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일진일퇴(一進一退) (1)
어찌 되었든, 돌궐과 북주 연합군은 거란의 세력권에 자리한 수의 영주총관부를 수중에 넣고, 요하마저 넘어 요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침공의 기반은 물론이요.
영주를 발판으로 수나라의 동북 방면을 공략하여 예로부터 연의 고토인 탁현에서 낙양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에, 요하를 넘기 위해 기병 이만을 잃었으나, 나름의 성과는 분명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는 요하를 건너긴 하였으나, 북주의 상장군 선우정기를 비롯하여 장수 십여 명을 잃었고, 기병 일만 오천을 잃었습니다. 전날 오천 기병을 잃은 것까지 합하면 도합 이만 기병을 잃어 현재 병력은 기병 십삼만여 기이옵니다.”
요하를 넘어온 북주와 돌궐 연합군은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오리쯤 떨어져 목책을 세우며 진을 치기 시작했고, 유역비는 여러 장수들이 모인 가운데 사발략가한과 우문도웅에게 연합군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대로 우문도웅의 북주군은 사만오천, 사발략가한의 돌궐군은 팔만 오천여 명이 남아 도합 기병 십삼만 기였다.
“요하가 이다지도 넘기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사발략가한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니, 유역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피해는 컸으나, 요하를 건넌 이상 이미 승리는 우리의 것이옵니다. 이곳 요동벌에 진영을 단단히 구축하고 대회전을 대비하며 공성병기를 마련한 후발대와 보급부대를 기다리면…….”
“기다리면?”
“그럼 곧 철륵에서 아파가한과 탐한가한이 철륵부의 열다섯 부족에서 군사 사십만을 차출해 이끌고 올 터이니, 고구려가 아무리 잔재주를 부린들 우리를 당해 낼 재간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흠…….”
“더구나, 요동성 성주 대실호연에게 제가 연통을 넣어 요동성 십리 밖에 진을 친 고구려군에게 보급을 대지 말라 요청한다면 고구려군은 시일이 흐를수록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사발략가한과 우문도웅이 유역비의 말을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할 때, 유역비가 한 가지 더 의견을 내었다.
“철륵부에서 보급부대가 당도하려면 시일이 걸릴 터이니, 일단 영주에 연통을 넣어 공손향님께 물자를 보내라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
“우리가 아직 십삼만이 넘는 대군이라, 하루하루 소비되는 식량과 화살이 만만치 않기에, 영주에서 조금이나마 보급을 받아야 여유롭게 후발대와 아파가한의 지원군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원정군이 대비하기 전 기병으로 속히 요하를 넘기 위해 서두르느라, 공성병기와 보급부대는 물론이요.
철륵부의 열다섯 부족에게 명한 군사 또한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역비의 말대로 이들이 속속 도착한다면 요동 정벌은 무척 순조로울 듯했다.
“유역비 그대의 말이 옳다. 내가 전서구를 날려 영주총관의 공손향과 야수에게 보급을 명할 터이니, 그대는 요동성 대실호연에게 전서구를 날려 어찌 정보가 틀렸는지 책임을 묻고 다음 계책을 논하게나.”
우문도웅이 유역비에게 명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발략가한은 금일 퇴각 명령을 내리고 먼저 도망친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을 노려보고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일 아침엔 이계찰 저 못난 놈을 따로 불러 엄히 꾸짖어야야겠구나.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새벽에 서둘러 강을 건너자던 이계찰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쉽구나. 이제 와 이계찰의 판단이 옳고 유역비의 계책이 틀렸다 문책한들 전장에서 당장 쓸 만한 책사 하나 잃는 것이니, 일단 두고 봐야겠구나.’
회의 내내 이계찰은 언덕 아래 너머에서 꽁꽁 묶인 채 발견된 검왕 도광과 함께 잔뜩 풀이 죽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사발략가한은 본래 성정이 다혈질이지만, 앞뒤 구분 못 할 정도로 지혜가 부족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이제나마 침착히 생각을 정리하며 누구의 죄도 묻지 않은 것이다.
“가한, 소장 이계찰 전군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만부장으로 영주에서 보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호위하겠나이다.”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이계찰이 난데없이 허울뿐인 전군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영주에서 올 보급부대의 호위를 자청하니, 우문도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계찰 장군 그대는 영주와 우리 진영까지의 길에 위험 요소가 있다 생각하는 게요?”
돌궐과 북주의 수장을 모시고 전쟁을 치르는 전군 총사령관직은 누가 봐도 옥상옥이라, 직을 내려놓고자 함은 당연하다 생각하여 우문도웅도 이계찰이 만부장으로 돌아가고자 함은 캐묻지 않고 공손향의 보급부대 호위 자청만 물은 것이다.
이계찰이 어렵게 입을 열어 답하려 할 때, 사발략가한이 퉁퉁 부은 입술로 거칠게 물었다.
“고구려군은 모두 우리의 앞에 있는데, 어찌하여 뒤에서 올 수송을 걱정하는 게냐? 쉬고 싶은 것이더냐?”
“가한, 그런 것은 아니오며… 전장의 상식으로 생각하건대, 고구려군의 입장에서 견지하자면, 멀리 원정 온 우리의 보급을 끊으려 함은 당연한 이치이옵니다.”
“아니, 이놈아! 상식, 그걸 누가 모르냐? 하지만 고구려가 아무리 우리의 보급을 끊으려 해도 우리가 앞을 막고 있는데, 고구려군이 어찌 우리 뒤의 보급을 끊을 수 있겠느냐! 넌 너무 겁이 많아. 하여간 쯧쯧.”
사발략가한이 못마땅해 하며 혀를 차니, 이계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의견을 내었다.
“가한께서 제게 겁이 많고 걱정도 많다 하시는 그 말씀은 옳습니다. 허나, 군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위험 요소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기에, 요하를 건너는 시기를 두고 저는 가장 피해 없을 안을 올렸었습니다.”
“그래서?”
“또한 강이식의 뒤를 쫓던 중 말갈 기병의 매복을 인지하여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대적하기 위하여 군을 재정비하라 명을 내린 것이 온 바, 제 근심과 걱정대로 모든 순서를 밟았다면 지금보다 더 큰 전과를 얻었으리라, 감히 조심스레 아뢰옵니다.”
이계찰의 말속에 은근히 제 의견을 따르지 않은 사발략가한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사발략가한이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듯 노려보니, 이계찰은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눈치를 실실 보며 제 할 말을 겨우 이었다.
“무, 물론, 전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서 먼저 말 머리를 돌리고 이만 기병을 잃은 책임은 돈수백배로도 부족하기에, 소장이 영주에서 당도할 보급을 호위하여 조금이나마 죄를 덜고자 청하는 바이옵니다.”
“좋다! 이후 전군 지휘는 내가 할 터이니, 너는 기병 일만으로 영주와 이곳까지의 경계를 서고, 권왕 도광도 기병 일만으로 남서 방향 경계를 서서 고구려가 뒤로 돌아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지 못하게 하라. 실수가 있어선 안 되느니라.”
사발략가한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일대의 영웅인지라, 거친 성격이지만 옳고 그름은 따질 수 있어 이계찰과 도광에게 엄히 경계를 명하였다.
이계찰이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받으니, 유역비도 내심 사발략가한의 이 결정이 옳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찰은 상당한 전략가고 사발략가한도 거칠지만 어리석지는 않구나. 주군께서 요동을 차지한 뒤에도 저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수를 공략함이 대업을 이루는 순서겠구나.’
본래, 우문도웅과 유역비의 목적은 요동이 아닌 북주의 재건으로 고토 회복을 위하여 수와의 전쟁은 필연이었다.
* * *
밤이 깊어 을지문덕이 강이식의 막사에 주위 눈을 피해 찾아와 말하였다.
“대장군, 소장은 며칠 요동성에 몰래 돌아가 준비할 것이 있사오니, 막리지께 대신 말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몰래? 서부총관이 어찌 잠입하겠다는 것이오? 당당히 들어가시지?”
강이식이 의아해 물었다.
을지문덕은 강이식의 찻잔에 검지를 담근 후 손가락 끝에 묻은 찻물로 탁자에 큰 대자를 썼다.
“이자가 곧 움직일 듯하여…….”
요동성 성주 대실호연의 움직임을 살피겠다는 뜻일 터인데, 강이식의 답은 뜻밖이었다.
“내 찻잔에 손가락은 왜 담근 거요? 안 뜨겁소? 좀 더 마시려했건만, 새로 따라야겠네.”
을지문덕은 강이식의 투덜거림에도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온달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저들과 싸움은 가급적 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수일 내로 돌아올 터이니, 적이 도발하여도 맞서지 말고 진을 유지하여 주십시오.”
을지문덕의 당부를 들으며 대답 대신 강이식이 차 한 모금 들이켜니, 을지문덕은 살며시 미소 짓고는 조용히 막사를 나섰다.
* * *
다음 날 아침, 태왕을 모신 전술 회의에서 대모달 유여가 정찰병의 전갈을 받아 아뢰었다.
“영주에서 물자를 실은 수레 백여 개와 호위 병사 오천의 움직임이 있다 하옵니다.”
이 보고에 태왕의 미간이 주름지며 근심이 서리자, 상장군 주용이 나서며 의견을 내었다.
“영주에서 요동의 적들에게 수레를 끌고 오면 아무리 빨라도 이틀 이상이 걸립니다. 당장 개마무사를 끌고 보급을 끊어야 합니다.”
을지문덕이 적의 도발에 응하지 마라 당부했음을 떠올리며 강이식이 이견을 내려 할 때, 조의대두형 동금호가 나서며 태왕에게 아뢰었다.
“적의 보급을 끊지 못한다면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옵니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은 철륵부의 열다섯 부족을 제압하였고, 서돌궐마저 그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대세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
“이 전쟁에서 시일을 두면 그에게 복속된 철륵부에서 재차 지원군이 요동으로 들어올 것은 자명한 일이옵니다. 적의 보급을 끊고 적을 굶주리게 함은 병법의 기본이오니, 기병을 돌려 급습함이 옳은 줄로 아뢰나이다.”
이미 을지문덕의 당부를 강이식으로부터 전달받은 막리지 연태조가 동금호의 의견에 반론을 내었다.
“수레가 백여 개라면 십만 기병과 말이 먹을 식량 이외에도 다른 물자가 상당할 것이니, 짧으면 열흘. 길어도 스무날 치 식량이 못 되옵니다.”
“…….”
“현재 적은 경계가 삼엄하니, 이번은 모른 척 두어 방심케 한 후 시일을 두고 뒤로 돌아 차후의 보급을 끊음이 옳을 듯하옵니다.”
이때 연태조의 의견을 조용히 듣던 대모달 유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분히 말하였다.
“아니 되옵니다. 막리지께서 전장이 처음이라, 길면 스무날 치 식량이 적다 말하시오나, 전장에서 적에게 하루를 더 주는 것은 그만큼 정비할 시한을 주는 것이 온데, 스무날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유여는 말을 이어 갔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사오니, 소장에게 개마무사 일만을 내어주시면 당장 말을 달려 적의 보급부대를 격파하고 영주마저 불 지르고 오겠나이다.”
대모달 유여는 동천왕 때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를 암살하여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한 유유의 후손으로 평소 침착하면서도 전장에서는 거침없고 용맹하여 평원 태왕의 신임이 높았다.
유여의 선조 유유에 대해 좀 더 언급하자면, 공손연이 요동을 지배하며 공손 씨의 연나라를 세우자, 동천왕이 이를 공격하여 연을 멸하고 요동을 취하였다.
당시 위, 촉, 오로 나뉘어 혼란스럽던 중국에서는 제갈량이 죽으며 근심을 덜은 위나라가 시선을 동북 방면으로 돌려 군사 사마의와 장수 관구검에게 이만의 군사를 이끌게 하였고.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천하의 명성이 드높던 사마의답게 지략을 발휘하려 고구려의 환도성까지 함락시키며 거침없이 진군을 계속하였다.
누구나 고구려의 국운이 다했다 생각할 무렵, 고구려 장수 밀유가 관구검의 진격을 막고, 유유가 현도태수 왕기를 암살하니, 천하의 사마의마저 기가 꺾여 군을 물리니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취하게 되었다.
오래된 일이었으나, 위나라 군사 사마의를 막아낸 밀유와 유유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존경심은 뿌리 깊어 평원 태왕도 그 후손 유여의 의견은 항상 존중하였다.
“서부총관 을지문덕은 어디 있는가?”
그때, 태왕이 강이식을 바라보며 을지문덕을 찾았다.
미쳐 을지문덕의 행적을 고하지 못한 강이식이 주위 시선을 의식해 답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자, 연태조가 차분히 아뢰었다.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정찰 나갔사옵니다.”
“총관이 직접? 음…….”
잠시 침묵하던 태왕이 무겁게 명을 내렸다.
“유여는 개마무사 일만으로 적의 보급을 끊고, 주용은 말갈 기병 일만으로 적의 남서 방향 경계를 흩트려 놓아라.”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유여의 무용은 누구나 신뢰하기에, 이견을 내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