惑), 화성(火星)과 진성(鎭星), 토성(土星)의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게 된다.

만명 부인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동자(童子)가 금갑(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당중(堂中)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임신해, 이십 개월 만에 유신(庾信)을 낳으며, 둘의 혼인마저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힘겹게 태어난 아들 김유신 덕에 김서현의 인생도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으니, 과연 김유신은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온달, 온달, 온달이 왔단 말인가?”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김서현의 중얼거림에 눈치 없는 수하 장수가 답하였다.

“장군 그러하옵니다.”

“그래, 좋아! 온달이 북주와 돌궐 연합군을 요서 배찰산에서 무찌르며 고구려왕에게 검신이라 칭송을 들었다지? 좋아. 아주 좋아! 이곳 아차산에서 내가 온달을 물리치고 천하의 칭송을 받겠노라.”

이 김서현의 다짐에도 굳이 답할 필요 없으나, 수하 장수가 또다시 끼어들며 말하였다.

“장군, 아무렴 말입니다.”

필경 아부에 이골이 난 인물로 보일 수 있는 이 장수는 슬호화라는 이름의 거한으로 두 자루 도끼를 잘 다르며 말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튼튼한 두 다리를 지닌 인물이었다.

“슬호화, 그대는 온달과 맞서 이길 수 있는가?”

김서현의 물음에 슬호화가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도끼는 두 자루고 온달은 검 한 자루인데, 어찌 겨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묘한 논리로 답하는 슬호화를 김서현이 흡족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내 자네만 믿음세. 좋아, 아주 좋아!”

온달은 산 위에서 자신을 두고 이런 이야기가 오고감을 생각할 리 없이 답답한 마음에 막사를 나와 아차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산 위에 둥근 달이 걸려 그 언젠가 겨울곰을 잡기 위해 산에 올라 막바우, 양만춘, 경우와 함께 피에 굶주린 이리 떼와 벌인 혈전을 떠올렸다.

“이 거리, 그때처럼 달빛을 가르며 저곳까지 닿을 수 있을까?”

당시의 이리 떼 우두머리가 서 있던 바위보다 산성의 위치가 멀어, 걸어서 천 보는 물론이요, 삼천 보도 넘을 거리였다.

온달은 철궁에 효시를 먹여 흉곽에 바람을 잔뜩 넣고 부풀린 후, 파산귀검의 호흡법을 되새기며 철궁이 부러질 듯 당기다 놓으니, 긴 매의 울음이 밤공기를 찢으며 쉬지 않고 날아 아차산성 깃대에 박혔다.

김서현과 수하 장수들이 놀라 부리나케 뛰어나오니, 장군기가 흔들리다가 마침내 부러지며 산 정상을 맴돌던 바람에 깃발이 날려 검푸른 한강으로 떨어지니, 모두가 놀라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때 산 아래 온달이 정상을 향해 숨을 내뱉으며 외쳤다.

“고구려의 장수 온달이 왔다! 누가 대적할 것인가!”

온달의 이 외침에 자신만만했던 슬호화는 감히 소리 내어 맞설 엄두조차 못 내었다.

“오늘 없으면, 내일 일전을 벌이자! 밤새 짐 싸서 도망치지 말아라!”

온달의 이 도발에 김서현이 분해 소리쳐 보았으나, 산성 안에만 맴돌 뿐 온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김서현도 자신의 목청이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더욱 부아가 치밀어 씩씩거리며 산 밑만 노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달의 이 외침에 고구려군 모두가 환호를 지르니, 막사에 있던 막바우와 경우도 나와 산 정상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힘껏 욕지거리를 한바탕 퍼붓다가 웃어 제겼다.

이미 기세에선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