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영주 공방전 (3)
승기를 잡았던 고구려 군이 탐한가한의 대군으로 다시 진영을 재정비하는 동안, 영주에서는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성주! 북방 초원의 비렁뱅이들이 수레를 끌고 오고 있다 합니다.”
윤여주가 고보녕을 찾아 들어오며 소리치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보녕은 심드렁히 물었다.
“눈치 없이 이 난리 통에 짐승 가죽이라도 팔러 오는 게요?”
“그러기엔 규모가 큽니다.”
윤여주의 대답에 고보녕이 고개를 갸웃하며 성벽 위에 올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멀리 수레 행렬이 보이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였고 수레를 호위하는 전사들의 수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몽고부족으로 보입니다. 가죽이나 팔러 오는 것 같진 않고, 약탈을 하려는 듯합니다.”
윤여주의 설명에도 고보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중얼거렸다.
“뭐지?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걸 모르나? 비록 수가 많으나, 요동에 대군이 있고 곧 철륵에서도 대군이 지날 것인데, 겁도 없이 왜?”
그가 이렇듯 생각함은 그동안 북방 초원의 민족들은 감히 영주까지 내려와 약탈을 벌일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고, 또한 공성 능력도 전무하여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더구나 북방 초원의 민족은 거란과 돌궐의 지배를 받을 정도로 그 세가 약하여 단 한 번도 영주에 위협이 된 적 없었다.
“장수를 내보내어 이곳은 큰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니, 다시 북으로 올라가 양 떼에게 풀이나 먹이라 하시구려.”
고보녕이 이렇듯 대수롭지 않게 명을 내리니, 윤여주도 가벼이 여겨 휘하 장수 한정호에게 기병 오백을 끌고 나가 멀리 쫓으라 명하였다.
멋진 갑주를 걸치고 긴 창을 쥔 한정호가 말에 올라 기병을 끌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보녕이 말하였다.
“뭐, 말 안 듣고 사정한다면 철륵에서 곧 보급 물자가 도착할 것이니, 저것들에게 가죽을 식량으로 바꿔 줘도 되겠지.”
이런 생각과 달리 성문을 나선 한정호가 기병 오백 기를 끌고 카사르의 부족 앞을 막으며 멈추라 외치니, 약관도 안 된 소년 장수가 말을 끌고 나와 대꾸도 없이 단숨에 한정호의 목을 창으로 꿰뚫었다.
투구와 갑주가 찬란히 빛나는 모습이 결코 북방 초원의 비렁뱅이 꼴은 아니었다.
“나는 고구려의 이 왕자 고건무다! 영주를 취하러 왔으니, 고보녕은 썩 나와 내게 성을 바치거라!”
건무의 이 외침에 고보녕과 윤여주가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성미 급한 윤여주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저 어린 것이, 성주! 제가 나가 저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습니다.”
무력으로는 영주 제일인 윤여주였기에 고보녕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여주가 곧 기병 오천을 이끌고 성을 나서며 외쳤다.
“젖비린내가 아직 남은 놈이 어찌 사람을 해치느냐? 내가 네놈을 잡아 고구려왕의 앞에서 볼기를 칠 터이니, 이리와 포박이나 받거라!”
윤여주의 도발에도 건무는 여전히 대꾸도 없이 홀로 말을 몰아 달려드니, 윤여주도 체면을 생각하여 말을 몰아 상대하였다.
건무의 창과 윤여주의 창이 서로 얽히고, 말들이 앞발을 들며 기세를 올리니, 둘의 실력은 가히 백중세였다.
둔해 보이는 비대한 체구에도 윤여주는 놀라울 정도로 날렵했고 무예의 깊이 또한 출중했다.
그리하여 건무를 상대로 한 치도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창이 부딪칠수록 그의 완력이 점점 더 건무를 압박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윤여주의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응원을 보내는데, 평소 응원에 익숙하지 않은 카사르가 말을 몰아 나오며 망설임 없이 활을 당겼다.
화살은 장수들의 단기접전 따위는 배려치 않고 그대로 윤여주의 어깨에 박혔고 이에 놀란 윤여주가 급히 말을 돌려 내빼기 바빴다.
“아니! 장수들의 단기접전 중에 활을 쏘다니…….”
고보녕도 놀라 탄식할 때,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일제히 말을 몰아 나오며 활을 당기자, 영주로 도망치던 기병들이 등에 화살이 박혀 사방에 널브러졌다.
애초에 초원의 민족들 전투에선 단기접전이란 없었기에, 아군을 돕고 적에게 화살을 날리는 행위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비겁하게!”
단기접전에서 화살을 날린 카사르에게 윤여주가 욕을 해보았으나, 욕을 한들 카사르가 그 욕에 죽지도 수치스러워할 것도 아니니 더 분통 터질 노릇이었다.
간신히 성 안으로 돌아온 윤여주가 수를 점검해 보니, 그 짧은 순간에 이천여 기나 잃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문을 단단히 닫고 성벽을 지켜라! 놈들은 공성전 능력이 없다!”
성벽에 오르며 윤여주가 외치는데, 눈앞에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들판에선 수레 사이로 검은색 소가 포차(抛車)를 끌고 앞으로 나오는데, 그 수가 상당하여 한눈에도 이백여 개가 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포차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크기가 크고 성 밖에서 성벽을 부수거나 성 안을 공격할 때 사용했다.
그런데 카사르 부족의 포차는 그 크기가 유난히 큰데다가 기둥 같은 화살을 올리고 기름 먹인 솜을 씌워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 광경에 그제야 윤여주의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서, 설, 설마.”
믿기 싫은 광경은 곧 현실이 되어 포차가 날린 거대한 화살이 성벽 위 윤여주의 머리 위를 날아 성 안에 들어오며 수많은 지붕에 꽂히고 바닥에 박히며 불길을 만들어 냈다.
연이어 기름 단지를 매단 화살을 포차들이 날리더니, 또다시 불붙은 화살을 연거푸 날려 댔다.
영주 성 내는 곧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포차는 평강이 솜씨 좋은 카사르 부족민들에게 시켜 만든 것으로 정확도는 생각지 않고 그저 사정거리에만 목적을 두었기에, 영주 성 내를 불태우기 충분하였다.
“애초에 성벽을 넘어올 생각은 없었던 것이야…….”
“여길… 불태울 생각인 것인가?”
불타는 영주 성 내를 내려다보며 고보녕과 윤여주가 황망해 이렇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직도 이들의 머리 위로 포차에서 날린 화살이 성 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총관! 이대로 두고 볼 것이오? 어서 나가 저 포차를 막으시오!”
고보녕이 닦달하니, 윤여주가 다시 기병을 끌고 포차를 제거하러 나가려 했다.
그런데 카사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나오며 활을 당기는 통에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하고 그만 줄행랑을 놓아야 했다.
다시 성벽에 오른 윤여주에게 망연자실한 고보녕이 더듬더듬 물었다.
“원래 저것들이 저리도 사나웠소?”
평소 무시하던 북방 초원의 민족들이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니,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윤여주도 답을 내지 못할 때, 건무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오며 소리쳐 꾸짖었다.
“우린 서에서 왔노라! 너희를 지원할 철륵의 후발대는 없을 것이다. 속히 성문을 열고 투항하거라!”
윤여주가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고보녕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하자, 고보녕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누구를 속이느냐? 그래 네까짓 것들이 철륵의 대군을 물리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곧 요하를 넘어 지원군이 올 것이니, 썩 물러나거라!”
영주 성 내는 군사들과 백성들이 불을 끄기 분주했고, 이로 인해 우물은 곧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포차는 여전히 화살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나무 기둥에 불을 붙여 날렸다.
카사르의 부족 여인과 노인들이 주변에서 나무를 베어 오며 끊임없이 마련한 것으로 애써 화살로 깎아 만들 생각조차 없이 불만 붙여 끊임없이 날렸다.
“그래, 빼앗지 못한다면 태워 없애겠다. 그 안에서 활활 타거라!”
건무가 돌아서며 외치니, 오히려 간담이 서늘해지는 고보녕이었다.
보통의 공성전은 공격하는 측이 성벽을 오르고, 성문을 부수는 한편.
수성하는 측은 성문을 막고, 성벽 위에서 백성들까지 동원해 화살을 날리고 끓는 기름을 부으며 돌을 던지기에, 공격하는 측의 손실이 더 큰 법이었다.
허나, 고구려군은 영주가 요충지라 뺏어야 함이 당연하지만, 뺏고 오래 지킬 여력이 없음을 알기에, 쉽게 뺏지 못한다면 아예 불태워 없애려 하였다.
고구려군을 돕는 카사르의 부족 또한 양 떼를 먹일 드넓은 초원이 필요하지,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영주 성 내에는 관심조차 없었기에 영주를 불태움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불에 타면 풀이 잘 자랄 테지.”
활활 타는 나무들을 날리며 카사르가 중얼거리니, 건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답하였다.
“아무렴, 잘 자라고말고. 하하하.”
이렇듯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성벽으로 접근도 하지 않고 포차에 나무를 걸어 날리기만 하니, 단 한 대의 화살과 인명 피해도 없었고 오히려 영주 성 내의 군관민들은 불 끄느라 동분서주하여 전쟁통과 다름이 없었다.
그동안 영주의 백성과 군사들은 성 내의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공격해 오는 적을 막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성벽에 올라 농성을 해왔으나, 목숨 걸고 지킬 자신들의 집이 하나둘 불타니 땅에 주저앉아 실의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포차는 밤이 되어서도 계속 불붙은 나무를 쏘아 보냈고, 밤하늘은 이 불덩이들로 환히 빛나며 곳곳의 집들을 불태웠다.
영주 성 내의 모든 집은 목조 건물에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한곳에 불이 붙으면 연이어 다른 집으로 잘도 옮겨 붙어갔다.
그나마 도로와 넓은 공터를 경계로 지어진 관청과 식량창고 마구간과 병영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으나, 이 역시도 포차의 계속된 화공으로 끝내 불타올라 사방에 재를 뿌렸다.
봄 가뭄으로 건조한 탓에 불길은 군관민이 제아무리 달려들어도 잡히지 않았고 하늘에서 계속 불벼락이 쏟아지는 통에 하나를 잡으면 그사이 열 곳은 더 불에 타올랐다.
“총관! 당장 나가 저 포차를 어찌해 보시오!”
또다시 고보녕이 닦달하자, 윤여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답하였다.
“성주, 우리 성 내에 전투 가능 병사는 이제 기병 사천에 보병 일만이오. 헌데 저것들은 기병 위주라 보병은 그다지 도움 되지 않고 기병 사천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소. 다행히도 놈들이 성벽을 오르지 않으니, 이대로 원군을 기다립시다.”
“닥치시오! 당장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의 목을 베겠소! 저기 저! 움막 같은 것이라도 박살내고 오시오!”
윤여주가 아무리 잘 설명하여도 고보녕이 칼을 빼어 들고 달려들며 올루스 속 게르들을 가리키니, 별수 없이 기병 이천과 보병 육천을 이끌고 나왔다.
허나, 윤여주 자신의 말대로 카사르의 부족은 기병 위주였고, 올루스는 수레로 단단히 방벽을 세우고 여인과 아이는 물론이요.
노인들까지 활을 잘 다루는 명사수들인지라 달려들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되고 뒤이어 덮쳐 오는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의 화살에 도망 다녀야 했다.
이번에도 윤여주가 군사만 잃고 성 안으로 돌아오니, 고보녕도 더는 닦달하지 않고 여전히 불붙은 나무 기둥이 날아오는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이때 윤여주가 한 가지 꾀를 내는데 사뭇 그럴 듯해 고보녕의 눈이 탁 트였다.
“성주, 날이 밝으면 전서구를 날려 원군을 요청합시다.”
“오, 좋소! 당장 날립시다. 원군만 온다면 서로 호응해 앞뒤로 놈들을 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소. 당장 날리시오.”
“전서구는 밤에 날지 않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시지요. 단지 하룻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