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영주 공방전 (4)
밤이 깊어졌다.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모닥불을 지피고 마유주를 마시며 춤추고 놀았는데,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고보녕과 윤여주의 마음은 황당하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저것들 지금 뭐하는 거요? 당장 나가 급습해야 하는 거 아니오?”
고보녕의 물음에 윤여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수일 겁니다. 고정하십시오.”
상식적으로 전장에서 술판을 벌임은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여 적을 끌어들이는 수가 분명했다.
허나, 이 경우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실제로 즐거워 진심으로 술과 춤판을 벌인 것이었다.
만일 이를 우습게 여기고 공격해 온다면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기가 막힐 정도로 신묘한 마상 재주를 보게 될 터이니, 어찌 되었든 윤여주의 판단이 옳은 셈이다.
이 와중에도 포차들은 여전히 불붙은 나무를 쏘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검은 소 떼가 거대한 투석기 십여 개를 끌고 왔다.
그런데 그 크기가 본 적 없을 정도로 거대하며 긴 줄이 수십 가닥 달려 있었다.
이 투석기는 줄을 사람이 일시에 당겨 돌을 날리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 역시도 사람이 많이 달라붙어 줄을 당길수록 사정거리가 늘어나는 구조였다.
“뭐가 저리 거대하단 말이오?”
고보녕의 물음에 윤여주도 답하지 못하는데,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투석기에 돌 대신 들판에 널브러진 말과 사람의 시신들을 수습해 불을 붙이고는 그대로 날렸다.
이제는 시신들마저 불이 붙어 밤하늘을 환히 밝히며 날아드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이런! 아니 이런 천하의 짐승만도 못한!”
적의 시신이라도 이처럼 활용하는 경우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고보녕인지라 분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렇다고 달리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날이 밝아 전서구만 날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날이 밝았다.
허나 여전히 포차는 불을 쏘아 날렸고 멈출 기미는 전혀 없었다.
전서구에 원군을 요청하는 간절한 서찰을 매달고 날리니, 카사르의 전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려 떨구고는 모닥불로 달려가 맛있게 구워 먹으니, 이 또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니, 이런!”
고보녕이 허탈해 외치자, 그나마 침착한 윤여주가 포위가 덜 심한 성 뒤로 가 다시 전서구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키우는 사냥용 검수리가 날아와 덥석 낚아채니 이 또한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정녕… 이대로 무너지는가?”
윤여주의 허망한 중얼거림이 공허하게 새벽 공기 속에 이슬처럼 부서졌다.
* * *
한편 탐한가한이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와 다시 고구려 군을 압도할 전력을 갖추었으나, 사발략가한과 우문도웅에겐 고심 또한 컸다.
바로 식량의 부족이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었다.
패주하면서도 간신히 챙긴 식량은 사나흘 버틸 양은 되었으나, 탐한가한의 대군이 합류하니 하루치도 안 된 것이다.
“철륵에서 보급은 어찌 되었는가?”
사발략가한의 물음에 탐한가한이 공손히 답하였다.
“떠나올 때 함께 출발하였고, 소인이 군을 이끌고 앞서 오며 항시 경계를 했기에, 오일 내로 요하를 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말에 사발략가한이 우문도웅을 바라보며 의견을 구했다.
“우리가 철륵에서 보급이 올 때까지 버티려면 고구려 땅을 뒤져 식량을 충당하기보다 아무래도 영주에서 보급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적이 비록 청야전술을 펼치지 않아 약탈할 곳이 보여도 지금 군을 섣불리 움직일 시 적의 대응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전서구를 날려 속히 보급을 보내라 하겠습니다.”
이에 눈치 빠른 유역비가 보급을 명하는 서찰을 작성해 전서구에 매달아 날렸다.
허나 이 전서구 역시 영주성 인근에서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날린 화살에 떨어져 비둘기구이가 되었다.
“새를 날린 지 반나절이 지나도 어찌 회신이 없는가? 누가 새를 잡아먹기라도 한 것인가?”
사발략가한이 답답해하니, 공손향이 나서며 안심시켰다.
“고보녕은 가한을 배신할 위인이 못 되옵니다. 일처리가 왜 더딘지 제가 직접 영주를 다녀오겠나이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공손향이 직접 다녀오겠다는 말에 사발략가한이 크게 기뻐 말하였다.
“아름다운 공녀가 직접 행차할 것까진 없소.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하오. 수하 중 날랜 이를 보내어 재촉하시구려.”
이에 공손향이 수하 장수를 불러 영주로 가 보급을 재촉하라 명하니, 수하 장수는 군사 오백을 이끌고 내달렸다.
하지만 이들 역시 요하 너머까지 정찰 나온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멀리서 탐지하여 요하를 넘자마자 군을 이끌고 온 건무와 카사르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영주로 사람을 보내고 하룻밤이 지나도 날아오는 전서구가 없으니, 사발략가한의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군을 돌려 영주로 가야겠소!”
덜컥 사발략가한이 회군을 언급하자, 우문도웅이 놀라 만류하였다.
“지금 군을 돌리면 요하를 넘을 때 진영이 흐트러질 것이고 그때 고구려군이 급습해 온다면 우리의 피해가 막심할 것입니다. 지금은 기다릴 때입니다.”
“허나, 언재까지 회신을 기다릴 수 없지 않소. 영주와 이곳은 코앞인데 어찌 이리 회신조차 늦는단 말이오? 전서구가 벌써 오가도 수차례일 것 아니오. 보급을 한다 안 한다 뭔 말이 있어야 하지 않소.”
사발략가한의 말도 일리가 있어 우문도웅도 계속 만류하기 어려워했다.
그때, 돌지린이 나서며 의견을 내었다.
“소장 돌지린 군을 이끌고 영주로 가, 저 무능한 고보녕을 무릎 꿇리고 당장 식량을 수레에 싣고 오겠나이다.”
이 의견에는 우문도웅도 더는 이견을 달지 않으니, 곧바로 사발략가한이 명을 내렸다.
“돌지린은 이만 기병을 끌고 영주로 가서 속히 보급을 재촉하거라!”
명을 받은 돌지린은 그나마 든든히 배를 채운 이만 기병을 이끌고 요하로 향했고, 이 역시도 건무와 카사르에게 전해졌다.
* * *
“이만 기병이면 그 수가 상당하고 모두를 죽일 수도 없으니, 결국 놈들의 대군과 일전을 벌여야 하겠구나.”
이만 기병이 요하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건무가 이렇듯 말하니, 평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하, 돌궐 기병 이만 기면 그 수가 상당하니, 일단 올루스를 뒤로 물린 후, 놈들이 식량을 수레에 싣고 떠날 때 군사를 이끌고 뒤를 치시지요.”
“네 말이 옳다.”
우랑이 이렇듯 말하니, 건무가 동의하며 명을 내리려 할 때, 카사르가 다른 안을 내었다.
“올루스를 염려해 물리려 함은 고마운 일이나, 우리의 올루스는 나름 방비가 단단하니, 굳이 물릴 필요 없이 이곳에서 저들을 물리칩시다. 저들이 기병 이만이면 우리는 기병 일만오천입니다.”
전투를 겪으며 자신감이 붙은 카사르가 이처럼 말하니, 기 씨 사 형제의 막내 기훈이 조심스레 안을 내었다.
“하오면 이리하심은 어떠시온지요? 우리의 기병이 일시에 요하로 향하면 영주에선 반드시 원군이 왔다 생각하여 군을 끌고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
“올루스를 저희 사 형제가 카사르 부족장의 백성들과 막는 동안, 건무 저하께서 일만 기를 끌고 요하를 넘는 적의 선두를 급습하고, 카사르 부족장께서 오천 기를 돌려 올루스를 공격하는 영주 놈들의 배후를 치십시오. 그리한다면 승리를 손쉽게 취하리라 생각하옵니다.”
“그 제안이 옳습니다. 기훈의 안을 취하시옵소서.”
평강도 기훈의 안을 적극 동조해 오라버니 건무에게 건의하니, 건무와 카사르가 이를 받아들였다.
한편, 돌궐과 북주 연합군의 진영에서는 의심 많고 조심성 깊은 이계찰이 홀로 사발략가한을 찾아 조용히 아뢰었다.
“가한, 만일 영주가 배신했을 시 이만 기병으로는 성벽이 높아 신속히 제압하지 못하옵니다. 소장이 따로 군을 이끌고 출발해 살피겠나이다.”
이계찰의 이 말 또한 사발략가한이 듣고 보니 옳은 말인지라,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염려하여 요하까지만 가서 살피라 명하였다.
“항상 신중한 그대의 의견이 결과적으로는 모두 맞았으니, 이번에는 주저 없이 그대의 뜻을 따르겠노라.”
이에 이계찰이 기병 이만을 끌고 앞서간 돌지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계찰의 이만 기병이 추가된 것은 돌지린도 모르는 일이었을 뿐더러 건무와 카사르 역시 알 리 없는 노릇이었다.
* * *
건무와 카사르가 기병 일만오천 기를 이끌고 요하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보녕이 놀라 윤여주를 돌아보았다.
“저것들이 왜?”
윤여주가 손뼉을 미친 듯이 치며 크게 웃더니 답하였다.
“원군이 오는 겁니다! 원군이! 이때를 놓치지 말고 군을 끌고 나가 저 거지 같은 천막들을 불태우고 포차도 뺏어 오겠습니다.”
그동안 당한 수모를 날려 버릴 생각에 윤여주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총관! 좋은 생각이오! 놈들을 쓸어버리시오!”
윤여주가 급히 군을 다시 불러 모았는데, 군사들이 성 내 곳곳으로 불 끄러 다니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모아놓고 보니, 거지꼴도 이런 거지꼴이 없는데, 그나마 수는 넉넉하여 다행스러웠다.
보병 오천에 기병 삼천을 이끌고 아직도 불타는 영주 성문을 나서니, 공기부터 시원하여 살 것 같아 사기가 드높아졌다.
“단숨에 몰아쳐 짓밟아라!”
기병을 포차로 보내고 보병은 올루스를 향해 돌격시키는데, 포차를 지키던 전사들이 줄행랑을 놓으며 올루스로 들어가니 기병들도 올루스로 향하였다.
여세를 몰아 윤여주가 기병과 보병을 끌고 올루스를 덮치는데, 수레로 방벽을 세우고 화살을 날리며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저 수레를 걷어 내어 길을 열어라!”
윤여주가 기병을 아끼고자 보병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기 씨 사 형제가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들고 수레 밖으로 뛰어나와 서로 진을 짜고 막으니, 보병들이 감히 수레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이것이 우리 기 씨 일족의 파천진이다! 한번 덤벼 볼 터이냐?”
수레 뒤에서 화살을 날리며 기병들의 접근을 막고, 수레 밖에서 기 씨 사형제가 보병들의 접근을 막으니, 하찮게 여겼던 천막들조차 만만치 않아 윤여주가 버럭 화를 내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몰아붙여라!”
윤여주의 역정에 머뭇거리던 보병과 기병이 일시에 돌진해 가니, 기 씨 사 형제도 수레 뒤로 몸을 숨기며 넘어오는 적들을 대적하였고, 차츰 수레 방벽도 허물어질 듯 위태로워졌다.
“좋아! 더 몰아붙여라!”
윤여주가 더욱 공격을 재촉할 때, 뒤에서 흙먼지와 함께 함성이 일며 카사르가 기병 오천 기를 이끌고 몰아쳐 왔다.
그러자 수레에 매달렸던 영주군들은 앞뒤로 화살을 맞으며 비명을 지르다가 내빼기 바빴다.
“아차! 이것도 적의 계략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윤여주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리며 성으로 도망치니 카사르가 성벽 가까이 쫓으며 화살을 날렸다.
이제 남은 병력은 기병, 보병 모두 합쳐도 이천이 넘지 않아 성 내 치안 유지도 어려워 보였다.
“이제는 정녕 항복뿐이란 말인가?”
윤여주가 이처럼 낙담해 한숨을 쉴 때, 투석기에 사람과 말의 시신을 실어 영주 성 내로 발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이 끝내…….”
이제는 화재 진압할 군사도 부족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차츰 쌓여 갈 것이 자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