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온달 이십오만 대군을 막아 내다. (2)
보급품을 수송하는 군사들이 습격당해 수레가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철륵의 아파가한은 다혈질의 사발략가한의 진노가 두려워 급히 자신의 부족 기병 이만을 끌고 추격을 시작하였다.
철륵부의 열다섯 부족에게서 이십오만의 대군을 차출한 상태였으나, 아직 출병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데다, 한 달간 준비한 보급품마저 불에 탄 터라, 섣불리 대군을 이끌고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밤낮으로 이틀을 쉬지 않고 달리니, 수레가 잿더미로 변한 고갯마루에 오를 수 있었고, 참담한 상황에 잠시도 쉴 겨를 없이 바로 말을 몰아 온달 군의 뒤를 쫓았다.
살아남은 병사의 말에 따르면 적은 고구려 군과 북방 초원의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로 추정되었으며, 소를 천이백여 마리나 끌고 갔다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듯했다.
‘비렁뱅이 커레이트 놈들과 고구려 군이 어찌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으나, 이놈들을 잡지 못한다면 모든 죄는 내가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틀을 더 쉬지 않고 달리니, 말도 사람도 모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야 멀리 흙먼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반나절을 더 달리면 따라잡을 거리였다.
“쓰러지는 놈은 말과 함께 목을 벨 것이다! 달려라! 놈들은 고작 오천 정도다.”
아파가한이 엄히 명을 내리고 앞서 달리니, 감히 누구도 죽는 소리는커녕 뒤처질 처지가 못 되었다.
달리는 마상에서 말린 고기를 씹고, 잠도 자지 않으며 맹목적으로 뒤를 쫓은 탓에 사람은 집중력을 잃어가고 말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상태였다.
그러나 눈앞에 목표가 보이니 이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더 달리니, 어스름이 내리고 달빛이 해를 대신할 무렵.
소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필경 야영을 하며 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파가한이 가만히 손을 들어 속도를 늦추게 한 후, 천천히 진격하며 천부장들을 불러 명을 내렸다.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접근한 후 삼면에서 급습한다.”
일일이 천부장들에게 위치를 지정하여 군을 셋으로 나누고 삼면에서 다시 진격해 갔다.
지친 상태에서도 기세가 상당히 올라 역시 철륵부의 영웅 아파가한의 전사들다웠다.
천여 보 남짓 거리가 되자, 아파가한이 소리 높여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도적놈들을 짓밟아라!”
그의 명에 삼면에서 돌궐 기병들이 일시에 밀려들어 가니,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하였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놈들을 박살내야 한다.’
아파가한도 자신의 군사들과 말들이 모두 한계까지 지쳤음을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의 이 절박한 심정을 백분 이해한 군사들도 모든 힘을 쥐어짜 오직 한 점을 향해 말을 몰았다.
고구려군의 야영지 불빛이 점점 더 환해지며 소들의 모습이 시야에 확 들어오는 순간.
아파가한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불길함에 목이 터지라 외쳤다.
“멈춰라! 말을 돌려라!”
넓게 모닥불이 펼쳐진 야영지엔 소 떼만 득실거렸고, 풀밭에선 기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파가한의 외침은 이미 삼면에서 돌진하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묻혔고, 끝내 돌진할 상대를 찾지 못한 허망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때, 천여 보 떨어진 전방에서 말과 함께 어둠 속에 엎드려 있던 고구려군과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이 일시에 일어나 말에 오르더니, 화살에 불을 붙이며 내달려 왔다.
말과 함께 엎드려 몸을 숨긴 채 매복하는 재주는 북방 초원의 민족 특유의 기술로 적봉진에서 카사르의 전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고구려 기병들도 익혔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잠시 후, 밤하늘을 환히 밝힌 불화살들이 유성처럼 내리며 야영지에 쏟아졌다.
기름이 뿌려진 풀밭이 일시에 불타오르며 놀란 소 떼가 크게 날뛰자, 지칠 대로 지친 돌궐 기병들과 그들의 말들은 우악스런 소 떼들에게 치이고 밟히며 비명을 질렀다.
“모두 물러나라! 피해라!”
아파가한이 급히 소리쳐 말을 돌리자, 뒤따르는 돌궐군을 향해 말까지 철갑을 두른 개마무사 천기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며 거침없이 베어 나갔다.
“달려라! 퇴각하라!”
이미 전의를 상실한 아파가한이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며 외쳤으나, 뒤이어 고구려의 경기병들과 커레이트 전사들이 기동성을 발휘하며 뒤를 잡아 화살을 날렸다.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말들이 태반이라, 두 식경이 지나 추격을 겨우 피했을 때는 아파가한의 곁에 이십여 기가 전부였다.
정예 기병 이만여 기를 단 한 차례 공격으로 모두 잃은 것이다.
“말과 병장기만 뺏고 산 자는 죽은 자를 묻고 떠나라 하시오.”
온달이 포로로 잡힌 돌궐군을 둘러보며 명을 내리고는 쇼락이 수하들과 함께 다시 몰아온 소 떼들을 흡족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날이 밝으면 일찍 떠나시지요.”
해진이 온달의 곁에 서서 의견을 구하니, 온달이 선선히 동의하였다.
아파가한이 며칠을 달려 거지꼴로 철륵에 도착했을 땐, 이십오만 대군의 출병 준비가 마무리되었으나, 보급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도저히 출병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서둘러 부족한 물자를 채워야 한다.”
이렇게 명을 내리고도 아파가한은 또다시 철륵부 열다섯 부족의 물자를 쥐어짜 마련해도 한 달 이상 시일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곧 닥쳐올 사발략가한의 처벌이 두려워 벌벌 떨어야 했고, 이 두려움은 곧 변심으로 변하게 된다.
결국, 온달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십오만 대군의 출병을 막아 낸 셈이었다.
* * *
온달이 철륵에서의 출병을 막아 낸 그 시점, 요동에선 우문도웅과 사발략가한의 연합군이 대회전을 벌이기 위하여 고구려 진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진영에서도 이미 정찰병에 의해 보고가 들어와 적을 맞아 일전을 벌이기 위한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현재 적은 북주와 돌궐을 합쳐 십삼만 정도 되옵고, 우리는 구만여 명으로 적이 수적으로 상당히 우세이옵니다.”
“…….”
“먼저 진을 치고 대비를 한다면 이 일전에서 적을 요하 너머로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옵니다.”
보통의 전투에서 기병 한 명이 보병 여덟을 대적하니, 기병 일색의 북주와 돌궐의 군세는 그 수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막리지 연태조가 태왕에게 전황을 설명하니, 조용히 듣던 태왕이 고개를 끄덕인 후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이에 을지문덕은 적이 취할 진과 고구려 군이 취할 진을 아뢰었다.
“적은 기마 병종 유일이라, 기마 전술을 극대화할 진을 취할 것입니다. 물러나고 돌격하기 수월하도록 넓고 길게 양 날개를 펼치고, 이 양 날개 끝에서부터 기동을 시작하여 우리 고구려의 측면과 배후를 노릴 것입니다.”
“계속해 보아라.”
“우리는 적이 진영 양 끝과 후방을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적의 진과 달리 넓고 길게 진을 펼치지 않고, 단단하면서도 반격에 유리한 육화진을 펼쳐 창병과 중장 보병을 앞에 배치하고, 노궁수로 적의 기동을 끊음이 옳으리라 보입니다.”
“음…….”
“또한 기병을 움직여 적이 우리의 배후로 기동할 시 쫓기 쉽도록 대비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을지문덕이 펼친 이 육화진은 기병의 기동력뿐만 아니라 각 병종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진법으로 훗날 당의 이세민이 이를 취하여 아비 이연을 도와 중원을 통일하고 심지어 고구려 정벌에서까지 이용하게 된다.
“제갈공명의 구궁팔괘진과 더불어 오랜 세월 그 명성을 전해 온 이 육화진은 각 병종의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우리 군에 적합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설명처럼 육화진은 훌륭한 진법이었지만, 통제가 쉽지 않아 감히 펼치기 어려운 진법이었다.
연태조는 진법 설명을 들으며 오늘 있을 대회전에서 북주군의 일부가 난전 중 빙 돌아 요동성으로 향하고, 이에 대실호연이 고구려에 반기를 들고 북주군을 맞이할 것이란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살며시 태왕의 안색을 살피었다.
‘분명 을지문덕 저자가 태왕께도 아뢰었을 것인데, 표정의 변화가 없구나. 과연 태왕은 담대하니, 고구려에는 큰 복이나, 우리 연 씨 일족에게 득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일전에서 을지문덕이 세운 수가 모두 순서대로 들어맞지 않을 시, 고구려는 요동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힘겨운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면서 오부의 귀족들은 벌써 적의 수가 많으니, 일전을 피하고 청야전술을 펼치자 제안하기 바빴다.
‘저들 귀족에게 백성이란 없구나. 성에 들어가 버티면 귀족들은 안전하겠으나, 이후 피폐해진 땅에서 살아갈 백성들에겐 전쟁이 끝나도 삶이 지옥일 터인데, 어찌 아직도 청야전술을 언급한단 말인가? 요동벌에서 막을 수 있다면 대회전이 최선이다.’
연태조가 청야전술을 주장하는 오부 귀족들을 노려보며 분노했다.
‘언젠가 저 쓸모없는 오부 귀족들의 목을 모두 베어 나라를 평온케 하리라.’
그때, 정찰병이 전한 정보를 접한 장수가 막사로 들어오며 태왕에게 허리 숙여 아뢰었다.
“적이 곧 당도해 앞에 진을 펼칠 모양입니다.”
이에 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명하였다.
“가장 앞에서 적을 지켜볼 것이다. 을지문덕은 진법을 지휘하라!”
태왕이 친히 전장에 나서니, 청야전술을 주장하던 귀족들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뒤를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탐한가한이 이끄는 철륵의 십오만 대군은 돌궐에 투항한 고보녕이 지키는 영주에 들리지 않고 지나쳐 요하로 향하고 있었다.
“우린 곧바로 전장으로 향한다. 수나라 장수였던 놈이 지키는 영주에 볼일은 없다.”
제 나라를 배신해 이익을 쫓은 고보녕을 경멸하는 언사로 탐한가한의 수하 장수 모두 같은 마음이라 이견을 내는 이 하나 없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에서 고보녕이 영주를 바친 공을 크게 인정받을 것이 못마땅했으리라.
그간 철륵에서부터 쉬지 않고 행군하여 지칠 만도 했으나, 사내들의 시기심이 영주에 들러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않게 한 것이다.
“가자! 어서 빨리 가, 고구려 군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자.”
탐한가한이 진군 속도를 더 높이라 명하니, 십오만에 달하는 돌궐 기병들이 말에 속도를 더하여 말발굽과 말울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 * *
“탐한가한은 영주에 들르지 않고 바로 요하를 넘을 것입니다. 저들이 요하를 넘으면 저희는 계획대로 영주를 공략해 취해야 하옵니다.”
평강이 오라버니 건무에게 의견을 건네었다.
평소 수심 가득한 건무였으나, 전장에 나서니 늠름한 기백이 넘쳐 평강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기 씨 사 형제에게 물었다.
“너희는 영주에 들어간 일이 있다 들었다. 어떠한가? 성의 방비를 우리가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건무의 이 물음에 총명한 기훈이 답하였다.
“성 내 군사의 수는 우리보다 적을 것이나, 성이 높고 물자가 풍부하여 오래도록 수성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면, 공략이 어렵다는 말인가?”
건무가 되물으니, 기악이 기훈을 대신하여 답하였다.
“저희 사 형제 본디 장수가 아닌 도적 출신이오나, 감히 총관께 아뢰나이다. 영주는 애써 공성전을 펼치지 않고 성을 에워싸고 막기만 하여도 저들은 감히 나와 포위를 풀지 못할 것이니, 애써 취하지 않아도 보급을 끊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료되옵니다.”
“음…….”
“영주를 지키는 고보녕이란 장수는 본래 수나라 사람으로 제 살 길을 찾아 돌궐에 영주를 바친 자이니, 우리의 포위가 시일이 흐르면 스스로 무너져 또다시 영주를 우리에게 바칠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요하를 넘어간 적이 군사 일부를 돌려 원군을 보낸다면 어찌하겠는가?”
기악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요동의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꺼림칙한 건무였다.
이에 평강이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잠시 살피고는 의견을 올렸다.
“포위하자는 의견은 카사르 부족장님의 전사들의 능력을 백분 활용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허나, 요동에서 적의 원군이 되돌아오면 오히려 우리가 위험에 처해지니, 포위를 하되 성을 공격하여 조속히 취함이 옳을 듯합니다.”
공성 능력이 없는 카사르 부족 전사를 염두에 둔 의견이었다.
“누이는 영주를 조속히 취할 계책이 있는가?”
건무가 좀 더 상세한 안을 묻자, 평강이 지도를 펼치며 운을 띄웠다.
“영주는 성벽이 높으니, 우리가 취했을 때 수성에 많은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성벽은 상하지 않도록 성 내만 불바다로 만들어 취하면 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