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배찰산의 영웅, 온달
기 씨 사 형제가 올루스를 호위해 배찰산 아래에 도착하니, 곧바로 게르가 세워지며 작전 회의가 열렸다.
“적은 아직도 팔만이 넘는 대군으로 패주하던 부대가 계속하여 모이고 있습니다. 또한 갈석산과 유림관 방향으로 일부가 이동하였는데, 이는 필경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약탈 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찰을 다녀온 쇼락이 먼저 입을 여니,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돌궐 기병의 특성상 산지사방에 흩어져 패주하면서도 목적지가 정해지면 시일을 두고서라도 모이기에, 지체할 시 적들이 군을 재정비할 것은 당연했다.
“배찰산에 근거를 마련하고 주변 마을과 성을 약탈해 군량을 조달한다면 이는 고구려의 화가 될 것이며 저들이 기운을 되찾고 철륵으로 물러난다 하여도 재침공할 것이니, 이곳에서 승부를 겨루어야겠습니다.”
“…….”
“다행스럽게도 아직 연기가 크게 피어오르지 않은 것으로 짐작건대 말을 잡아 배를 채우기 전인 듯하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온달이 평소와 달리 길게 말하며 배찰산에서 승부를 보자 말하니, 카사르와 호타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을 달리며 활을 당기는 초원에서의 기마 전투만 익숙한 그들에게 비록 높지는 않으나 산 중턱에서 벌이는 근접 전투는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목숨을 내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총명한 평강이 이를 헤아려 지도를 펼치고는 차분히 안을 내어 말하였다.
“이 순간에도 적은 계속 그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당장은 지치고 굶주려 우리가 급습하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생각하오나, 모두가 산을 오를 필요 없다 사료되옵니다.”
“…….”
“카사르 족장님과 호타크 족장님은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 유림관 근방을 지키며 압박하신다면,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된 적도 더는 지체하지 못하고 산을 내려와 일전을 벌일 것입니다.”
카사르와 호타크의 전사를 배제하고 배찰산에서 일전을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아니, 고작 이천오백여 기로 팔만이 넘는 적을 상대하자 말인가?”
건무가 놀라 되물으니, 평강이 웃으며 답하였다.
“적들은 유림관에서 압박이 시작되면 필경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는 하루 뒤엔 팔만이 아니라 좀 더 더해져 십만에 육박할 것이며, 며칠 뒤엔 십오만에 달할 것입니다.”
“음…….”
“또한 굶주린 배도 말을 잡아 채울 여력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저들을 산에서 끌어내지 못하면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옵니다.”
평강은 말을 이어 갔다.
“다행스럽게도 태왕께서 삼만 기병을 이끌고 오시는 중이라는 정찰병들의 보고가 있은 바, 예상하건대 적들이 산을 내려와 우리와 일전을 벌일 때쯤, 이 배찰산 아래에 당도하시리라 믿사옵니다.”
평강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어 건무가 고심하니, 막바우가 쇠 징 치는 소리로 불쑥 껴들었다.
“며칠 굶어 곧 뒈질 놈들이 몇 만이든 뭐가 두렵습니까. 저들이 배를 채우기 전에 당장 산에 올라 때려잡아야 합니다. 제가 산에 올라 우두머리의 모가지를 잡아끌고 내려오겠습니다.”
막바우가 이토록 버릇없이 떠드는데도 웬일인지 경우가 핀잔주지 않고 거들었다.
“이 무식한 막바우의 말이 옳습니다. 놈들이 배를 채우면 다시 힘을 낼 것이고, 여기서 목책을 세우고 버티면 우리가 군사를 늘려 공격한다 해도 피해가 커질 것입니다.”
배찰산은 산이 높지 않은 대신 넓게 퍼져 여러 갈래의 길과 연결되었고, 산세가 험하지 않았다.
반면 계곡의 물이 풍부하여 부족하더라도 허기를 채울 식량은 산에서 수급하고 약탈로 조달하면 대군이 버티기에 어렵지 않았다.
건무도 마침내 마음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엄히 명하였다.
“모두의 의견을 따르겠소. 전쟁이란 시기와 장소가 중요한 법! 카사르 족장과 호타크 족장이 이동하면 즉시 공격을 시작합시다.”
* * *
카사르와 호타크가 부족 전사들을 이끌고 유림관 방면으로 떠나자, 남겨진 올루스의 수레로 방벽을 세워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건무가 우랑과 함께 올루스를 지키기로 하였다.
기 씨 사 형제도 카사르의 부족민들과 힘을 합쳐 단단히 대비한 가운데.
온달이 개마무사 일천여 기와 기병 일천오백여 기를 이끌고 올루스 앞에 서니, 독고선과 막바우, 해진, 경우가 나란히 그 옆에 서서 온달을 보필하였다.
아직 북주와 돌궐 연합군은 계곡물에 갈증만 해소한 상태로 무척 굶주려 곤궁한 상황이었다.
일대 결전은 해질녘, 온달의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우문도웅! 이를 꽉 깨물고 내려오너라!”
온달의 이 외침에 고구려 군이 함성을 지르는데, 대부분 욕설과 험한 상황을 알리는 외침들이었다.
“사발략인지 삽살개인지도 내려오너라!”
“철륵의 보급부대는 우리가 이미 우걱우걱 잘 자셨느니라!”
이 외침에 사발략가한이 크게 노하여 당장 군을 이끌고 내려가려 하니, 이계찰이 만류하였다.
“적의 술책이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탐한가한도 보급부대가 자신과 함께 출발했음을 말하며 만류하였다.
“이제 곧 보급부대가 유림관 근방을 지날 것입니다. 지금은 기다릴 때입니다.”
이때 정찰 나간 군사가 돌아와 아뢰는데, 그 내용이 절망스러워 사발략가한을 더욱 흥분시켰다.
“적의 기병이 유림관 인근에 넓게 퍼져 약탈 나간 군사들조차 돌아오기 어렵사옵니다.”
격분한 사발략가한을 향해 목청 좋은 막바우가 소 떼 일천이백여 마리를 끌고 산 아래로 나오며 외쳤다.
“배고프지 않으냐? 여기 너희 철륵에서 식량을 싣고 오던 소 떼 천이백 마리가 있느니라! 올려 보낼 터이니, 배불리 먹거라!”
이 빈정거림에 탐한가한도 그제야 보급부대가 오지 않음을 깨닫고 얼굴이 벌게졌으며, 사발략가한의 분노가 드디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였다.
“이 천하의 무엄한 놈들이! 감히! 저놈들의 주둥아리를 당장 찢어 놓거라!”
사발략가한의 명에 팔만의 돌궐군이 일시에 산 아래로 내달리는데, 말에 오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말이 먼저 지쳐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음이 분명했고, 북주와 돌궐 연합군은 이 말들을 잡아 배를 채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팔만의 대군이 일시에 산을 뛰어 내려오는데도 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조금도 기세가 담기지 않았다.
이때 온달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카사르의 부족 노인들과 여인들이 올루스에서 뛰어나와 잽싸게 소꼬리에 매단 짚단에 불을 붙이고는 후다닥 올루스로 돌아갔다.
이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사발략가한의 귀에 불타는 짚단을 꼬리에 매달고 놀라 질주하며 산을 오르는 소 떼들의 울부짖음이 귀청을 찢듯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소 떼를 앞세운 온달이 말 달리자, 이천오백여 기의 고구려 기병들도 완만한 산의 경사를 말 달려 오르며 화살을 날렸다.
눈치 빠른 유역비는 이 순간 전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우문도웅에게 속삭였다.
“주군 여기서 더 머무시면 안 되시옵니다. 서둘러 산을 돌아 갈석산으로 빠져 몸을 숨겨야 후일의 대업을 기약할 수 있사옵니다.”
우문도웅도 눈치가 여간 아닌 인물이라 사발략가한이 길길이 날뛰는 동안, 이미 생각을 정리하였기에, 휘하 장수 백여 기만 이끌고 슬그머니 몸을 뺐다.
우문도웅이 몸을 피한 줄도 모르는 공손향은 야수와 함께 맹렬히 질주해 오는 소 떼들을 막기 위해 분주했고, 이계찰은 소 떼를 피해 군을 뒤로 물리며 이후 덮쳐 올 고구려 군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법.
곧 몰아치는 소 떼의 발굽에 밟혀 널브러지는 돌궐군의 비명이 배찰산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뒤이어 고구려군의 맹공에 쓰러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온달은 누렁이에 올라 힘차게 질주해 적진 깊숙이 들어온 후, 누렁이의 등에서 뛰어내려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운철 대검을 내리쳤다.
순간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파산귀검의 초식들이 자연스레 펼쳐지며 운철 대검이 스쳐 지난 땅과 바위가 깊게 패이며 흙과 돌조각을 솟아올랐고, 검기에 잘린 나무들이 쓰러지며 돌궐군을 덮쳤다.
산을 가르는 파산귀검이 산에서 펼쳐지니, 그 누가 보아도 실로 산을 가르는 검법이라 부를 만했다.
온달의 이 무위에 팔만의 돌궐군도 기가 질려 도망치기 바빴고, 이제부터 고구려군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전투가 시작되었는가?”
산 아래에는 어느새 태왕이 이끈 기병 삼만이 도착해 건무와 평강이 맞이하는데, 태왕의 이 물음에 연태조가 대신 나서며 답하였다.
“그러한 듯하옵니다. 속히 증원군을 올려 보내겠나이다.”
태왕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니, 기병 삼만이 일시에 산을 올랐다.
태왕이 산 중턱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응시하는데,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나무가 베어 쓰러지고 돌과 흙이 날리는 등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이더냐?”
태왕의 이 물음에 이 왕자 건무가 공손히 답하였다.
“온달이 신묘한 검술을 펼쳐 땅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며 나무마저 날리고 있사옵니다.”
“뭐라? 땅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며 나무를 베어 날린다? 세상에 그런 검법이 있더냐?”
태왕이 놀라 되묻자, 평강이 오랜만에 뵙는 늙은 아비 앞에 엎드려 아뢰었다.
“온달께옵서, 조의선인의 신크마리에게만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파산귀검이란 신묘한 검법을 해진님께 전수 받아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익히시었나이다.”
아직 어리고 고운 딸의 반가운 모습에 태왕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으나, 이내 곧 표정을 엄히 굳히며 대장군 강이식에게 물었다.
“그대가 요하에서 북주와 돌궐 놈들에게 검귀란 칭호를 빼앗았다지? 대장군이 보기에 온달의 무예가 어떠한가?”
태왕의 이 물음은 당연스레 고구려 최강의 무력 강이식과 온달의 무예를 비교한 것인데, 강이식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호쾌히 아뢰었다.
“지난해엔 제가 위였고, 올해는 온달이 윗선입니다.”
“뭐라? 겸손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태왕이 크게 기뻐 매우 흡족하면서도 결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강이식이 손을 들어 커다란 나무가 날리고, 흙과 돌이 솟구치는 산 중턱을 가리키며 아뢰었다.
“소장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바위를 부수고 땅을 가르며 나무를 베어 날릴 재주는 없나이다. 온달이 운철 대검이란 명검에 파산귀검이란 절정의 무예마저 익히고 거기에 타고난 신력이 더해지니, 앞으로 그와 대적해 십 합을 버틸 이는 없을 듯하옵니다.”
강이식의 이 말속엔 자신도 온달과 십 합 이상 겨루지 못할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어 듣는 모든 이를 경악케 하였다.
“강이식 대장군이 검귀란 별호를 얻었으니, 온달은 그에 맞게 검신이란 별호가 마땅하온 줄 아뢰옵니다.”
을지문덕이 재치 있게 분위기를 띄우니, 태왕이 크게 기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검신과 검귀라… 하하하. 좋구나. 좋아!”
전장에서 간만에 듣는 태왕의 웃음소리에 모두가 따라 웃을 때 을지문덕이 강이식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대장군은 산에 올라 무용을 펼치지 않는 게요?”
“난 무릎이 아파 등산은 영 질색이오. 하하하. 더구나, 전장에서 영웅은 하나면 족하지 않소.”
강이식의 말처럼 이날의 온달은 가히 배찰산의 영웅이었다.
적들은 온달이 내달려오면 피해 도망치기 급급했고, 심지어 야수와 공손향도 온달과 검을 겨를 생각조차 품지도 못한 채 먼저 내빼, 그와 대적할 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평소 조심성 많던 이계찰이 사발략가한의 퇴로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온달의 앞을 막아 섰다.
하지만 온달이 파산귀검을 펼치지 않고 운철 대검을 비검술로 날리니, 머리와 늑골이 동시에 터지며 즉사하였다.
운철 대검이 없는 온달을 만만히 보고 돌궐의 천부장, 백부장들이 수하를 끌고 일시에 덤볐으나, 온달이 땅에 널브러진 창과 검, 도와 화살, 도끼 등을 닥치는 대로 쥐여 비검술로 날리니, 삽시간에 그의 주위에는 시체만 널렸다.
이는 바로 후대에 무쌍비검술로 불리며,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검으로 다시 펼쳐내게 된다.
드디어 삼만 기병이 충원된 고구려군은 배찰산을 샅샅이 뒤지며 패잔병들을 쫓았고, 그 속에 이계찰의 희생으로 목숨만 건진 사발략가한도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