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94화 (94/328)

094화 영주 공방전 (1)

탐한가한이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영주에 들리지도 않은 채 요하로 향하였다는 보고에 고보녕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고보녕은 수나라의 영주 자사였다가 공손향의 제안으로 돌궐에 영주를 바치며 나름 자신의 공이 크다고 자부하였다.

그는 탐한가한이 자신을 무시함에 책사이자 영주 총관부의 수장인 운여주를 불러 물었다.

“탐한가한 그놈이 영주에 들리지 않더라도 사람을 보내어 내게 인사함이 예의 아닌가? 어찌 이리도 나를 업신여긴단 말인가?”

이에 윤여주가 살찐 배를 들썩이며 답하였다.

“성주님, 이 영주는 요충지로 돌궐이 요동의 지배력을 확보할 시, 이 영주가 철륵과 요동을 잇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탐한가한은 본디 배운 바 없는 미개한 오랑캐로 그다지 신경 쓸 자가 못 되옵니다.”

“하하, 그렇구나.”

“우문도웅이 요동에 북주를 재건해 돌궐의 제후국이 된다면 성주님 역시 사발략가한에게 영주를 지키는 제후로 대접받게 될 것입니다.”

듣고 보니 돌궐은 철륵의 열다섯 부족의 독자적 권한을 인정하며 복속시켜 대세력을 이루었으니, 자신도 나름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듯싶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헌데, 만일 북주와 돌궐이 고구려에 패하면 나는 어찌 되는가?”

“패한다면 수의 공격과 고구려의 공격이 우리 영주로 향하겠지요. 그러나 탐한가한의 십오만 대군마저 합류할 것인데, 패할 리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이 역시도 그럴듯하여 고보녕의 마음을 흡족히 하였다.

* * *

을지문덕이 진영의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진법을 지휘하니, 여섯 잎을 지닌 여섯 개의 꽃이 만개한 형상으로 고구려 진영이 움직였다.

그가 올라선 중앙이 중군이 되어 태왕과 함께 전장을 지휘하는 형국이었다.

육화진법(六花陣法)이란, 방진법의 일종으로 방진은 방어에 특화되었으나, 육화진은 다양한 병종을 활용하여 공격에도 사용 가능하였다.

부대 명칭은 각각 중군(中軍), 전(前), 후(後), 좌(左), 우(右) 사 군에 좌우후군(左虞候軍) 우우후군(右虞候軍)으로 나누며.

각 부대는 노수(弩手), 궁수(弓手), 마군(馬軍), 도탕(跳蕩), 기병(奇兵), 치중병(輜重兵)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보급부대인 치중병의 편제는 상황에 따라 각 부대가 독립된 전투를 펼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다양한 병종을 활용하여 공격과 방어뿐만 아니라 보급까지 균형을 잡은 이 육화진법의 목적은 아군의 장점을 살리고 적의 장점을 제압하는 것에 있다.

그 장점은 북주와 돌궐의 연합군처럼 기동성 높은 공격 위주의 단일 기병 병종이 병력의 수만 믿고 일전을 벌일 경우, 반드시 전술 부재의 순간이 발생하며 이를 노리고 반격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대군이 병종간의 장점을 활용한 조직화를 이루면서 육화진은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전투력이 두 배, 세 배 올라가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이 특이한 진법을 처음 접한 사발략가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우문도웅의 책사 유역비에게 물었다.

“둥글둥글 뭉쳐 있는 게 딱 방진 같은데, 우리의 기병 전술을 꺼려 방진을 한 것인가?”

육화진법을 처음 접했으니, 방진이냐 물음은 당연하였다.

고구려 진영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유역비도 이런 진형은 처음이라, 방진이라 답할 수밖에 없었다.

“방진이옵니다. 필경, 우리의 기병 전력을 두려워하여 방어를 취함이 분명합니다.”

이때, 조심성 많은 이계찰이 나서며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대회전에서 대군이 싸우기도 전에 방진을 취함은 없는 일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방진을 취할 것이면 대회전을 하지도 않지요.”

이계찰의 이 말에 사발략가한은 자신의 판단이 무시당하였다 생각하여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너는 나보다 잘난 놈인가 보구나. 방진을 보고 아니라 말하니, 그럼 저것이 무엇이더냐?”

이 물음에 이계찰이 답하지 못하니, 사발략가한이 코웃음 치며 명하였다.

“이계찰! 그대는 우군을 이끌고 돌아 고구려 진영의 배후를 치고, 우문도웅 그대는 고구려 진영의 좌측을 맡으시오.”

“…….”

“우리 돌궐의 중군은 고구려 진영 앞을 막고, 공손향 그대가 좌군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의 우측을 공략하시오. 나는 중군에서 따로 일만을 빼어 이끌고 요동성으로 가겠소.”

요동성은 유역비가 북주군 일만을 끌고 진입하려 했으나, 사발략가한이 이토록 명을 내리니, 우문도웅으로서는 받아들여야 했다.

‘사발략가한이 스스로 이 전투의 일등 공적을 취하려 하는구나. 욕심이 많은 인물이니 받아들이자. 그래도 공손향에게 돌궐의 좌군을 맡겼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문도웅이 명을 받아들이니, 돌궐의 만부장 가비주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사발략가한에게 항의를 하였다.

“공손향님에게 어찌 우리 좌군을 이끌라 명하시옵니까?”

가비주는 좌군에 속한 만부장으로 공손향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이다.

“공손향은 영주를 취한 일등 공신이고, 오천 기병을 이끌고 왔으니, 좌군 이만을 지휘함은 당연하다. 너는 공손향의 지휘를 받아라.”

사발략가한이 뚝 잘라 명하니,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실, 공손향에게 돌궐의 좌군 지휘를 맡긴 것은 사발략가한 자신이 요동성 공략의 공적 취함을 살며시 덮는 즉흥적인 술책이었다.

갑작스레 변경된 명령이었으나, 유연한 기병 전술이었기에 공격 태세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계찰이 먼저 우군을 끌고 빙 둘러 전진하니, 우문도웅도 북주군을 끌고 이동을 시작했고, 공손향이 돌궐의 좌군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 우측으로 향함과 동시에 사발략가한도 일만 기병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하였다.

진영의 양 날개가 움직이자, 드디어 돌궐의 중군도 기병 삼만여 기를 만부장 돌지린의 지휘로 천천히 진군하였다.

기병의 기동성을 나름 적극 활용한 움직임으로 고구려 진영이 한 곳이라도 흔들릴 시, 이들 기병의 위력이 십분 발휘되어, 사방에서 고구려 진영의 방어를 뚫고 공격이 가능할 것은 분명하였다.

* * *

우문도웅이 가장 먼저 고구려 진영 좌측을 향하여 공격 명령을 내리니, 진교가 기병 삼천을 몰아 나갔다.

진교의 기병 삼천은 고구려 진영을 향해 달리며 활의 사거리를 재어 살을 날렸다.

그런데 고구려의 좌측 진영에선 중장보병이 방패로 노궁수의 앞을 막아 화살을 방비하고, 그 뒤에서 노궁수가 일제히 화살을 날리니, 도리어 진교의 삼천 기병의 피해가 컸다.

진교가 급히 명령을 내리며 진영으로 퇴각하려 들 때, 고구려의 좌측 진영 문이 열리며 흑비걸이 개마무사 일천을 이끌고 돌진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다.

이에 우문도웅이 진교를 구원하기 위하여 선우운에게 명을 내리니, 기병 삼천을 이끈 선우운이 진교의 기병을 공격하는 흑비걸의 개마무사를 향해 화살을 날리며 돌진하였다.

흑비걸은 북주가 지원을 보내자, 곧바로 퇴각하여 고구려의 좌측 진영 안으로 쑥 들어갔고, 이들을 향한 화살은 단단한 철갑이 모두 튕겨 내어 개마무사는 조금의 손실도 없었다.

개마무사가 진영 안으로 들어오자, 또다시 노궁수의 화살이 선우운의 삼천 기병을 향해 날아들었고, 선우운이 군을 끌고 물러서니 개마무사가 다시 돌격해 왔다.

이러한 공방은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져, 시간이 지나고 공격을 할수록 북주와 돌궐 연합군은 고구려의 반격에 차츰 병력이 깎여 나갔다.

“딱히 큰 패배도 없고 우리가 계속 공격을 주도하는데, 피해는 야금야금 쌓여가는 느낌이구나.”

우문도웅이 이렇듯 말하자 유역비가 웃으며 안심시켰다.

“적이 단단히 방어를 한들 요동성에 북주 깃발이 걸리고 사발략가한이 입성한다면 고구려군의 진영도 흔들릴 것이옵니다.”

“…….”

“그때 일시에 몰아치면 진법이 깨지고 패퇴할 것이니, 주군께선 천천히 압박하시며 후일을 대비해 병력을 아끼십시오.”

유역비가 이렇듯 우문도웅을 안심시키는 동안, 중군 지휘를 맡은 돌지린은 흔들릴 듯하면서도 계속 공격을 버텨내며 역습을 가하는 고구려 진영을 일거에 몰아쳐 깨기 위해 삼만 기병을 일시에 끌고 돌격해 들어갔다.

“화살을 날리며 밀고 들어간다! 몰아쳐라!”

돌궐 기병 삼만여 기가 돌지린의 지휘로 일거에 화살을 날리며 내달렸다.

고구려의 중장보병이 앞으로 나서며 방패로 화살을 막고 그 뒤의 노궁수가 응사를 하다가 밀물처럼 돌궐 기병이 부딪쳐 오자, 극과 구겸창을 든 창병이 돌궐 기병을 막아 내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밀어붙여라! 반드시 놈들의 진영이 허물어질 것이다!”

돌지린은 과격하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돌지린은 기병이 기세로 몰아붙이면 창병과 중장보병의 방어진은 허물어질 것임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돌궐 기병이 곡도와 창으로 고구려군의 창병과 중장보병을 밀어붙이자, 조금씩 진영이 흔들리며 고구려군의 피해가 늘어났다.

이때 고구려군의 진영 중군에서 을지문덕이 명을 내리자, 여러 깃발이 올라가며 신호를 보내냈다.

그러자, 진영의 좌측과 우측의 문이 열리고 개마무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돌지린이 지휘하는 돌궐 기병을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물러나 진영을 가다듬는다! 물러나라!”

돌지린도 만만한 장수는 아니어서 무리하지 않고 군을 돌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자 명을 내렸다.

돌궐의 중군이 뒤로 물러나니, 개마무사들은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가고, 노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고구려 진영은 북주와 돌궐의 공격을 사방에서 받으면서도 공격과 방어가 각 병종들의 장점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육화진의 위력이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기다리십시오. 적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유역비가 주문을 외우듯 우문도웅을 계속 진정시켰고, 이 순간에도 사발략가한의 돌궐 기병 일만은 요동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하윤의 술수로 요동성은 각 성문과 성벽의 군사 배치가 다시 이루어졌는데, 사발략가한이 진입할 북문은 일부러 군사를 빼 놓은 상태였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시지요. 사발략가한이 직접 오는 듯합니다.”

하윤이 대실호연을 재촉하며 앞장서 북문으로 향하니, 대실호연과 하윤의 뒤를 군사 일백여 명이 병장기를 들고 따랐다.

요동성 북문의 수문장은 대실호연의 심복으로 이미 북주의 깃발을 내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문 위를 지키던 고구려 군사 일백여 명과 북문 아래를 지키는 군사 오십여 명은 수문장의 배신으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대실호연이 이들을 밟고 성문 위로 올랐다.

“깃발을 올려라!”

대실호연이 비록 요동성의 성주이나, 요동성의 오천여 군사 모두가 고구려를 배신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였다.

이 변고를 눈치 채고 막기 위해 달려들기 전에 북주 깃발을 내걸고 한시라도 빨리 사발략가한이 이끌고 오는 군사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삼족오 기가 내려가고 북주의 깃발이 걸리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사발략가한의 기병 일만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 전쟁도 끝이로구나.”

대실호연이 이렇듯 중얼거리며 멀리서 다가오는 사발략가한의 기병을 바라보았다.

그때, 검은 망토를 두른 인영이 새처럼 날아 그의 곁에 서더니, 가볍게 칼을 한 번 휘둘렀다.

총관부에서 경공술이 가장 뛰어난 창주였다.

툭!

너무도 허무히 대실호연의 머리가 떨어졌다.

놀라 눈을 크게 뜬 하윤을 향해 철편이 날아들며 감싸더니, 북문 아래 성문을 지키던 수문장의 곁에선 사내가 검을 빼어 들고 수문장의 목을 뎅강 베어 버렸다.

철편을 휘두른 이는 맵시가 고운 여인으로 선예였고, 수문장의 목을 벤 이는 어득구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해권이 검은색 일색의 조의선인 삼백여 명을 이끌고 달려오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무기를 버려라! 이 북문은 우리가 지킨다!”

해권이 이끈 조의선인들이 날듯이 달려 북문 위아래를 모두 장악하자, 뒤이어 고무가 요동성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소리쳤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을 잡아 이 전쟁을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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