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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84화 (84/328)

084화 검귀무쌍(劍鬼無雙) 강이식 (1)

을지문덕의 이야기에도 오부 귀족들은 여전히 수성을 고집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때, 귀족들의 웅성거림을 조용히 듣던 막리지 연태조가 특유의 중저음으로 평원 태왕에게 아뢰었다.

“총관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국토를 황폐화시키지 않고, 백성을 전란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준비하였습니다.”

“…….”

“폐하께서 이끄신 원정군은 말갈 기병 일만에 개마무사 이만, 노궁수 포함 궁병 일만에 경기병 이만, 중장보병과 창병이 사만으로 도합 십만에 달합니다. 이 병종으로 요하를 건너 서로 원정을 가 드넓은 초원에서 기병전을 벌이는 것보다 요동벌에 진을 치고 대회전을 벌이는 것이 더 적합하옵나이다.”

“…….”

“우리가 군을 이끌고 나가 맞아 싸우고, 각 성에서 지원을 한다면 적은 요동벌을 벗어나지 못해 천산 산맥을 결코 넘지 못할 것입니다.”

막리지 연태조가 을지문덕을 거들자, 대실호연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태왕의 기색을 살피었다.

애초에 원정은 속임수로 을지문덕이 대회전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병종임을 잘 아는 태왕이 능청스레 모른 척 의견을 물었다.

“서부총관 을지문덕의 의견을 막리지가 거드니, 나 역시 이를 가벼이 여길 수 없도다. 허나, 준비된 군이 있다 하여 무작정 나가서 적을 맞아 싸운다는 것 또한 불필요한 피해가 우려되는구나. 총관은 따로 준비한 계책이 있는가?”

태왕이 자신을 직접 지명해 의견을 물으니, 을지문덕은 예의 그 자신만만하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분히 자신이 세운 계책을 설명하였다.

“폐하, 깊게 생각해 보면 적은 먼 길을 급히 달려온 기병이며, 요하 건너 영주 땅은 실상 거란의 영토로 수나라의 지배를 받는 곳입니다.”

“그렇네.”

“우문도웅이 요하를 건너기 전 이 수의 영주총관부를 급습한 것은 기반을 마련하여 장기전에 대비한 것으로 시일이 지나면 적의 보급부대와 공성 병기를 마련한 추가 병력이 이곳에 집결하게 됩니다.”

“음…….”

“하여, 적의 선발대와 본대가 요하를 건너오게 하여 영주와 거리를 두게 한, 추가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요동벌에서 적의 진영을 무너뜨려 격퇴하심이 순서입니다.”

이때, 불만 가득한 표정의 늙은 귀족 한 명이 태왕께 아뢰는 을지문덕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총관이 아직 어리고 전쟁 경험이 부족해 쉽게 말하는 것이요. 우문도웅이 이끈 적의 선발대 오만은 곧 요하에 당도할 것이고,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이끈 기병 십만도 곧 요하에 당도할 것인데 우리 고구려의 원정군이 요동벌에 진을 칠 시간이 부족하지 않소?”

늙은 귀족은 말을 이어 갔다.

“저들은 기병이라 휘몰아쳐 급습해 오면 진을 치느라 분주한 우리 군의 피해가 막심할게요. 이는 생각해 본 것이요? 더구나 총관의 말대로 영주를 손에 넣어 근거를 마련한 저들이 후발대와 보급마저 도착해 여유롭게 지원받는다면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수성하며 적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소?”

이에 을지문덕이 차분히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적의 병력이 십오만이나 선발대와 본대의 지휘 계통이 나누어지고 전군을 총괄하는 자가 우문도웅과 사발략가한보다 그 지위가 낮은 상태로 우리의 정병 십만이 요동벌에 진을 치고 맞서면 지휘 체계가 혼란스러운 적 따위는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

“또한 적의 선발대와 본대가 요동벌로 들어와 영주와 거리만 둔다면 몰래 군을 돌려 적의 보급부대와 후발대를 끊어 놓을 수 있을 것이며, 영주총관도 우리 수중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을지문덕이 모두 설명하기 전에 늙은 귀족이 말을 끊으며 제 생각을 피력하였다.

“군을 돌린다 하셨소? 다른 성에서 군을 빼어 몰래 요하를 건너 영주를 치고 보급로를 끊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좋은 수이지만, 우리가 요동벌에 진을 치면 적이 마주할 것이고, 그렇다면 전방 경계가 치밀할 것인데 균을 돌려 영주를 치고 적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 가능하겠소? 무엇보다 당장 진을 칠 시간도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오?”

여전히 을지문덕은 불쾌한 기색 없이 조곤조곤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틀, 아니 하루만 적을 요하에 묶어 둔다면 요동성 십 리 밖에 진을 칠 시간이 마련될 것입니다.”

“음…….”

“이후 요하를 건너온 적은 진을 쳐 대회전을 치러야 하기에 요하 건너로 군을 보내긴 어려울 것이며, 영주총관부는 따로 군을 꾸려 점령할 방안이 마련되어 있으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눈앞에 진을 친 적을 피해 영주를 차는 방안이 마련되었다라… 총관 그대는 대군을 하늘로 솟게 할 재주라도 있는 게요? 뭐 그런 재주가 있다 칩시다. 저들이 요하를 건너지 못하게 하루를 벌 수는 있는 것이요?”

“벌 수 있습니다. 대장군과 상장군이 이곳으로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나가신다면 능히 하루의 시간은 마련될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자신 있게 말하며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요서와 요동의 경계를 가르는 요하의 줄기 중 강폭이 좁은 곳으로, 봄 가뭄에 물이 차지 않아 기병이 말을 타고 건너기 수월한 지역이었다.

“음, 그곳은 적의 침공로로 가장 적합한 곳은 맞소. 허나, 고작 말갈 기병 일만으로 막아 낼 수 있겠소? 또한 적이 힘들더라도 강폭이 넓고 물이 깊은 곳을 택하여 건너오면 어떡하겠소?”

여전히 이견을 내어 반대하는 늙은 귀족에게 강이식이 을지문덕을 대신하여 크게 소리쳐 답하였다.

“영주를 손에 넣은 이상, 적은 요동 지리에 능통하게 되었을 것이외다. 당연히 이곳으로 올 것이고, 나와 상장군이 하루는 막아 낼 수 있다 생각하오!”

대장군 강이식의 호통에 늙은 귀족이 슬그머니 물러나자,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히 명하였다.

“이제 곧 삼짇날이라 백성들은 본업인 농사에 주력하여야 우리 고구려가 국력을 끌어올릴 수 있느니라. 본디 전쟁이란 승패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리 또한 중요한 법! 요동벌에 진을 쳐 적이 단 한 발도 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태왕의 단호한 명에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 물러나니, 요하로 떠나는 대장군 강이식과 상장군 주용에게 을지문덕이 나지막이 뭔가를 속삭였다.

막리지 연태조는 이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나가는 늙은 귀족을 불러 세웠다.

“조의두대형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늙은 귀족은 조의두대형 동금호란 위인으로 조의두대형은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울절(鬱折), 태대사자(太大使者)와 함께 최고의 신분과 계급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맡고 정사를 의논하며, 병사를 징발하고 관직을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의두대형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만이 최고의 무관직인 대모달(大模達)에 임명될 수 있었다.

“허허, 나야 뭐 서부총관 을지문덕이 부탁하여 써준 대로 질문한 것뿐인데,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헌데, 총관은 왜 내게 이런 악역을 맡긴 거랍니까?”

조의두대형 동금호가 인자하게 웃으며 소리 죽여 되물으니, 연태조는 주름진 동금호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적을 속이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조의두대형께서 어려운 일을 해주신 덕분에 우리는 대승을 거둘 것입니다.”

“뭐 그렇다면 악역이야 백 번인들 못하겠습니까만, 저 을지문덕이란 사내는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 천연덕스럽게 능청을 잘 떤답니까?”

올해 마흔인 을지문덕을 어리다 말하는 동금호의 백발이 꾀나 멋스러웠다.

* * *

처소로 돌아온 대실호연은 바로 하윤을 불러 조금 전 있었던 회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다 들은 하윤이 무릎을 탁 치며 크게 기뻐 소리쳤다.

“당장 전서구를 날리십시오! 승리의 기반을 우리가 만들어 주니, 우문도웅은 반드시 합하께 보답할 것입니다.”

“그러한가? 그거 잘 되었군. 그래 전서구엔 뭐라 담을 것인가?”

“태왕이 요동성 십 리 밖에 진을 치고 대회전을 준비하며, 진을 칠 시간을 벌기 위해 대장군과 상장군이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나간다. 또한 대회전이 벌어지면 몰래 군을 돌려 요하를 건너게 하여 영주를 칠 계획이니, 전방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군사 회의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었다.

“음, 그 정도면 우문도웅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군. 좋아, 아주 좋아.”

크게 만족한 대실호연은 급히 전서구를 날리고는 벌써 고구려 태왕이 된 기분마저 들어 매우 흥분하였다.

“어서 요하를 건너오거라. 하하하.”

* * *

유역비는 대실호연이 보낸 전서구에 달린 서찰을 읽고는 바로 계책을 내어 우문도웅에게 전하였다.

“참 잘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예기를 꺾고 대장군과 상장군을 사로잡을 기회입니다. 주군께서 공을 세우기 위해 바로 군을 몰아 놈들이 대기할 이곳을 치시고, 사발략가한에게 연통을 넣어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여기를 건너 고구려 태왕이 진을 치기 전 급습하여 요동벌에서 대승을 거두라 하십시오.”

“알겠네.”

“그후, 대실호연과 연통해 요동성과 우리가 앞뒤로 태왕을 공격하면 이 전쟁은 조기에 마무리될 것입니다.”

유역비의 이 언사는 이계찰(利稽察)이 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임에도 그에게 첩보를 전달하여 의견을 듣고 전략을 세우기보다 북주와 돌궐 수장끼리 전략을 논하여 제각각 전투를 치르는 것이었다.

이는 유역비가 지략이 뛰어나도 전장을 넓게 보는 대국적인 시야가 부족한 탓이었다.

어찌 되었든 유역비가 자신만만히 가리킨 곳은 강폭이 넓지만, 기병이 무리해 건너면 바로 말을 몰아 진을 구축하는 고구려군의 측면을 급습하기 좋아 보였다.

단숨에 계책을 내는 유역비도 책략이 뛰어난 인물임은 분명했다.

“고작 일만의 말갈 기병으로 강폭이 좁은 곳에서 우리를 막아보겠다니, 가소롭구나. 즉시 사발략가한에게 연통을 넣고 출전 준비를 시키거라.”

“네.”

“한 번에 휘몰아쳐 요동벌에 진영을 구축하느라 애쓰는 고구려군의 진영까지 치겠다. 천하의 을지문덕이 우리가 기동력 좋은 기병 위주라는 것을 간과했구나. 하하하.”

우문도웅이 호쾌히 웃으며 유역비의 계책을 받아들여 명을 내리니, 우문도웅과 사발략가한이 이끈 기병은 두 갈래로 나뉘어 빠르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문도웅이 군을 재촉해 급히 요하에 도착해 보니, 의외에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 *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더냐?”

우문도웅이 가리킨 강 건너엔 일만의 말갈 기병은 보이지 않고, 낭아봉을 쥔 장수 한 명만이 홀로 말 위에 올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역비가 강 건너를 유심히 살피니, 낭아봉을 쥔 장수의 뒤로 제방 역할을 하는 낮은 언덕이 보이는데, 이 언덕 뒤로 군사를 숨겨 매복하기 좋아 보였다.

“저자가 강이식이 분명합니다. 대실호연이 보낸 서찰엔 분명 상장군 주용과 함께 말갈 기병 일만을 이끌고 나간다 했으니, 아마도 저 언덕에 매복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유역비의 설명에 우문도웅이 언덕으로 시선을 옮겨 천천히 살펴보았다.

과연 군사를 숨겼다가 자신들이 요하를 넘어오면 일거에 활을 당기며 언덕을 올라 강을 건너오는 자신들을 급습하기 용이해 보였다.

“숨어서 활을 당기고 언덕을 질주해 강을 건너오는 우리에게 돌격하여 타격을 주겠단 속셈이로군. 대실호연의 서찰이 없었다면 급히 강을 건너다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야.”

“…….”

“역시, 하루 정도는 우리를 막을 방책이 있다고 생각할 만해. 을파소의 후예 을지문덕이 괜히 비범하다 유명한 것이 허명은 아니었어.”

오만의 기병이라도 방심한 상태에선 매복하여 급습하는 일만의 기병에게 타격을 받기 마련이라 우문도웅의 반응은 당연했다.

“어차피, 우리가 수를 모두 간파한 상태라 위험 요소는 없습니다만, 적을 도발해 몸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하면 좋은가?”

우문도웅의 물음에 유역비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담아 답했다.

“여유롭게 홀로 말을 타고 강가를 거닐고 있으니, 우리도 맛을 보여줘야겠지요. 창을 잘 쓰는 선우정기를 내보내 혼쭐을 내라 명하십시오.”

유역비의 제안을 받아 우문도웅이 선우정기를 불러 강이식의 목을 가져오라 명하니, 선우정기가 긴 창을 쥐고 강가에 서서 강 건너 강이식에게 호령하였다.

“뭐 하는 놈인데 혼자 나와 배회하느냐? 내 창 맛을 한 번 보겠느냐?”

선우정기의 호통에 강이식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낭아봉을 땅에 꽂아 세우고는 대뜸 어깨에 멘 활을 내려 살을 날렸다.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도 빠르고 예상치 못해 멀쩡히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이마로 받은 선우정기가 말 위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죽여 달라고 애원할 놈 또 있느냐?”

활을 어깨에 다시 메고는 낭아봉을 쥐며 강이식이 크게 소리치니, 강가가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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