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검귀무쌍(劍鬼無雙) 강이식 (3)
사발략가한이 울화통을 터트려 소란스러운 가운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유역비 그대는 대실호연을 믿는가?”
이 물음에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실호연을 믿지 못한다 말하면 나를 문책할 것이다.’
유역비가 속내를 감추고 태연히 답하였다.
“믿사옵니다.”
유역비의 답에 이계찰이 고개를 끄덕인 후, 사발략가한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올렸다.
“가한, 대실호연이 전한 정보는 중간에 변경된 듯하오나, 말갈 기병 일만은 맞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이계찰의 이 말에 유역비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수가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였다.
“그래? 대장군 강이식과 상장군 주용이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나온 것은 맞을 것이란 말이지? 헌데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사발략가한이 되물으니 이계찰이 지도를 가리키며 답하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주용이 이끈 말갈 기병 일만의 매복에 피해를 입었지요. 그렇다면 여기엔 강이식 혼자만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서둘러 강을 건너야 합니다.”
“뭣이라! 여기에 고작 강이식 하나뿐이라고?”
이계찰의 이 말에 사발략가한이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자, 유역비가 손을 내저으며 이견을 내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가한, 강이식 혼자라면 저리 여유롭게 대군에 맞서지 못할 것이며 저자는 우리가 섣불리 강을 건너오기를 바라는 듯 도발마저 하고 있사옵니다.”
이미 유역비는 이계찰의 의견이 옳다 믿으면서도 오만의 대군이 강이식 한 명에게 발이 묶였을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우문도웅의 책사인 자신이 지게 될 것이 두려워 이렇듯 말한 것이다.
“이놈! 네가 말하길 대실호연을 믿는다 하지 않았느냐! 그가 전한 정보가 맞다면 말갈 기병 일만이 우리를 기습했으니, 이곳엔 없음이 당연하다. 이 멍청한 놈! 헛되이 시간만 낭비한 이놈의 목을 벨 것이다!”
사발략가한이 크게 노해 유역비의 비쩍 마른 몸뚱이를 한 손에 번쩍 들어 밖으로 나오니, 강 건너에 강이식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여유롭게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가한! 가한! 저기를 보십시오!”
유역비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다급히 강 건너를 가리켰다.
“뭘 보란 말이더냐?”
사발략가한이 대수롭지 않게 물으니, 유역비가 애처로이 말하였다.
“없습니다. 상장군 도광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사발략가한이 궁금해 물으니, 그제야 유역비가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포로로 잡힌 상장군 도광의 모습이 저 모닥불 근처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 저 강 건너 언덕 뒤에 매복한 고구려군이 데려갔음이 분명합니다.”
“뭣이?”
“가한, 강 건너엔 강이식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옵고, 장담하건대 우리를 노리는 매복이 있사옵니다.”
유역비가 필사적으로 이야기하니, 사발략가한도 흔들렸다.
이때 우문도웅이 나서며 말하였다.
“가한, 유역비의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저자도 사람인데 혼자서 어찌 저리 담대히 있겠습니까?”
우문도웅의 말을 듣고 보니 왠지 강 건너 여유로운 강이식의 모든 것이 수상했다.
“좋다! 어차피 날이 밝으면 일시에 말을 달려 요절내면 그만이다. 다들 준비하거라!”
이때, 강 건너 강이식의 호통이 들려왔다.
“어허! 여기 어른이 쉬고 계신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잠들 자고 아침에 보자꾸나. 하하하.”
이 도발에 사발략가한이 분을 참지 못해 당장이라도 말 위에 오르려 하니, 유역비가 말리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가한, 강이식 저자가 우리를 도발하여 강을 건너게 하려 들지 않습니까. 이는 필경 매복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유역비의 이 말에 사발략가한과 우문도웅이 고개를 끄덕이니,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은 깊게 탄식하며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 * *
날이 밝아 사발략가한과 우문도웅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오니, 강 건너 강이시도 말 위에 올라 반갑게 인사하였다.
“그래, 다들 조반은 먹고 나온 것이냐?”
이 물음에 답은커녕 사발략가한이 고개 돌려 엄히 명을 내렸다.
“흥, 무례한 놈. 이계찰은 전군을 몰아 강을 건너라!”
그러나 새벽에는 군을 몰아 급히 강을 건너자고 주장했던 이계찰이 이번엔 반대 의견을 내었다.
“아니 되옵니다.”
“뭐라? 왜 안 된다는 것이더냐? 그대는 매복이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우문도웅이 언짢은 표정으로 되물으니, 이계찰이 기죽어 답했다.
“새벽엔 매복이 없었겠으나, 지금은 주용이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왔을 것이니, 분명 매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계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발략가한이 거칠게 명을 내렸다.
“됐다! 어차피 매복이 있다 한들 고작 일만이다. 어서 군을 몰아 나가라!”
“일만의 말갈 기병은 활에 능하여 우리 군의 타격이 클 것입니다. 군을 나누어 강을 돌아 건넘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사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계찰이 계속 이견을 내니, 사발략가한의 눈에서 살기가 돌았다.
이때 만부장 밀중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오며 사발략가한에게 아뢰었다.
“소장 밀중, 강을 건너 과연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고 오겠나이다. 더불어 저 고구려 장수의 목도 가한께 바치겠나이다.”
밀중은 손이 날래 화살도 맨손으로 잡아채며 연달아 화살을 날리는 재주 또한 뛰어났다.
또한, 한 자루 곡도를 빠르게 다루어 검망을 만드는데, 그의 가장 무서운 재주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커다랗고 둥근 방패에 짧은 비도를 서른여섯 자루 숨겨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서른여섯 자루의 비도를 밀중이 연달아 날리면 그 어떤 적도 피하지 못하고 절명하기에, 그를 불가의 수호신 팔비나타 밀중이라 칭하고 있었다.
“오! 팔비나타 그대가 나선다면 내가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어서 가 저놈의 목을 가져오시게.”
거친 사발략가한의 언사도 이 순간만큼은 매우 부드러워졌다.
밀중이 말고삐도 잡지 않고 곡도와 방패를 쥐고 말을 몰아 나가니, 강 건너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강이식이 빙그레 웃으며 활을 당겼다.
휙 날아온 화살을 밀중이 가소롭다는 듯 방패를 들어 막으며 거침없이 강을 건너오니, 강이식도 상대를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강이식이 경계하며 낭아봉을 쥐고 밀중을 맞이하려 나설 때, 밀중이 곡도를 방패로 가져가 숨기고는 곧바로 서른여섯 자루의 비도를 연거푸 날리니, 삽시간에 강이식을 향해 비도들이 쏟아져 들었다.
“기막힌 수를 부리는구나!”
강이식이 놀라 외치며 낭아봉을 휘두르는데 움직임이 너무도 가볍고 신묘하여 사방에서 불꽃이 일며 경쾌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 한 자루의 비도조차 강이식의 몸은커녕 말조차 건드리지 못하였으나, 밀중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섭게 말을 달려와 곡도로 강이식의 목을 노려 베어 왔다.
“그 비검술, 나도 조의선인들에게 더 좋은 것을 배운 바 있노라!”
이때, 강이식이 벼락같이 외치며 왼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날리는데 너무도 빠르고 정확하여 밀중은 막을 겨를도 없이 달려오는 그 기세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절명하였다.
널브러진 밀중의 목에는 자신이 날렸던 비도가 박혀 있었는데, 아마도 강이식이 한 자루를 손으로 낚아채 되돌려 날린 듯했다.
자신만만하던 밀중이 허망하게 쓰러지자, 사발략가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중얼거렸다.
“야수가 이곳에 있었다면… 야수라면 저놈을 대적할 것인데…….”
돌궐 제일의 무사 야수는 공손향과 함께 영주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사발략가한으로서는 아쉬울 만도 했다.
이 소리를 들었는지 뒤에 있던 만부장 관자기가 커다란 참마검을 어깨에 메고 나오며 아뢰었다.
“소장 관자기 야수만 못하나, 능히 저자를 대적하리라 자신하옵니다. 제가 말을 몰아 저 오만한 고구려 장수를 말과 함께 베어 가한을 기쁘게 하겠나이다.”
관자기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후예로, 철륵부의 속해 지내다가 사발략가한의 눈에 들어 만부장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한 자루 거대한 참마검(斬馬劍)을 잘 사용했다.
이 참마검은 본래 기병전에서 말의 목을 베는 용도로 만들어진 참마도를 더욱 강하게 개량한 검으로, 손잡이 길이만 세척에 양날 검신이 일곱 척으로 어지간한 창보다 길어 관자기가 이 참마검을 양손에 쥐고 휘두르면 말과 함께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의 몸까지 한꺼번에 가를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그가 말을 달리며 참마검을 휘두르면 사방에 말의 목과 사람의 몸뚱이가 날리고, 그 피를 온통 관자기가 뒤집어써 보통 흉측하고 사나운 것이 아니었기에, 세인들은 그를 야차와 같다 하여 검귀(劍鬼)라 불렀다.
야수가 두 자루 박도를 지니고 말도 없이 내달리는 것에 비하여 조상 대대로 기병 출신인 관자기는 마상 재주가 뛰어나 전장에서는 야수보다 한 수 위라 스스로 말할 정도였다.
“오! 관자기, 그대라면 야수가 없다 한들 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대가 항상 말했듯 전장에선 야수보다 그대 검귀가 위임을 이번에 증명하시게.”
사발략가한이 격하게 칭찬하며 사기를 북돋으니, 관자기는 이미 개선 장수가 된 듯 거만히 강가로 말을 몰았다.
“허허, 이놈들은 참으로 희한한 병장기를 사용하는구나.”
강이식이 웃으며 반기니, 관자기가 거만히 화답했다.
“나는 관구검의 후예인 검귀 관자기다! 나의 선조께서 너희 고구려를 정벌하여 가르침을 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어서 썩 물러가 고구려왕을 데리고 와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거라!”
관자기의 이 도발을 강이식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만 물었다.
“그 검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 확실히 이런 쇠몽둥이보다 검을 사용해야 별호도 풍류 있게 검귀라 불릴 수 있어 좋겠구나. 그래 참 좋겠어.”
뜬금없는 물음에 관자기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답하였다.
“이 참마검의 무게는 사십 근이다.”
관자기의 답변에 강이식이 빙긋 웃으며 소리쳤다.
“좋아! 인사는 이쯤하고 어서 그 검을 내게 가지고 오너라! 하하하.”
“뭣이?”
강이식의 이 도발에 관자기가 크게 노해 말을 재촉해 강을 넘어오니 그 기세가 거침없고 당당했다.
강이식도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말을 달려 나오니 관자기가 기다렸다는 듯 참마검을 휘둘러 강이식을 말과 함께 베어 왔다.
“이놈! 가거라!”
관자기의 외침에 강 건너 돌궐과 북주 연합군이 함성을 질렀다.
강이식은 이 요란한 함성 속에서도 기가 꺾이지 않고 왼손을 뻗어 베어 오는 참마검의 끝을 잡아채며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결과, 오히려 관자기가 중심을 잃고는 말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좋은 검이로다!”
관자기에게서 참마검을 뺏은 강이식이 낭아봉을 쇠기둥처럼 땅에 박아 세우고는 참마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 검과 검귀라는 별호는 네 실력에 과분하구나. 둘 다 내가 취할 것이니, 이제 나를 검귀 병마도원수 대장군(劍鬼 兵馬都元帥 大將軍) 강이식이라 부르거라! 하하하.”
강이식이 검도 뺏고 별호마저 빼앗으며 빈정거리니, 격분한 관자기가 눈에서 불꽃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아니다. 일어나지 말고 너는 그냥 그대로 죽거라. 모두가 다 네 선조 관구검 탓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거라.”
강이식이 관자기를 측은히 내려다보더니 참마검을 휘 휘둘러 말과 함께 관자기의 몸을 가볍게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