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검귀무쌍(劍鬼無雙) 강이식 (2)
“아니! 이런 일이! 저놈이 어찌 저리 무도할 수 있는가! 강도 건너기 전에 화살을 쏘다니.”
믿었던 선우정기가 단기접전(單騎接戰)을 벌이기 위해 강도 건너기 전 강이식이 날린 화살에 머리가 터져 죽자, 평소 침착하던 우문도웅의 복장도 터져 소리치고 말았다.
“건너올 것이냐? 거기 그냥 있을 것이냐?”
강이식의 외침이 또 한 번 우문도웅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때였다.
커다란 도끼를 쥔 장수가 말을 몰아 우문도웅의 앞에 서서 청하였다.
“소장 구융, 말을 달려 이 대부로 싸움의 예도 모르는 저놈의 머리를 쪼개고 오겠습니다.”
이 장수는 우문도웅이 아끼는 돌격대장 구융으로 커다란 양날 도끼를 잘 다루며 결코 물러섬 없이 용맹하여 항상 선두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맹장이었다.
“그래! 그대가 있었군. 어서 가서 저 본디 배운 바 없는 무례하고 무도한 놈의 버릇을 고쳐 놓겠나. 저놈의 활이 무서우니 그것만 조심하게.”
북주 활의 사정거리는 이백 보가 넘지 않았고, 강기슭에서 건너 강이식까지의 거리는 이백 보가 조금 넘었다.
이에 비해 강이식의 활은 고구려 각궁으로 긴 사정거리에 그의 완력이 더해져 여지없이 위력을 발하고 있었다.
구융이 우문도웅의 우려를 가벼이 여기고 말을 달려 강을 건너니, 이번에도 강이식이 날린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디서 잔수작이냐!”
구융이 도끼를 휘둘러 화살을 쳐내기가 무섭게 또 한 대의 화살이 그의 투구를 맞추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투구 꼭대기 빈 곳에 꽂혀 겨우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화살이 꽂혀 투구가 흔들리자, 담대한 구융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뒤돌아 가기엔 이미 말을 너무 많이 몰아 어느덧 강 중간을 넘고 있어 내친김에 계속 달려 나가니, 강이식도 낭아봉을 쥐고 말을 몰아 마중 나오며 대뜸 일갈을 날렸다.
“네놈은 머릿속이 빈 것이더냐? 어찌 투구에 화살이 박히고도 달려오는 게냐? 하하하.”
그의 조롱에 구융이 크게 노해 도끼를 휘두르니, 강이식도 낭아봉을 휘둘러 맞섰다.
깡!
쇠와 쇠가 부딪히는 단 한 차례의 굉음이 일고 구융이 말에서 떨어져 강바닥에 나뒹구니, 강이식이 놓치지 않고 낭아봉을 재차 휘둘러 머리를 으깨고는 다시 강기슭으로 올라가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 우문도웅! 와서, 네놈 수하의 시신을 수습해 가거라! 하하하.”
“뭐라! 네 이놈!”
강이식의 조롱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우문도웅이 군을 이끌고 일시에 강을 건너려 하자, 유역비가 나서며 그를 진정시켰다.
“주군, 저놈이 일부러 우리를 도발해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을지문덕의 간계입니다.”
유역비의 말을 듣고 보니, 우문도웅의 기병이 강을 건너는 동안 강 건너 언덕 위에서 고구려군이 일시에 활을 당기면 그 피해가 심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피해를 감수하고 강을 건넌 뒤에도 언덕 위에 매복한 고구려군이 지형을 이용하여 공격해오면 고구려군을 격퇴하더라도 우문도웅 군의 피해가 클 것은 자명했다.
승리를 취하더라도 첫 전투에서 피해가 크다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좋겠는가?”
우문도웅이 침착히 생각을 정리해 물었다.
“주군,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우문도웅이 물으니, 우역비도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이때를 참지 못한 장수 둘이 말을 몰아 우문도웅 앞에 섰다.
“주군, 우리 형제가 저놈의 목을 베어 오겠나이다.”
두 자루의 검을 잘 다루어 단기접전에서 상대가 없다는 공근과 공규 형제였다.
“그래, 한 사람도 만 명을 대적하는 용장인데 두 형제가 동시에 나서니, 이 어찌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 있는가? 저놈은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으로 저놈만 없애면 고구려의 장수들은 보잘것없다 들었네. 두 형제가 이번에 애 좀 쓰시게.”
우문도웅이 평소답지 않게 장황히 공 씨 형제를 치하하며 용기를 북돋으니, 용기백배한 두 형제가 나란히 말을 몰아 강을 넘기 시작했다.
“이번엔 둘이더냐? 그래 잘 생각했다. 혼자 안 되면 여럿이라도 와야 하느니라.”
강이식이 비웃으며 활을 당기니, 공규가 어깨에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져 강도 건너지 못했고.
이에 분개한 공근이 고함을 지르며 말을 몰아오니, 강이식이 강기슭에서 기다리다가 낭아봉을 휘두르자 공근은 마른 흙도 밟지 못한 채 말과 함께 강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이놈!”
이에 격분한 우문도웅의 장수 셋이 일시에 말을 몰아 단숨에 강을 건너오는데, 이번에도 강기슭에서 기다린 강이식의 낭아봉이 이들을 맞이해 저승길로 안내했다.
공연히 주인 잃은 말 세 마리가 돌아오자, 울화통이 치민 우문도웅이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길 자신 없는 장수는 나서지도 마라!”
괜히 나서 사기만 떨어뜨리지 말란 우문도웅의 엄명에 오히려 군의 사기가 더 떨어져 술렁이기만 하였다.
“저 한 놈도 대적하지 못하는데 강을 건너 고구려 대군과 어찌 싸운단 말인가!”
우문도웅이 탄식을 하자, 드디어 상장군 권왕 도광이 양손에 무쇠 장갑을 끼고 말을 몰아 나오며 아뢰었다.
“주군! 소장 도광, 강이식의 머리를 으깨고 오겠나이다.”
도광이 사용하는 무기는 칼이나 창이 아닌 무쇠 장갑으로 도끼나 칼로도 그의 장갑을 벨 수 없을뿐더러 그가 내지르는 주먹에 단단히 돌로 쌓은 담벼락마저 무너질 정도로 그 위력이 무시무시하여 권왕이란 호칭이 붙었다.
“상장군 권왕! 그대가 오만방자한 강이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게나!”
우문도웅의 명을 받은 권왕 도광이 말을 달려 나가니, 이번에도 강이식이 한 대의 화살을 날려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가소롭구나! 내게 이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도광이 비웃으며 날아드는 화살을 무쇠 장갑으로 쳐내어 막으니, 우문도웅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높였다.
“제법 재밌는 놈이 오는구나! 오냐, 어서 오너라! 그 장갑 나도 한 번 구경해 보자!”
강이식이 낭아봉을 쥐고 도광이 강을 건너오길 기다리자, 기세 오른 도광이 맹렬히 말을 몰아 단숨에 간을 넘어오며 주먹을 휘둘렀다.
윙윙 소리를 내며 무쇠 장갑을 낀 주먹이 날아들자 강이식도 낭아봉을 휘둘러 도광의 머리를 노렸다.
“내겐 그런 쇠몽둥이는 통하지 않는다!”
도광이 비웃으며 왼손으로 강이식의 낭아봉을 가볍게 막아내자, 우문도웅이 크게 기뻐 소리쳤다.
“역시! 권왕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그의 탄성과 함께 우문도웅의 군도 사기가 올라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천하제일권! 권왕님이시다!”
“상장군 만세!”
강 건너가 떠들썩하니 요란하자, 강이식이 껄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그래, 그 무쇠 장갑이 참으로 대단하기는 참 대단하구나! 어디 이번에도 막아 보아라! 하하하.”
이례적으로 강이식이 낭아봉을 양손으로 쥐고 휘둘렀다.
그러자, 그 기세가 매우 웅장하여 순간 태산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파도가 덮쳐 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광이 양손을 들어 낭아봉을 막아보려 용썼다.
쾅!
그 순간, 벼락이 떨어져 천둥 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도광의 처참한 비명마저 덮었다.
그리고 도광의 양손에 낀 무쇠 장갑이 으깨져 손가락 뼈마디를 분지르고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도광이 철퍼덕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네놈은 꽤 쓸 만하니, 포로가 되는 영광을 주마.”
강이식이 웃으며 낭아봉을 가볍게 휘둘러 도광을 기절시키고는 강 건너 우문도웅을 향해 한 대의 화살을 날렸다.
“우문도웅! 어서 건너오너라!”
우문도웅의 수하들이 앞을 가리며 화살을 막아 보려 했으나, 빈틈을 뚫고 날아온 화살이 우문도웅이 탄 말의 눈에 꽂히고 말았다.
긴 말 울음과 함께 우문도웅이 말에서 떨어지자, 강이식이 또다시 활을 날릴까 두려운 유역비가 재빨리 명을 내려 군을 강기슭에서 거리를 두게 하였다.
“이 무슨 망신인가! 어찌 저 한 놈 때문에 물러선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된다 생각들 하느냐!”
거리를 벌리고서야 겨우 안심한 우문도웅이 격분해 소리치니, 그 누구도 제대로 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때, 한동안 말이 없던 유역비가 차분히 나서며 말하였다.
“주군, 이번에 강이식이 우리를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한 것은 맞사오나, 어차피 이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 상황에 어찌 여유로울 수 있는가?”
우문도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유역비는 여전히 차분하였다.
“우리가 여기에 발이 묶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오나, 저놈 역시 이곳에 발이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사발략가한이 강을 건너 요동벌에 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고구려군의 본진을 칠 것이고, 그땐 저놈이 당황하여 군을 돌릴 것입니다.”
“오호.”
“그때 우리가 일시에 강을 건너 뒤를 치면 결국 우리의 승리이옵니다. 장수 몇을 잃은 것은 애석한 일이나, 군사는 온전하며 전장의 판세는 변치 않을 것이옵니다.”
유역비의 설명에 그제야 우문도웅이 환히 웃으며 명을 내렸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며 푹 쉬고 내일 속 시원히 요동벌을 내달려 보자꾸나! 하하하.”
하지만 새벽이 되어 사발략가한의 군대가 말을 몰아오니, 잠을 청하던 우문도웅이 놀라 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가한, 어찌 된 일이오?”
우문도웅이 얼굴이 벌게진 사발략가한을 막사로 맞으며 묻자, 사발략가한이 도끼로 탁자를 내리쳐 부수며 우문도웅에게 화를 내었다.
“그대가 말한 곳으로 강을 건너 고구려군의 본진을 치기 위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몰아 해가 떨어져 겨우 그곳에 도착하여, 횃불을 들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소.”
“하온데?”
우문도웅이 불길함을 억누르며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사발략가한이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십만 기병이 길게 늘어서 강을 건너, 선두가 막 건너편 강기슭 언덕을 오르려 할 때, 고구려군이 갑자기 나타나 불화살을 날렸소.”
“뭐, 뭐라?”
“강가에 뿌려 둔 기름과 유황에 불이 붙고는 강물마저 기름에 불이 붙어 우리 돌궐군의 대열 중간이 끊어져… 결국 강을 건넌 선두는 고구려군의 급습에 몰살당하였단 말이오! 그대의 계책만 믿었던 내가 바보였소!”
사발략가한의 호통을 가만히 듣던 유역비가 겨우 입을 떼고 전군 총사령관 이계찰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리하여… 군을 물려 이곳으로 오신 것이시옵니까?”
이계찰이 입도 열기 전에 사발략가한이 먼저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그럼 와야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나의 병사 오천이 몰살당하였고 고구려군의 매복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넓은 강을 어찌 건넌단 말이더냐!”
“…….”
“차라리 강폭이 좁은 이곳으로 건너야지. 우문도웅, 안 그렇소? 헌데, 그대는 어찌 여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사발략가한의 물음에 답도 못하고 우문도웅이 우역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니, 끓어오르는 한숨을 참으며 유역비가 차분히 이야기하였다.
“가한, 고생하셨습니다. 날이 밝아 강을 건너 함께 고구려군을 치면 오천 기병의 원혼도 극락으로 갈 수 있을 것이옵니다.”
겨우겨우 화를 참으며 말을 마친 유역비의 머릿속은 이 모든 것이 을지문덕의 계책이거나 대실호연의 배신, 둘 중 하나라 생각하며 무엇이 명확한지 따지느라 바빴다.
‘고구려군은 이곳에 우리의 발을 묶고 방심해 강을 건너는 사발략가한의 군을 매복했다. 이것이 대실호연이 우리를 배신하여 허위 정보를 보낸 것인지, 을지문덕이 따로 술책을 쓴 것인지 당장은 알 수 없으니, 일단 날이 밝으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강을 건너야겠구나.’
그는 생각을 이어 가며, 앞으로의 일을 도모했다.
‘사발략가한이 오천이나 군사를 잃었지만, 아직 우리는 십오만 가까운 기병이니, 고구려군보다 우위임은 당연하고, 급히 진격하면 진영을 구축 중이느라 바쁜 고구려 본진을 급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역비가 바삐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사발략가한은 우문도웅애게 화를 풀며 달달 볶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