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검귀무쌍(劍鬼無雙) 강이식 (4)
돌궐 제일의 무사 야수 못지않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관자기가 검 한 번 부딪치지 않고 절명하니, 사발략가한이 크게 노해 부르짖었다.
“저 때려죽일 놈이!”
이때 푸른 두건을 머리에 두른 약관의 청년 장수가 급히 말을 몰아 강을 건너는데, 이 모습에 사발략가한이 크게 기뻐 소리쳤다.
아무래도 사발략가한은 조울증 증세가 있는 듯하다.
“위자두! 그래! 좋다! 어서 가 저 오만한 고구려 놈에게 실력을 보여주거라!”
천부장 위자두는 목동 출신의 청년 장수로 양 떼를 노리는 늑대들을 상대로 돌팔매질을 잘하여 사발략가한이 천부장에 올렸었다.
그는 숱한 전장에서 단 한 차례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돌멩이가 든 작은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양 허리춤에 달고 한 손에 짧은 창을 쥔 채 말을 몰아 나가다가 적이 달려들면 가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던지는데, 그 실력이 비상하고 기이하여 백이면 백 모두 적의 얼굴에 명중하였다.
필경 전장에서 단기접전을 벌이는데 돌팔매질을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해 당한 것이리라.
위자두가 강을 건너오자 강이식이 여유롭게 참마검을 들어 올리고 맞서려 했다.
그때, 위자두의 왼손이 잽싸게 가죽 주머니에 들어가더니 난데없이 돌팔매질을 하였다.
“어이쿠! 이놈 봐라.”
강이식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참마검을 휘두르니, 날아오던 돌멩이를 검신으로 후려쳐 강 건너로 날렸다.
그런데 이 돌멩이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 공교롭게도 위자두를 응원하던 사발략가한의 얄미운 주둥이를 때리고 말았다.
“으악!”
사발략가한이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떨어지고는 검붉은 피를 한 모금이나 내뱉었는데, 그 속에 부러진 이가 세 개나 섞여 나왔다.
“이런 개 같은! 저 망할 놈이 내 앞니를 부러뜨렸구나! 이 쳐죽일!”
사발략가한이 머리끝까지 화가 뻗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자, 돌궐 장수 여섯과 북주 장수 다섯이 일시에 말을 몰아 강이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좋아! 그렇게 많이 와야 나도 할 맛나지. 좋아!”
장수의 수가 늘어나도 두려운 기색 없이 오히려 즐기듯 강이식이 소리치니, 가장 앞서 달려들던 위자두가 겁을 집어먹고 말 머리를 돌리려다가 맹렬히 돌진한 강이식이 휘두른 참마검에 말과 함께 몸이 두 동강 났다.
봄 가뭄에 유속이 느려진 강을 몸이 갈린 위자두와 머리가 잘린 말이 뿜어내는 피로 검붉게 물들일 무렵.
뒤이어 달려온 장수들이 강이식을 에워싸나, 강이식이 기합을 지를 때마다 참마검이 바람을 가르며 말과 사람의 몸을 두 동강 내니, 피가 튀고 살점이 솟구쳐 그 중심에 선 강이식의 모습은 실로 기괴하고 사나웠다.
“괴물이다. 괴물!”
“검귀는 진정 저자가 검귀다. 귀신, 야차다!”
돌궐과 북주 연합군은 강이식이 참마검을 휘두를 때마다 술렁였고, 강물은 더욱 붉게 물들며 끝내 열한 명의 장수들 모두가 말과 함께 몸이 갈라져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와서 언제 십오만을 내가 다 베겠느냐! 바쁘니, 한 번에 다 몰려 오거라!”
전신을 피로 물들인 강이식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소리치니, 진정 야차가 따로 없었다.
“저놈이! 당장 군을 몰아 저놈을 잡거라! 활을 쏘지 말고 사로잡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사발략가한이 앞니 빠진 주둥이로 외치니,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이 직접 삼만 기병을 이끌고 말을 몰아 강을 건넜다.
그 뒤로 우문도웅도 오만 기병을 이끌고 따르니, 사발략가한도 말에 올라 나머지 기병을 이끌었다.
강이식은 활을 쏘지 말라는 사발략가한의 외침에 내심 쾌재를 부르며 크게 웃었다.
“오냐! 나 좀 잡아 보거라! 하하하.”
십오만의 기병이 일거에 군을 몰아 강을 넘어오는데도 강이식은 두려운 기색 없이 강기슭에 서서 참마검을 땅에 박고는 활을 들어 살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날리는 살은 항상 가장 갑주가 훌륭하고 투구가 멋진 장수를 향해 이내 곧 돌궐 장수 셋과 북주 장수 둘이 절명하였다.
이 와중에도 점점 더 강을 건너 강이식을 향하는 적의 수가 늘어나니 참마검을 뽑아 들고 강이식이 사위를 에워싼 적을 베어 나가는데, 그가 지나치는 곳의 적은 모두 풀이 눕듯 쓰러져갔다.
“이 검, 보기보다 단단하지 못하구나!”
얼마나 사람과 말을 베었는지 끝내 강이식의 참마검이 부러졌다.
강이식은 쇠말뚝처럼 땅에 꽂았던 낭아봉을 뽑아 들었다.
그는 거침없이 낭아봉을 당당히 휘두르며 맞아 싸우다가 적의 선두가 거의 강을 다 넘어오자, 그때야 말 머리를 돌려 언덕 위로 내달렸다.
“저놈이 도망친다! 잡아라! 반드시 잡아라!”
사발략가한이 목이 터지라 외치니, 이계찰이 급히 기병 삼만으로 강이식의 뒤를 쫓아 언덕을 오르길 명했다.
그런데 그때 벼락같은 함성과 함께 말갈 기병 일만이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일제히 활을 당겼다.
을지문덕이 몰래 전한 계책대로 도하하던 사발략가한의 돌궐군을 매복하여 급습했던 상장군 주용이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온 것이다.
말갈 기병의 뒤를 이어 상장군 주용도 언덕 위에 말을 타고 불쑥 뛰어오르더니, 제일 먼저 달려드는 이계찰의 몸에 창을 박으려 달려들자, 이계찰이 기겁해 말을 돌려 내빼며 외쳤다.
“매복이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돌격을 멈추고 재정비하라!”
이계찰의 이 판단은 옳았으나, 이미 돌진하던 말을 늦춰 돌리기엔 늦었다.
주용은 어느덧 멀리 도망치는 이계찰은 포기하고 언덕을 오르는 돌궐 기병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대장군! 주영이 왔소! 모두 대장군을 모셔라! 활을 당기고 또 당겨라!”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이 황망히 말을 돌리며 재정비하라 명을 내렸다.
그러나 기병 삼만은 허둥지둥하다가 말갈 기병 일만이 날리는 화살에 여기저기서 쓰러졌고, 뒤이어 언덕을 오르는 우문도웅이 이끄는 북주 기병의 말발굽에 밟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강이식이 언덕을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상장군 주용이 외쳤다.
“퇴각한다! 돌려라!”
강이식과 주용이 말갈 기병을 이끌고 퇴각하자, 우문도웅이 이끈 기병 오만이 그 뒤를 쫓으며 살을 날렸고, 말갈 기병들도 퇴각하며 마상에서 몸만 돌려 활을 당겨 살을 날렸다.
돌궐과 북주의 기병은 북방 초원의 민족처럼 궁기병이 아닌 긴 창이나 도검 등의 병장기를 지닌 근접전 위주의 경기병이었고.
고구려와 말갈 기병은 경무장기병(輕武裝騎兵)으로 적의 후, 측면을 기습 혹은 상대편 기병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하지만, 말 위에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사법인 기사로 기마 궁수의 임무까지 완벽히 수행하였다.
즉, 돌궐이나 북주의 경기병과 차이점인 말을 달리며 살을 날리는 기사 능력은 활의 성능 덕에 북방 초원의 민족보다도 우월했으니, 말을 달리며 쫓을수록 우문도웅의 기병들이 쓰러지는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쫓아라! 쫓아라!”
이런 와중에도 이계찰이 이끌던 기병을 사발략가한이 흡수하며 작은 피해 정도는 감수하고 추격을 독려했다.
그러니 요동벌은 순식간에 말갈 기병 일만과 북주와 돌궐 연합군 십오만 기병이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였다.
우문도웅의 북주 기병 오만 기는 기동력에서 말갈 기병 못지않아 바짝 뒤를 쫓았고, 그 뒤를 사발략가한의 돌궐 기병 십만이 함성을 지르며 따르니, 그 위세가 사뭇 대단하였다.
“달려라! 뒤를 잡히면 궤멸당한다.”
강이식이 말갈 기병을 독려하며 말을 몰 때, 전방에서 흙먼지가 자욱이 일며 천지를 뒤덮는 땅 울림이 폭풍처럼 다가왔다.
강이식은 전방에서 덮쳐오는 거대한 땅 울림에 크게 기뻐 파안대소를 하며 명을 내렸다.
“와하하하. 길을 내어주거라! 갈라져 길을 내어준 후, 뒤돌아 친다!”
이 땅 울림은 서부총관 을지문덕이 이만의 개마무사를 이끌고 온 것으로, 사람은 물론이요.
말까지 철갑을 둘러 어지간한 화살 정도는 가볍게 튕겨 내고 창과 도검을 막아 내는 개마무사의 등장은 언제나 승리를 의미했다.
중장기병 중 최상의 갑주를 두른 철기병인 개마무사를 상대로 근접전을 벌여 당해 낼 기병은 중원은 물론이요.
돌궐, 거란, 말갈 및 북방 초원의 부족 어디에도 없었다.
강이식의 명에 따라 말갈 기병이 둘로 갈라져 개마무사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을지문덕이 이끈 개마무사들은 곧장 우문도웅의 오만 기병을 향해 내달리며 함성을 질렀다.
우문도웅은 아침 햇살에 찬란히 빛나는 개마무사들의 갑주에 기가 질려 급히 명을 내렸다.
“활을 당겨라! 다가오기 전에 적의 수를 줄여라!”
오만 기병이 병장기를 놓고 연거푸 당긴 화살이 하늘을 뒤덮고 날았으나, 개마무사들은 이를 모두 튕겨 내며 곧장 돌진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북주 기병들이 서둘러 병장기를 다시 쥐었으나, 개마무사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덮쳐 오고 있었다.
“이런 괴물 같은 것들이…….”
우문도웅이 놀라 부르짖었으나 그땐 이미 개마무사들이 성난 파도와 같이 북주 기병 중심을 뚫고 지나며 마구 창을 휘둘렀고, 강이식과 주용이 이끄는 말갈 기병 일만도 말을 돌려 합세하고 있었다.
“퇴각하라! 퇴각!”
겁에 질린 우문도웅이 명을 내림과 동시에 말을 몰아 앞서 도망치니, 북주 기병들은 그 뒤를 따라 도망치기 바빴다.
개마무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더욱 속도를 내려 하였으나, 이 모습에 을지문덕이 급히 명을 내렸다.
“쫓지 마라! 저 앞에 십만이 대기하고 있다. 더는 쫓아 피해 볼 필요 없다.”
개마무사는 돌격과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동력이 떨어지고 원거리 공격 능력이 전무하며 말과 사람 모두 철갑을 두른 탓에 장기전에 쉽게 지쳤다.
적은 경기병이기에 근접전을 피하고 속도와 지구력을 적극 활용해 거리를 벌려 싸우면 무적의 개마무사도 피해가 커질 것은 당연했다.
“좋은 판단이오. 이 정도면 진을 칠 시간을 번 것 이상의 대승이오.”
강이식이 낭아봉을 쥐고 을지문덕 옆으로 말을 몰아오며 말하니, 을지문덕이 환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대장군께서는 홀로 적의 기병 십오만과 마주하고 밤을 보내셨는데, 어찌 상한 곳 하나 없으십니까? 허허허.”
“내가 상하길 바란 게요? 하하하, 몹쓸 사람이로군. 허허. 그나저나, 총관 나도 온달 아우의 운철 대검과 같은 검 한 자루만 구해 주시구려. 내 별호가 이제 검귀라 아무래도 낭아봉보다 검이 좋겠소.”
“허허허.”
“내가 말이요. 지금은 없지만, 참마검으로 한 번에 적장 십여 명을 상대해 말과 함께 목을 베었지 뭐요. 하하하.”
“허허허, 대장군 농담도… 한 번에 적장 십여 명은 항우, 관우가 살아 돌아와도 어렵습니다. 서넛이라면 모를까. 어땠든 별호가 검귀라… 참으로 흉악한 별호입니다. 그것이 어디 사람이 쓸 별호입니까?”
“하하. 멋지지 않소?”
“검성, 검왕, 검신도 아니고, 허허. 다른 별호 찾아보시지요. 아무튼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 운철 대검 마련해 드리지요. 별이 떨어지기만 바라십시오. 허허허.”
“뭐 그럼 적장 서넛으로 합시다. 본 사람 없으니 우길 수도 없고 하하하. 어찌 되었든 별 떨어지면 나도 운철 대검 한 자루 만들어 주시구려. 꼭이오. 하하하.”
을지문덕의 농을 가볍게 받아주며 강이식이 호쾌히 웃으니, 전장이 아닌 사냥터처럼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