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일진일퇴(一進一退) (2)
하얀색 전서구가 요동성 가까이 날아오니, 그보다 높은 하늘 위에서 매섭게 지켜보던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급강하를 시작했다.
본래 해동청은 삼한에서 사냥에 널리 활용하는 매를 일컫는 말로, 산에서 자란 보라매를 잡아 기르며 가르치면 산진이, 어릴 때부터 사람 손에 자라며 가르친 것은 수진이라 불렀다.
산진이든 수진이든 오늘 이 해동청의 사냥감은 유역비가 대실호연에게 날린 전서구임은 분명했다.
쉐애액—
날카로운 매의 울음에 전서구가 놀라 퍼드덕 날개짓을 부지런히 하며 방향을 틀어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해동청의 억센 발가락이 쫙 펴지더니 갈고리처럼 전서구의 몸뚱이를 움켜쥐고는 다시 상승하여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요동성 상공에서 날개를 접고는 일직선으로 급강하 하여 서부총관부 으슥한 별채로 날아들은 후, 날개를 펼쳐 허공에 멈추듯 잠시 머물다가 해권이 내민 손등 위에 살포시 앉았다.
“산진아, 잘했구나.”
해권이 해동청의 조그만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잡혀 온 전서구의 발목에 매인 종이를 펼쳐 읽었다.
전서구는 여전히 해동청에게 잡힌 상태였으나, 조금도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놈들이…….”
해권이 낮게 중얼거린 후 종이를 곱게 접어 전서구 발목에 다시 묶고는 해동청의 발가락을 펼쳐 날려 주었다.
해동청에게 잡히기 전, 전서구가 목적한 곳이 대실호연의 관저일 터였으니, 사지에서 벗어난 후 찾아갈 곳도 그곳이리라.
“총관께선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는가?”
어두운 표정으로 해권이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어득구가 답하였다.
“조금 전 선예와 함께 성벽을 넘으셨다 합니다. 주위 눈을 피하느라 조금 걸리실 듯하나 곧 오시겠지요.”
어득구의 말 대로 일각이 지나지 않아 을지문덕이 별채에 당도하였고, 해권은 그동안 대실호연과 유역비에게서 오고 갔던 내용을 아뢰었다.
가만히 듣던 을지문덕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긴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허허, 이런. 금산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보급부대와 공성병기를 옮기는 공성부대만 후발대로 오는 것이 아닌, 철륵에서 철륵부 열다섯 부족의 군사 사십만을 차출해 아파가한과 탐한가한까지 오는구나.”
“…….”
“이놈들이 정녕 우리 고구려와 요동을 두고 건곤일척(乾坤一擲) 자융을 겨루고자 하는구나.”
이때, 없는 듯 조용히 자리하던 고무가 입을 열었다.
“아파가한과 탐한가한이라면 비록 돌궐에 복속되어 충성을 바친다 하여도 명실상부 철륵 열다섯 부족을 대표하는 일대의 영웅들 아니오. 그들까지 온다면 이 전쟁 과연 우리 고구려가 감당할 수 있겠소?”
“감당하지 않으면 요동을 내어주리까?”
고강의 곁에 자리한 고성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무를 나무라고는 을지문덕에게 단호한 태도로 말하였다.
“총관이 명한 대로 신성에 기병 이만과 노궁수, 중장보병 사만을 준비하였소. 언제든 적을 몰아칠 기세가 드높으니, 시기만 알려주시오!”
고무와 고강, 고성 형제는 간적 누명을 쓰고 서부총관부에 추포된 후 을지문덕의 도움으로 몰래 풀려나 태왕의 사냥터가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신성에 자신들의 사병을 수개월에 걸쳐 주위 눈을 피해 따로 집결시켜 놓았었다.
“성이는 조용히 총관의 이야기를 들어라.”
고강이 성미 급한 아우 고성을 나무라고는 을지문덕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그의 강직한 시선은 을지문덕에게 반드시 수를 내어 고구려를 구하라 말하는 듯했다.
“꽃은 제가 피고자 하는 시기와 원하는 곳을 뜻대로 정할 수 없으나, 사람의 전쟁은 다르지요. 온달이 정확한 시기에 영주만 취해 금산에서의 보급만 끊어 준다면 이 전쟁은 요동이 아닌 요하 너머 요서에서 승패를 겨루게 될 것입니다.”
“…….”
“칼에 죽나 굶어 죽나 매한가지라, 전쟁은 보급을 끊는 것이 항상 승패의 관건이 되었지요.”
을지문덕이 이렇듯 말할 때, 어득구가 또다시 해동청을 들고 들어오는데, 여지없이 전서구가 해동청의 억센 발에 잡혀 있었다.
“대실호연이 날린 것이더냐?”
을지문덕의 물음에 어득구가 그렇다 답했다.
을지문덕은 바로 전서구의 발목에 매인 서찰을 풀어 읽고는 눈살을 찌푸린 후 다시 매어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아마도 유역비에게 가리라.
“뭐가 쓰여 있었소?”
고성이 을지문덕을 재촉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대꾸도 없이 바삐 서찰 하나를 작성해 해권에게 건네며 명하였다.
“즉시, 전서구에 달아 강이식 대장군에게 날리거라. 한시가 급하다.”
해권이 서찰을 들고 나가자, 을지문덕이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차분히 말하였다.
“대실호연이 적에게 보낸 서찰이온데, 우리 군이 영주에서 보내오는 적의 보급을 급습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기에, 강이식 대장군에게 연태조에게만 알린 채 군을 이끌고 나가라 적었습니다.”
“아니, 그런! 대실호연 그자가 전략을 모두 알리면 우리의 피해가 클 것인데, 어찌 전서구를 그대로 보낸 것이오? 내용이라도 수정하든가 해야지. 그리고 연태조 그자를 믿는 게요?”
고성이 책망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여전히 차분하였다.
“연태조는 야심이 많은 사내지만, 결코 고구려를 배신할 인물은 아니기에 이 전쟁에서 필요합니다. 서찰에 관한 것은, 그 내용을 추가하거나 변경할 시 필체가 다름을 적이 알게 된다면 큰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
“또한, 전서구를 날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서찰에 한 가지 내용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라면 무엇이오?”
고무가 을지문덕의 다음 말을 재촉하니, 을지문덕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답하였다.
“칠 일 뒤,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우리 고구려군의 진영을 공격한다면, 대실호연 자신은 요동성에 북주의 기를 내걸어 요동성이 함락되었음을 알려 요동벌에 진을 친 고구려군을 혼란케 하며 보급을 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을지문덕의 이 말에 모두가 놀라 크게 당황하였다.
요동성은 성벽 주위로 해자를 깊게 파고, 십만 정병의 일 년 치 식량을 비축한 곳으로 그 어느 요동의 성보다 외부의 공격에 방비가 잘 되었다.
그렇기에 대실호연이 성을 장악한다면 요동벌에 진을 친 고구려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 싸우는 형국이 될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큰일 아니오? 우리는 신성에 군을 모아두었는데, 대실호연이 요동성을 장악한 후 적을 안으로 끌어들인다면 어찌 대적하겠소?”
고성이 전서구를 날려 보낸 을지문덕을 당장 잡아먹을 듯 책망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여전히 태연하였다.
“대실호연이 적을 끌어들이려 하는 순간, 그의 머리는 돼지우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시기까지 아는데 당할 리 있겠습니까?”
을지문덕이 되물으니, 성미 급한 고성도 수긍하여 더는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 * *
정찰을 떠났던 쇼락이 급히 행렬로 돌아와 온달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온달 장군, 진군 속도를 늦추셔야겠습니다.”
적봉진에 이백여 명만 남기고 개마무사 포함 기병 이천오백 기와 카사르가 일만사천의 부족 전사를 이끌고 출진한 이 행렬의 선두는 온달과 카사르가 지켰다.
반나절 거리를 두고 양 떼와 천막을 실은 올루스 행렬은 건무가 커레이트의 족장 호타크와 함께 지켰는데, 여인과 노인, 어린아이들의 올루스 행렬 속에 평강이 온동과 독고영을 보살피며 뒤따랐다.
온달의 군대는 카사르의 올루스(나라, 백송)까지 함께 이동한 덕에 보급물자 수송 걱정은 전혀 없었는데, 이는 북방 초원의 민족 특유의 전투 방식이었다.
카사르는 겨울을 나며 어느새 천부장 열넷을 거느리게 되었고, 바이골에서 쇼락의 연락을 받은 호타크가 온달과 카사르에게 평화를 얻고 동맹을 맺고자 부족 전사 삼천을 이끌고 합류하여 고구려와 초원의 민족 연합군의 수는 어느덧 이만에 가까웠다.
“쇼락, 어찌 진군 속도를 늦추라 하는 게요?”
온달이 물으니, 경우가 바로 통역하였다.
“영주로 가는 길은 철륵의 기병 십오만이 지나고 있는데, 알아본 바로는 탐한가한이 이끌고 있다 합니다.”
“뭣이라? 탐한가한이 철륵의 기병 십오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고 있다 하였소?”
쇼락의 이 말에 독고선이 놀라 물으니, 쇼락은 자신이 정찰한 내용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탐한가한이 이끈 십오만 기병은 이미 하루 전에 영주로 향하는 저 길을 지났고, 우리가 진군 속도를 늦추지 않을 시 필경 저들의 후미와 맞닿을 수밖에 없소.”
“어허, 어찌 이런 일이… 을지 공의 서찰엔 분명 적이 금산에서 보급부대와 공성병기를 끌고 후발대가 지날 거라 하였건만, 일이 잘못된 게야. 부총관, 어서 서둘러 적의 뒤를 쫓아 급습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해진이 주름진 이마에 근심을 가득 담아 말하니, 독고선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기병 십오만 기만 지나갔다면 분명 보급 부대는 이틀거리를 두고 따를 것이며, 공성병기를 끄는 후발대는 그보다 훨씬 뒤에서 진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음…….”
“우리는 이곳에 머물며 보급부대를 급습하고 공성병기를 불태운 후, 적의 뒤를 쫓음이 옳다 판단합니다.”
철륵에서 먼저 차출한 기병 십오만을 탐한가한이 이끌고 전진하며, 혹시 모를 고구려군의 전방 매복을 대비하고자 보급부대를 뒤에 배치하였고, 그보다 뒤에 공성병기를 끌고 진군케 한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경우 공성병기를 전장에서 조립하여 사용한데 비해, 기술력이 부족한 돌궐은 멀리 철륵에서부터 조립하여 끌고 오기에 진군 속도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온달이 독고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고, 기병 십오만의 뒤는 언제든 뒤쫓아 달리면 따라잡을 수 있을 듯하여 명을 내렸다.
“우린 이곳에 머물며 올루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이오. 반나절 정도면 될 듯하니, 총관을 뵙고 논합시다.”
이미 마음은 이곳에서 적의 보급부대를 기다려 급습하기로 정하였으나, 상관인 총관 건무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다.
반나절이 못 되어 건무가 올루스를 호위하며 도착하니, 빠르게 작전 회의가 열렸다.
독고선이 쇼락의 정찰 내용을 설명하자, 평강이 먼저 의견을 내었다.
“이곳에서 적의 보급을 급습하자는 의견은 옳습니다만, 모두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군을 나누자는 말이오?”
온달이 물으니, 평강이 나뭇가지를 주어 바닥에 그리며 말하였다.
“적의 기병 십오만이 향할 곳은 이 요하일 것이고, 여기쯤이 영주겠지요. 그리고 여기가 현재 우리의 위치이니, 총관과 올루스는 이대로 영주로 천천히 진군하고 부총관께서 이곳에서 적의 보급을 끊으신 후 속히 영주로 와 주십시오.”
“음…….”
“우리는 적이 요하를 넘는 것을 본 후 바로 영주를 포위하겠습니다. 적이 영주가 위급하다 생각하여 원군을 보내오기 전까지만 돌아와 주십시오. 아마도 우리가 영주를 포위한 후 하루 이상 지나야 적이 구원군을 보낼 터이니 여유는 있습니다.”
평강의 이 제안에 건무가 망설이며 물었다.
“누이의 안이 좋아 보이나, 십오만이 넘는 적의 기병이 요하를 건너면 요동이 위험하지 않겠나?”
한 살 위 오라버니, 건무를 평강이 깍듯이 대하며 화답하였다.
“총관의 근심은 당연하옵니다. 요동에 우리 고구려군이 위험해지나, 십오만이 더해지는 순간 적도 위급해질 것입니다.”
“어찌 그런가?”
평강이 말하고자 함을 건무가 깨닫지 못하고 재차 물으니, 평강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수가 늘면 식량 소비도 늘어 비축분이 곧 바닥을 보일 터라, 굶으면 정예병도 말을 듣지 않는 법입니다.”
평강의 이 말에 막바우가 크게 동해 맞장구쳤다.
“공주님 말씀이 모두 백 번 천 번 옳습니다! 한두 끼 굶고는 싸워도, 며칠 굶으면 전장에 끌려온 것도 서러운데 누가 말을 듣겠습니까.”
막바우마저 이해할 전술이니 다른 이들로서는 이견이 없었다.
“부총관, 보급부대만 급습하고 뒤에 올 공성병기를 수송하는 후발대는 놔두고 오십시오.”
평강이 온달에게 한 가지 더 당부를 하니, 온달은 그 의미를 이해 못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이들은 아직 철륵에서 아파가한이 사발략가한의 명을 따르기 위해 군사를 더 차출하고 있음을 알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