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일진일퇴(一進一退) (3)
을지문덕의 서찰을 읽자마자 강이식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 사두수에게 기병 오천 기를 준비시키고는 말에 오르며 당부를 남겼다.
“너는 여기 남아 몰래 막리지께 내가 군을 끌고 나간 사실을 전하고, 다른 이들이 묻거든 북쪽으로 정찰을 나갔다 하거라.”
더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기병이 준비되자 유여와 주용을 구하기 위해 바로 남서 방향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대실호연 그 인간…….”
한바탕 욕을 하고 싶어도 뒤따르는 군사들이 들을까 우려스러워 반쯤 입안에 삭여야 했다.
유여와 주용이 떠난 지 이 각이 한참 지난 뒤였기에, 달리면 달릴수록 강이식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멀리 사라져 가는 흙먼지를 바라보며 조의두대형 동금호가 서두수에게 다가와 의아해 물었다.
“대장군은 어디를 저리 서둘러 가는 것이오?”
“북쪽으로 정찰을 나간다 하셨습니다.”
“아니, 정찰 가는데, 저리 많은 병사를 이끌고 나간단 말이오? 더구나 저긴 남서 방면 아니오?”
동금호가 놀라 되물으니, 융통성 없는 사두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 *
이미 대실호연이 날린 전서구가 도착해 유여가 개마무사 일만으로 영주에서 오는 보급부대를 급습하고, 주용이 남서 방면 경계를 흩트려 놓을 것이란 사실을 접한 유역비는 빠르게 이계찰과 도광에게 대비토록 전하였다.
“저기 지나는군.”
넓은 요동벌에 낮게 솟은 구릉 뒤에 기병을 감춘 채 도광은 유여가 이끄는 개마무사들이 요하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주용의 기병도 나타날 것인데…….”
유여의 개마무사를 통과시킨 후 지원 역활을 맡은 주용의 경기병을 기다리니, 동북 방향에서 흙먼지가 일며 다가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보통의 경우, 고구려 기병 전술은 개마무사가 앞장서며 화살 공격을 막아내고, 그 뒤를 경기병이 따르다가 옆으로 빠져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전술과 기동력 좋은 경기병이 활을 날리며 적을 교란한다.
그때, 개마무사가 중앙을 급습하는 두 가지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처럼 멀리 거리를 두고 각기 작전을 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는 개마무사가 적의 눈을 피해 급히 요하를 건너는 동안 경기병이 요동벌에서 적을 교란케 하며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적이 대비하지 않았다면 성공할 계책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실호연에 의해 모든 전술이 알려졌으니, 유여와 주용의 군은 스스로 사지에 뛰어든 형국이었다.
도광이 주용의 경기병들을 지켜보니, 남서 방면에서 다시 동북 방면으로 올라가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넓게 펼친 진영의 측면을 급습한 후 기병을 유인하며 퇴각할 듯해 보였다.
“우리가 몰랐다면야 진영의 측면을 저들이 급습한 후 퇴각하면, 황망히 그 뒤를 쫓으며 요동벌을 한참 내달렸겠지. 그동안 우리의 보급부대는 개마무사들의 공격을 받았을 터이고, 허나 지금은 네놈들이 혼쭐 날 차례다.”
도광의 중얼거림대로 주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급습하려던 계획은 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주용이 도광의 군사가 매복한 언덕을 조금 지나 방향을 동북으로 돌리며 속도를 내었다.
그런데 도광의 군에게 정확히 등을 돌린 채 내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지금이다. 적의 뒤를 친다!”
도광이 외치자, 돌궐 기병 일만이 함성을 지르며 언덕 위에서 말 달려 내려왔다.
그들은 일제히 활을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살을 날리고 날려라!”
도광의 외침과 함께 일만 발의 화살이 일제히 하늘을 뒤덮으며 날으니,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비처럼 쏟아져, 주용의 말갈 기병들이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말을 달려라! 사정거리를 벗어나야 한다!”
주용이 크게 소리쳐 쏟아지는 화살비 속을 벗어나려 하였으나, 이미 여기저기서 말갈 기병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상에서 몸을 돌려 활을 당기며 응사할 겨를도 없이 주용의 말갈 기병들이 화살비를 피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갈 무렵, 전방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일더니 북주 기병들이 나타나 활을 당기며 돌격해 왔다.
아마도 북주 진영에서 대기하던 기병들이 말갈 기병을 발견하여 급히 말을 몰아 공격해 온 듯했다.
몸을 가려 화살을 피할 곳 하나 없는 요동벌에서 주용의 말갈 기병들은 앞뒤로 적을 맞이한 형국으로, 서쪽으로 방형을 틀어 요하를 건너든 동으로 방향을 틀어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가든, 이 두 가지 길 이외에 달리 수가 없어 보였다.
“장군, 제가 기병 반을 끌고 앞에서 오는 것들을 막을 터이니, 장군께선 진영으로 귀환하십시오.”
부장 화진이 주용의 안위를 걱정해 의견을 내었다.
화진은 말갈 부족장 출신으로 적대관계의 속말갈을 고구려와 함께 물리친 후, 속말갈의 부족장 돌지계(突地稽)가 수나라로 투항하자, 말갈 기병을 이끌고 주용의 휘하에 들어가 지금껏 함께 해왔다.
“아니다. 우리의 작전이 적에게 노출된 이상, 유여 장군의 개마무사들이 위급해졌다. 우리는 포위를 뚫고 요하를 건너 유여 장군과 개마무사를 구해야 한다.”
화살비 속에서 주용이 사지로 깊숙이 더 들어갈 것을 결심하자, 화진도 결심을 굳히며 명을 내렸다.
“응사하며 달려라! 우린 요하를 건널 것이다!”
죽을 길이었으나, 고구려군에게 있어 개마무사란 승리의 상징이면서도 반드시 보전해야 할 자산이었다.
경기병과 달리 개마무사 한 기를 마련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함을 잘 아는 상장군 주용으로선 일만의 개마무사가 몰살당하게 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단 한 기라도 살려야 한다. 개마무사가 없다면 대회전에서 적진을 타격할 수단 하나가 사라진다.”
주용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화진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화진은 이미 개의치 않고 있었다.
“모두 배사하며 달려라! 사정거리는 우리가 우위다. 거리를 벌려라!”
화진이 말갈 기병을 독려하며 서로 방향을 틀었으나, 여전히 하늘에선 돌궐 기병이 날린 화살이 비가 되어 말갈 기병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유여가 개마무사를 이끌고 요하를 바삐 건너니, 곧바로 백여 개의 수레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때를 정확히 맞추었구나. 돌격하라! 보병뿐이다! 수레는 불태우고 보병은 짓밟아라!”
대모달 유여의 명에 일만의 개마무사가 삭(기병창)을 쥐고 내달리기 시작하니, 천지가 진동하고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단숨에 적을 짓이길 듯 말들도 흥분해 거친 울음을 내며 달려 들어가니, 그 기세가 태산도 뒤집을 듯 용맹하였다.
그러나 적에게 다가갈수록 백여 개의 수레가 멈춰 서 있는 형상이 마치 방벽을 두른 듯 나름의 진을 치고 있어 보였다.
‘원래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인가?’
수레에 극(기병 상대용 창)을 꼽고 그 뒤에 보병들이 구겸창(기병 상대용 이중 낫처럼 생긴 창)을 쥐고 있었는데, 이처럼 준비를 하기 위해선 미리 대비할 시간이 필요함은 당연하였다.
불길함에 유여가 이렇듯 급히 생각을 정리하며 방비하란 명을 내리려 할 때.
조금 전 건너온 요하에서 이계찰이 기병을 이끌고 나타나더니 먼저 소리쳐 명을 내렸다.
“살을 날려라! 우리는 놈들과 거리를 벌리고 싸운다.”
앞에는 커다란 가마니를 높이 쌓은 수레에 극을 박아 방벽을 세우고, 뒤에는 돌궐 기병이 넓게 펼쳐 화살을 날리니, 앞뒤가 꽉 막힌 유여의 개마무사는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할 상황이었다.
무거운 갑주를 걸친 개마무사에 비해 돌궐 기병이 기동력에서 앞서고, 지구력마저 우월함은 자명하여, 추격을 피해 요하를 넘을 방법도 전무하였다.
“돌격하라! 목표가 저기 있다! 적의 수레를 박살내고 불 지르기 위해 왔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유여가 끝내 사지로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저승사자도 두렵지 않은 용맹한 개마무사들은 망설임 없이 전방 수레를 향해 돌진해 갔다.
그때, 더벅머리 사내가 새처럼 수레를 휙 뛰어넘으며 두 자루 박도를 양손에 쥐고 날듯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유여가 삭으로 더벅머리 사내를 찌르려 하자, 가볍게 몸을 솟구친 사내가 유여의 삭을 허공에서 사뿐히 밟고는 탄력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날려 박도를 휘둘렀다.
데구루루—
몸에서 떨어진 유여의 머리가 땅을 굴렀고, 더벅머리 사내의 몸이 또 한 번 허공에 솟구쳤다.
“내가 돌궐 제일 무사 야수다! 내 앞에서 고구려 놈들은 살기를 바라지 말거라!”
야수의 외침이 벼락처럼 개마무사들의 머리를 내리쳐 오더니, 또 한 번 머리 잃은 개마무사가 허무히 말을 달리다가 말 위에서 털썩 떨어졌다.
* * *
“속도를 늦추지 마라! 달려라!”
멀리 전방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강이식이 급히 명을 내리며 앞서 말을 몰아나가니, 오천의 기병이 전력을 다하여 그 뒤를 따랐다.
상장군 주용이 이끈 말갈 기병의 수는 어느덧 오천여 기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요하 가까이 당도하였으나, 뒤를 쫓는 돌궐과 북주의 기병은 그들을 쉬이 놓아줄 의사가 없었다.
“활을 당겨라! 계속 적의 수를 줄이며 요하를 넘게 하라!”
도광은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돌궐과 북주의 기병을 지휘하였다.
그는 지난번 강이식에게 당한 수모를 되갚아 줄 수 있다는 생각에도 애써 서두르지 않았다.
이는 마치 사냥 대회에서 노루와 사슴 무리를 모는 형국이라, 과연 검왕 도광도 허투루 볼 장수는 아니었다.
“놈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면 뒤를 잡아 돌격한다!”
도광의 명령에 돌궐 기병이 넓게 산개해 말갈 기병의 뒤를 추격하니, 요하 너머엔 수레 방벽과 이계찰이 이끈 돌궐 기병에게 개마무사들이 포위되었다.
또한 주용의 말갈 기병 역시 요하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위급 지경이 되었다.
“멈추지 말고 강을 건너라! 뒤를 잡혀선 안 된다.”
그렇다 하여 이제 와 말을 돌릴 처지도 못 되는 주용이 일전을 각오하고 요하를 건너라 명을 내렸다.
“빠르게 강을 건너라! 개마무사를 구해야 한다!”
말갈 출신 화진이 주용의 마음을 헤아려 개마무사를 구하자 독려하였다.
빠른 속도로 말갈 기병들이 강으로 말을 몰아 달려 나가자, 도광이 쾌재를 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돌진! 돌진하라! 놈들의 뒤를 잡는다!”
기동력이 좋은 말갈 기병이라 하여도 강을 건너는 도중엔 방비가 약해지고 속도가 느려지기에 이를 노린 것이다.
“배사! 맞서지 말고 활을 당기며 강을 건넌다!”
화진의 명에 말갈 기병들이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마상에서 몸만 돌려 활을 당기는데, 평지와 달리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강물에 시신을 두둥실 떠내려 보내주마. 활을 당겨라!”
돌궐과 북주의 기병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말갈 기병보다 활의 성능이 뒤처졌으나, 기사 능력은 뛰어나 급히 강물로 뛰어들지 않고 사정거리를 유지한 채 활을 당겼다.
아마도 이계찰의 기병이 앞에 있음을 알고 말갈 기병을 몰아가려는 계책이리라.
그때, 커다란 함성이 도광의 기병 뒤에서 일더니, 강이식이 선두로 말을 몰아 내달려오며 거침없이 낭아봉을 휘둘렀다.
“이놈들아! 이 꼴은 바로 네놈들이 포위된 형국 아니더냐!”
주용의 말갈 기병이 위급한 상황임에도 강이식이 호기롭게 외치니, 불현듯 돌궐과 북주의 기병 머릿속에 바로 이 요하에서 자신들이 매복 당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매복이었다!”
“우리가 고구려군의 계책에 속은 것이다.”
“검귀다! 야차다! 강이식이 왔다!”
도광이 이끈 기병은 주용의 말갈 기병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 분명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수적으로도 우위였으며, 요하 너머에도 이계찰의 돌궐 기병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강이식의 등장은 상당한 위압감과 두려움을 안겨 줘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와하하. 오냐! 내가 바로 고구려의 병마도원수 대장군 검귀 강이식이다! 와하하.”
강이식의 호쾌한 웃음에 주용의 말갈 기병도 전의를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