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일진일퇴(一進一退) (4)
검이 아닌 낭아봉을 쥔 강이식에게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술렁이며 검귀라 외치니, 가뜩이나 강이식에게 원한이 사무친 도광으로선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검을 들어야 검귀라 할 것이지, 저것은 쇠몽둥이 아니더냐? 이 빌어먹을 것들.”
그들은 수적 우세에도 기가 꺾여 오히려 고구려 군에게 포위된 신세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도광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주위 군사들에게 말채찍을 휘둘러 독려하며 자신이 스스로 앞에 나섰다.
“공격하라! 저놈들부터 궤멸시킨다!”
배후에서 등장한 강이식의 기병을 향해 군을 돌려 돌격 명령을 내리고는 가장 선두에서 자신이 말을 달리니, 그 기세가 제법 용맹스러웠다.
하지만 도광에게 급습당해 패색이 짙던 주용의 말갈 기병들도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말머리를 돌린 북주와 돌궐 연합군의 뒤를 잡고 돌진하니, 요하의 물결이 요동치며 난전이 벌어졌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노한 도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오직 강이식만은 반드시 사로잡아 가리라 결심하고 크게 소리쳤다.
“이놈! 쇠몽둥이 고구려 놈아! 나와 백 합만 겨루어 보자!”
도광의 도발에 강이식이 빙긋 웃더니, 말 위에서 낭아봉을 땅에 푹 꽂아 세우고는 맨손으로 말을 몰아 나오며 빈정거렸다.
“하하하, 쇠장갑을 낀… 그 뭐라 하더라? 그래! 권왕! 권왕 도광이라 했던가? 어디 그래 서로 주먹다짐 좀 해 보자! 하하하.”
“뭐라? 이놈이!”
강이식을 도발하려던 도광이 도리어 흥분해 무작정 말을 몰아 나오며 쇠장갑 대신 창을 쥐고 휘둘렀다.
그러나 강이식은 창끝이 자신의 가슴 가까이 오자 몸을 살짝 틀어 창이 쑥 지나가게 한 후, 창 자루를 쥐고는 태산도 뽑을 듯한 완력으로 끌어당기니, 도광이 창을 놓치고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이때 강이식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도광의 목을 왼손에 쥐고는 번쩍 들어 올려 엉덩이가 하늘로 향하게 한 꼴로 자신의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는 창을 부러뜨려 몽둥이로 만들어 도광의 엉덩이를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못된 놈들은 원래 매가 약이라, 네놈도 볼기를 맞아야 하느니라!”
도광의 이 꼬락서니에 북주와 돌궐 기병들은 어이없고 기가 막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상장군! 괜찮소?”
강이식이 여전히 실신한 도광을 무릎에 싣고 말을 몰아 주용에게 다가가 물으니, 사지에서 살아난 주용이 감격해 반기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군!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덕분에… 아니, 이놈은 왜 여기? 하하하.”
* * *
요하에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서는 대모달 유여가 야수의 일격에 허무히 목이 잘려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개마무사 일만은 지휘관을 잃어 황망한 상황이었다.
야수는 냉혹히 두 자루 박도를 휘두르며 이 말에서 저 말로 날듯이 가볍게 몸을 옮기며 개마무사들의 목을 베었고, 이계찰의 북주 기병은 넓게 포위해 화살을 날렸다.
이때, 수레 방벽에서 꽃처럼 붉은 갑주에 하얀 망토를 두른 공손향이 백마 위에 올라 몸을 드러내고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고구려 놈들에게 불화살 맛 좀 보여줘라!”
그녀의 명이 떨이지기 무섭게 기름 먹인 솜을 매단 화살에 불을 붙여 날리니, 제아무리 화살을 튕겨 내는 철갑을 두른 개마무사라 하여도 갑옷에 불이 붙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개마무사의 갑주도 근접에서 날린 화살은 모두 튕겨 낼 수 없는데다, 불화살에 놀란 말들이 놀라 날뛰니, 순식간의 진영이 허물어졌다.
“서두르지 마라! 계속 살을 날려라!”
이계찰은 고구려군의 진영이 허물어졌음에도 서두르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화살을 당기라 명하였다.
“흩어지지 마라! 흩어지면 놈들이 돌격해 올 것이다! 기회는 온다! 진영을 유지해라!”
전사한 대모달 유여를 대신해 모달 흑비걸이 소리쳐 진영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이계찰이 이끄는 북주군의 빈틈을 찾아 돌파하기 위해 서둘러 주위를 살피었다.
모달 흑비걸은 왜소한 체격에 다리마저 절어 개마무사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속말갈을 물리치는 전투에서 적의 유인에 빠져 삼면이 포위된 유여의 개마무사를 구하기 위해 고작 궁기병 일백을 이끌고 퇴로를 마련한 공이 인정되어 개마무사가 되었다.
개마무사가 되고도 체력이 약한 그는 유일하게 전신에 철갑이 아닌 가죽 갑옷을 걸치고, 긴 환두대도와 커다란 단패(둥근 방패)를 들었는데, 단패 중앙에 치우 천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치우 흑비걸이라 불렸다.
“저놈! 저놈을 잡아라! 야수! 저 단패 든 놈을 잡아라!”
흑비걸이 개마무사를 지휘하자, 공손향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야수를 불러 흑비걸을 사로잡으라 명하였다.
이에 야수가 눈을 희번득 뜨고 두 자루 박도를 휘두르며 흑비걸에게 달려드니, 마치 굶주린 이리가 양을 노리는 듯했다.
쾅!
야수가 내리친 박도가 흑비걸의 단패에 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을 내었다.
흑비걸은 손이 저리다 못해 어깨마저 욱신거려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소리쳤다.
“퇴각 준비를 하라! 일시에 돌파할 것이다!”
자신과 맞서면서도 군을 지휘하는 흑비걸의 태도에 야수가 노해 이를 갈며 말하였다.
“네놈이 여유롭구나. 이것도 막아 보아라!”
두 자루의 박도를 동시에 휘둘러 흑비걸의 머리와 가슴을 노리니, 흑비걸이 단패와 환두대도로 겨우 막아 내며 또다시 명을 내렸다.
“일시에 퇴각한다. 정면을 뚫어라! 돌파!”
자신은 야수가 달라붙어 퇴각할 수 없음에도 내린 명령이었다.
이에 부장 둘이 흑비걸을 구하고자 말을 몰아 왔으나, 오히려 몸을 날리며 휘두른 야수의 박도에 그들의 머리가 땅에 굴렀다.
“나를 버리고 가라! 퇴각하라!”
흑비걸은 야수가 더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을 몰아 앞을 막고는 연이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이계찰이 명을 내려 뿔 나팔이 짧게 울리자, 개마무사를 에워싼 북주군이 길을 내주며 흩어졌다.
‘퇴각하란 뜻인가?’
흑비걸은 의아함을 느끼며 단패를 크게 휘둘러 간신히 야수를 떼어 내고는 개마무사들과 함께 열린 공간으로 말을 몰았다.
개마무사들이 돌파하는 순간 또다시 이계찰이 명을 내리니, 이번엔 뿔 나팔이 사방에서 길게 울리며 길을 내주었던 북주의 기병들이 개마무사들의 뒤를 잡아 활을 당기며 쫓았다.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다 하여도 개마무사들이 진영을 갖춘 돌격의 위력이 무시무시함을 잘 아는 이계찰이 경기병의 기동력을 백분 활용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지구력, 기동력, 원거리 공격에서 우월한 경기병이 뒤를 잡고 쫓으며 화살을 날릴 경우, 개마무사들은 간신히 요하를 건너도 요동 들판에 널브러지게 될 것은 당연하였다.
‘저놈의 수가 대단하구나.’
흑비걸이 침착히 군을 지휘하는 이계찰을 내심 칭찬하며 쉬지 않고 외쳤다.
“멈추지 마라!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가 오늘의 전투를 알려야 한다. 달려라!”
전투에서 이긴 과정도 중요하지만, 어찌 패하였는지도 중요한 법이라, 후일의 대책을 위해 살아 돌아가라 명한 것이다.
“우리도 저놈들의 뒤를 쫓는다. 말을 몰아라!”
공손향이 수레 방벽에서 외치며 말을 몰아 앞섰다.
그러자 그 뒤를 오천의 기병이 따랐고 야수도 두 다리로 들판을 질주하며 개마무사들의 뒤를 맹렬히 쫓았다.
요하 근처에 다다르자, 개마무사들의 앞 언덕에서 삼족오 기가 휘날리며 솟아오르더니, 강이식이 이끄는 기병들이 언덕 위에 올라 멀리 몰려오는 북주 기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대장군!”
흑비걸이 감격해 소리치자, 낭아봉을 쥔 강이식이 껄껄껄 웃으며 반겼다.
“흑비걸 고생했다. 함께 살아 돌아가자꾸나. 하하하.”
매사 빈틈없고 침착한 이계찰은 강이식이 기병을 끌고 나타나 화살을 날리니, 또다시 명을 내렸다.
이계찰의 지시에 사방에서 뿔 나팔이 울리고, 북주 기병들이 넓게 산개하여 고구려군이 날린 화살을 회피하고는 공손향이 이끈 군사와 합세하여 화살을 날리며 맞섰다.
이 와중에도 뿔 나팔 소리는 계속 울리고 점점 더 거세져 갔다.
넓게 퍼져 전투를 벌이는 기병 전술에서 이 뿔 나팔은 군을 몰고 퍼지게 하며, 패퇴한 아군도 불러들이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이미 요하에서 도망쳤던 도광의 기병들이 이 뿔나팔 소리에 호응해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저놈,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흑비걸이 강이식에게 이계찰을 가리키며 말하자, 강이식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는 빠르게 명을 내렸다.
“퇴각한다. 개마무사를 선두에 두어라!”
기동력이 약한 개마무사를 호위해 후퇴를 명하니, 일시에 진영이 갖춰져 후퇴가 이루어졌다.
결국, 영주에서의 보급을 끊는 것은 실패하였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나, 개마무사 팔천여 기는 보전할 수 있었다.
“야수 그만 쫓거라! 우린 수레를 호위해 주군께 갈 것이다.”
공손향이 고구려군의 뒤를 쫓는 야수를 불러 세우고는 요하를 넘어 말 달리는 고구려군의 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저놈들은 함부로 보급을 끊고자 못할 것이다. 그것으로 된 것이야.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그녀의 말대로 고구려군은 이 전투로 주용의 말갈 기병 육천을 잃고, 개마무사 이천도 잃었으며, 적에게 보급로마저 내어주었다.
그러니 오부의 귀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상장군 주용을 처벌하고 막리지 연태조를 문책하라 소리 높였다.
“아니 될 소리요!”
이때 조의두대형 동금호가 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며 두 눈을 치켜뜨고 소리치니,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폐하, 전장에서 승패는 수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한 번의 패배로 장수의 목을 친다면 어찌 누가 앞서 싸우겠나이까?”
“…….”
“적도 이계찰의 과오를 덮고 다시 군을 이끌게 하여 승리를 얻은바, 우리가 상장군 주용을 벌한다면 이는 적이 바라는 것으로 우리 고구려를 비웃을 줄로 아뢰나이다.”
“하면, 그대는 상장군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는 말이오?”
태왕의 이 물음 속엔 주용의 말갈 기병이 고작 사천여 기밖에 남지 않았음을 되물은 것으로 이 물음에 동금호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급히 막사로 들어서며 허리 숙여 예를 갖추고 아뢰었다.
“폐하, 신 을지문덕, 총관부의 정병을 이끌고 수일 내로 적의 보급을 끊겠나이다.”
을지문덕이 봉황의 눈으로 자신 있게 아뢰니, 태왕이 지그시 내려다보며 물었다.
“적이 대비할 것인데 수가 있는가?”
“있사옵니다. 이번 보급으로 적은 당장 보급이 필요치 않을 것이나, 열흘 뒤엔 또다시 보급이 필요한 바, 그때 대장군이 적의 본진 앞에서 도발하고, 소장이 북으로 군을 끌며, 상장군이 말갈 기병을 이끌고 남으로 군을 끌어 두 갈래로 진격한다면 적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계책은 분명 대실호연에게도 전해져 우문도웅도 곧 알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을지문덕은 차분하면서도 소상히 계책을 설명하였다.
‘칠일… 칠일 뒤에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우리 진영을 공격할 것이고, 대실호연이 성 안으로 북주군을 끌어들일 것이다.’
사실, 을지문덕의 심중에는 열흘 뒤 적의 보급로를 끊는 일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