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95화 (95/328)

095화 영주 공방전 (2)

을지문덕이 날린 전서구가 신성에서 대기 중인 고강, 고성 형제에게 도착하였다.

“형님, 우리도 출발하시지요.”

비밀 유지를 위해 전서구의 발목엔 아무것도 매여 있지 않았고, 이날만큼은 전서구가 서찰 없이 날아올 경우, 공격 신호를 의미하였다.

“오래 기다렸다. 누명을 쓴 우리 형제가 이 신성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태왕 폐하의 은혜이니, 목숨으로 갚으리라.”

고강이 큰 칼을 차고 앞서 걷자, 오래도록 그를 따랐던 사병들과 장수들이 뒤를 따르며 말에 올랐다.

기병, 보병, 창병, 노궁수 육만여 명을 이끈 고강, 고성 형제가 신성을 나서니, 산 아래까지 길게 행렬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달려 적을 칠 것이다! 멈추지 마라!”

고강이 외치자, 장수들의 함성이 뒤를 이었고 곧 기병들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보병은 늦을 수 있으나, 기병만은 분명 제시간에 도착하리라.

* * *

요동성 북문으로 조용히 군을 이끌고 사발략가한이 도착하니, 하윤이 성문 위에서 내려다보며 예를 표했다.

“가한께 인사 올립니다.”

“대실호연은 나오지 않았는가?”

사발략가한의 물음에 하윤이 공손히 답하였다.

“성주께서는 예를 다해 가한을 맞이할 준비 중이오니, 드시옵소서.”

하윤이 이렇듯 말하며 성문을 열라 명하니, 묵직한 북문이 마침내 열리며 길을 내주었다.

사발략가한은 의기양양해 앞장서 군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돌궐 기병들이 연이어 따랐다.

요동성 안에 사발략가한이 들어선 순간, 돌궐 기병의 앞 행렬 발이 멈추고 말았다.

“이것은?”

눈앞에 극을 꽂은 수레가 길을 막고, 방패를 든 중장 보병과 창병이 그 뒤에 섰기 때문에 더는 나아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성벽 위에서 노궁수들이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선 돌궐 기병들을 향해 화살을 쏟아붓는데, 아직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성 밖 돌궐 기병들은 줄지어 성 안으로 들어오고자 말을 몰았기에, 안팎으로 큰 혼란이 펼쳐졌다.

“매복이다! 대실호연이 배신하였다! 퇴각하라!”

사발략가한이 그제야 깨닫고 급히 말을 돌렸으나, 돌궐 기병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좀처럼 성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다.

성문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다가 화살에 말이 맞아 쓰러지자, 사발략가한은 손을 발삼아 네발로 기어 간신히 성 밖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는 천부장이 내민 손을 잡아 함께 말을 타고 도망칠 수 있었다.

이미, 요동성 동문과 서문이 열려 각기 고구려 기병 일천 기가 나와 대기하던 중으로 진열이 무너진 돌궐군의 양옆으로 협공해 오니, 사발략가한은 살 길을 찾아 무작정 북으로 내달려야 했다.

“쉬지 말고 퇴각하라!”

성문 안팎으로 돌궐 기병들은 이미 진영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이대로는 전멸이 분명하여 퇴각 명령은 당연했다.

사발략가한의 외침에 돌궐군이 퇴각을 시작했으나, 뒤를 쫓는 고구려군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요동성으로 향할 때는 멀리 빙 돌아 왔으나,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어 무작정 북으로 오르는데, 마침 고구려 진영의 배후를 공략하던 이계찰이 사발략가한의 위급함을 깨닫고 구원키 위해 군을 돌렸다.

이때, 고구려군의 육화진 배후 진문이 열리며 개마무사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수가 이전과 달리 상당하였다.

“이런…….”

고구려 진영의 배후를 공략하던 자신들이 역으로 배후를 잡히자, 이계찰이 허망해 탄식하였고, 개마무사들은 밀물처럼 돌궐 기병을 짓밟고 돌진해 왔다.

“거리를 벌려라! 저놈들과 근접전을 벌여선 안 된다!”

그나마 이계찰이 정신을 바짝 차려 올바른 명을 내리는데, 이때 동쪽에서 흙먼지가 자욱이 일기 시작했다.

고강, 고성 형제가 이끈 경기병들이 질주해 오며 살을 날려 오는 것이다.

“이런… 고구려의 지원군인가? 가한을 호위하며 퇴각하라!”

이계찰이 요동성 기병들에게 쫓기는 사발략가한부터 구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하여 명을 내리니, 이번엔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진문이 다시 열리며, 경기병들이 쏟아져 나오며 살을 날려 왔다.

이계찰은 감히 맞설 엄두도 못 내고 패퇴해 오는 사발략가한과 합류한 후 무작정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이들이 지나치는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연달아 진문이 열리며 기병들이 추격해 왔다.

마침 소식을 접한 공손향이 군을 몰아 돕고자 오니, 공손향을 대적하던 고구려군의 진영에서도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진문이 활짝 열리며 기병들이 배후를 공격해 왔다.

돌궐군이 공격하면 고구려군의 진영은 이를 막고 화살을 날리며.

돌궐군이 뒤를 보이면 여지없이 진문이 열리고 고구려의 기병이 돌궐군의 배후를 치니, 퇴각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마침내 돌궐 기병 특유의 뿔 나팔 소리가 퇴각을 알리며 요동벌 곳곳에서 울려 패주를 시작하니, 고구려 진영의 가장 우측을 공략하던 우문도웅의 북주군은 겹겹이 공격해 오는 고구려 군을 뚫느라 사지를 황망히 헤매야 했다.

“요하를 넘어, 영주에서 군을 재정비한다. 퇴각하라!”

아직도 말을 갈아타지 못하여 천부장의 뒤에 앉은 사발략가한리 이를 바드득 갈며 외치니, 이를 받아 뿔 나팔이 계속하여 요동벌에 울려 퍼졌다.

* * *

드디어, 고구려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군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을지문덕이 명을 내려 진영을 변경케 하니, 전군을 지휘하는 연태조가 이를 받아 전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뒤를 잡아라! 노도와 같이 몰아치거라!”

연태조의 명에 고구려의 모든 기병이 사방에서 흩어져 내달리는 돌궐 기병의 뒤를 맹추격하였고, 그 뒤를 보병과 창병, 노궁수들이 따르며 진군을 시작하였다.

“감히 한 놈도 요하를 살아서 넘지 못하게 하라!”

태왕의 천금 같은 명이 여기에 더해지자, 기세 오른 고구려군의 함성이 천지에 요동치며 패주하는 적의 다리를 더욱 후들거리게 하였다.

대장군 강이식이 가장 선두에서 기병을 이끌고 내달리며 닥치는 대로 낭아봉을 휘둘러 말과 사람을 허공에 띄웠다.

이는 가뜩이나 강이식에게 두려움을 지닌 적들에게 절망적인 공포를 안겨 주기 충분했다.

“더, 더! 더! 더 빨리 달려라! 요하를 넘어야 산다! 달려라!”

사발략가한이 외칠 때마다 뿔 나팔이 울리며 퇴각을 재촉하였으나, 이미 사방에서 산개한 채 패주하는 북주와 돌궐 연합군은 고구려군에게 뒤를 잡혀 곳곳에서 궤멸하고 있었다.

“정녕, 천하의 이 사발략가한이 요동까지 와서 죽는단 말인가?”

사발략간한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긴 탄식을 하며 절망했다..

그때, 앞에서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공격 명령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밀려왔다.

분명 요하 방면엔 배치한 군이 없음에도 들려오는 원군의 뿔 나팔 소리에 사발략가한이 놀라 멍하니 전방을 주시하자, 탐한가한의 십오만 대군이 흙먼지를 뚫고 진영을 드러내며 급히 말을 몰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와하하하, 하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금세 화색이 돈 사발략가한의 이 외침과 함께 전황을 주시하던 을지문덕이 북을 울려 패주하는 적을 쫓던 고구려군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 * *

고구려군은 다시 진영을 빠르게 갖추고 채비를 하였다.

고무와 고강, 고성 형제가 이끈 군사들도 합류하니, 비록 적의 수가 늘었다 하여도 고구려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십오만 대군이 합류하였어도 다시 진을 세워야 하기에 북주와 돌궐 연합군의 기세는 참담한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놈!”

사발략가한이 유역비의 목을 쥐어 들어 올리자, 가냘픈 체구의 유역비는 허공에 발이 동동 떠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가한, 고정하십시오. 적의 간계에 빠져 비록 오늘 패하였으나, 탐한가한이 군을 이끌고 제때 도착하였고, 아직 영주는 우리 수중에 있으며, 곧 아파가한이 이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올 터이니, 고구려군에 대한 복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문도웅이 애써 사발략가한을 진정시키니, 그제야 유역비를 바닥에 패대기친 사발략가한이 자리에 앉으며 거친 숨과 함께 전황을 물었다.

“내가 네놈의 재주를 다시 믿어 보마. 전황이 어찌 되는지 보고부터 하거라.”

사발략가한의 이 물음에 겨우 살 길이 열린 유역비가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이번 전투에서 중군의 돌지린 장군은 일만여 명을 잃었고, 배후를 공략하던 이계찰 장군은 이만여 명을 잃었으며, 우군을 지휘한 공손향 님은 만오천을 잃었사옵니다.”

“어휴…….”

“좌군을 지휘한 우문도웅 님은 만오천을 잃었으며, 가한께서 이끄신 일만은 궤멸하였습니다. 도합 칠만여 명을 잃어 육만여 명이 남았고, 여기에 탐한가한께서 십오만 대군을 더하여 전투 가능 병력은 모두 기병 이십일만여 기이옵니다.”

“뭣이라! 한 번의 전투로 칠만을 일었단 말인가? 요하를 넘어 영주에서 재정비한 후 아파가한을 기다려 다시 공략해야 하는가?”

들으면 들을수록 열불 날 소리에 사발략가한이 벌떡 일어나 서성이며 중얼거리자, 잔뜩 주눅 든 유역비가 고개만 푹 숙인 채 조심스레 계책을 내었다.

“요하를 넘으면 되넘는데도 다시 피해를 감수해야 하옵니다. 적은 오늘의 대승으로 잔뜩 사기가 올랐을 것이옵니다.”

“…….”

“이때 싸움을 벌이면 득보다 실이 크고, 탐한가한께서 이끌고 온 기병들도 지쳤을 터이니, 철륵에서 공성병기가 도착하고 아파가한이 이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이곳에 단단히 진영을 갖춰 방비에 주력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사발략가한도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 유역비의 말을 듣고 지난번 요하를 넘느라 고생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이곳에서 아파가한을 기다린 후 고구려군을 일거에 누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온달이 보급을 끊어 아파가한의 이십오만 대군이 출병조차 못 함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성주님, 사발략가한이 요동성에서 죽을 고비를 겪고 군사 칠만도 잃었다 합니다.”

영주를 지키는 고보녕에게 총관 윤여주가 살찐 배를 안고 들어오며 다급히 외쳤다.

“뭐요? 칠만이나?”

“그렇습니다. 탐한가한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몰살당했을 것이라 합니다. 이로써 저 오만한 탐한가한의 공이 늘었군요.”

윤여주의 이 답변에 고보녕의 입맛이 썼다.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전멸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나, 저 빌어먹을 탐한가한의 기세가 오를 것이 영 개운치 않군. 허허, 그래 총관이 보기에 이 전쟁은 어찌 될 것 같소?”

은근히 고구려군의 전력이 상당하여 불안한 것이다.

“고구려군의 기세가 드높아도 아파가한이 철륵에서 이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에 들어서면 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윤여주의 의견은 누가 들어도 타당하였다.

다만, 그 이십오만 대군이 없을 것이란 점만 빼면 말이다.

* * *

건무와 카사르가 이끈 전사들은 올루스를 호위하면서도 진군 속도가 결코 느리지 않아, 마침내 영주를 반나절 거리에 두었다.

평강은 달리는 수레에서 건무와 카사르에게 작전을 설명하였고, 온동과 독고영이 작은 몸을 바삐 움직이며 시중을 들었다.

영주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우랑과 기 씨 사 형제는 카사르의 천부장들과 함께 행군 중에도 전투 채비를 서둘렀다.

이제 전장은 요동이 아닌, 요하 너머 요서로 옮겨지고 있었다.

수레 위에서 멀리 영주의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오자, 평강이 손가락을 들어 성벽을 가리키며 부드러이 말하였다.

“보소서! 저 성벽은 반드시 온전히 두고 성 안에만 불바다를 만들어야 하옵니다.”

성벽을 남기고 성 안을 어찌 불바다로 만들지 이미 설명을 들었는지, 건무와 카사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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