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83화 (83/328)

083화 속고 속인다. (8)

고구려군이 쫓는 공손향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살육을 펼쳤던 대실호연의 사저였다.

하윤과 상의하기 위해 돌아온 대실호연은 공손향이 머문 별채로 그를 불러 정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대실호연의 말을 끝까지 조용히 듣던 하윤이 눈을 빛내며 대실호연을 축하하였다.

“합하, 경하드리옵니다.”

“뭐를 말인가?”

“합하께서 내년에 반드시 고구려의 태왕이 되실 것입니다. 공녀님은 이 전쟁, 합하의 공이 가장 커, 대승으로 마무리될 것이라 우문도웅께 전하십시오.”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고구려왕이 돌궐을 치러 가 서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데, 어찌 대실호연께서 고구려 태왕이 되실 수 있단 말이요?”

“…….”

“전쟁이 이 고구려 땅에서 벌어져야지, 혹여 돌궐 땅에서 벌어져 돌궐과 북주가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고구려군을 맞아 이긴들 다시 군을 꾸려 고구려 원정을 와야 하는데 그땐 내후년쯤이나 되지 않겠소?”

하윤의 말에 공손향이 답답해하며 물으니, 하운이 차분히 답하였다.

“왜 돌궐 땅에서 태왕의 대군을 맞아 싸웁니까? 생각을 바꾸시지요.”

“하면, 주군께 아뢰어 당장 군을 끌고 고구려를 치잔 말이요? 이제 곧 가을인데, 군을 준비해 고구려에 오면 겨울이 되지 않겠소?”

공손향의 이 물음에 하윤이 생각한 계책을 차분히 설명하였다.

“요동성 성주로 합하를 임명한 것은 아마도 태왕이 전날 참사로 인해 합하를 신뢰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돌궐 땅에서 싸우지 않습니다.”

“음…….”

“돌궐과 북주의 대군은 요하를 넘어와 요동벌에서 태왕의 대군과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이때 요동성 성주인 합하께서 우문도웅의 편을 드신다면 태왕의 대군은 보급도 끊기고 앞뒤로 적을 맞아 지리멸렬하게 될 것입니다.”

하윤의 말에 공손향도 차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표정을 읽으며 하윤이마저 계책을 설명하였다.

“공녀님께선 돌아가 우문도웅께 비밀리에 군을 준비하여, 내년 이월 중순에 전격 진군해 삼짇날 전까지 비호같이 요하를 넘으라 하십시오. 그리하면 원정에 나서던 고구려군은 요동벌에서 돌궐과 북주의 날랜 기병과 대회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거 좋다! 역시 하윤이다! 하하하.”

대실호연이 크게 만족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공손향도 하윤의 계책에 탄복해 찬사를 보냈다.

“하 군사는 장량과 제갈량보다 그 수가 낮지 않으니, 합하의 천복이십니다. 호호호.”

이들이 매우 기뻐할 때, 막리지가 된 연태조는 태왕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하여 을지문덕을 자신의 집으로 청하였다.

* * *

“합하, 대장군과 상장군도 제가 청하여 함께 왔습니다.”

을지문덕이 자신의 뒤에 선 고구려의 맹장 강이식과 주용을 가리키며 연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미리 예상했는지 연태조가 찻잔이 마련된 자리에 앉도록 권하였다.

“그러리라 생각하여 미리 자리를 준비했소. 앉으시지요.”

모두가 자리에 앉으니, 연태조가 대뜸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전날 제가회의에서 대대로에 올랐었으니, 귀족들 이목도 있고 하여 폐하께서 나를 막리지에 임명하신 것은 이해하고 있소. 헌데…….”

연태조가 잠시 뜸을 들이자, 을지문덕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하였다.

“물으십시오.”

“그래 묻겠소. 어찌하여 대실호연을 요동성 성주로 임명하신 것이며, 내년 삼짇날 출병할 것을 모든 대소 신료들이 듣는 자리에서 명하셨고, 우리가 멀리 원정에 나사지 않아도 쳐들어올 적인데 수성을 하며 격퇴하지 않고 폐하계서 직접 원정을 나서시는 연유 또한 무엇이오?”

세 가지 물음 중 대실호연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어 주용이 놀라 연태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연태조가 헛웃음을 흘리며 추가로 말하였다.

“내가 어제 연회에 있었는데, 살수들은 대실호연의 목을 가지러 왔다면서도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더이다.”

연태조의 말에 을지문덕이 크기 웃으며 화답했다.

“하하하, 그리하여 그를 요동성 성주에 앉힌 것입니다.”

“그가 원정군이 떠난 뒤, 요동 일대를 장악하면 어찌할 것이오?”

연태조가 다시 물으니, 을지문덕이 마저 답했다.

“원정군이 요동성을 떠날 때쯤, 이미 소식을 접한 북주와 돌궐은 비밀리 대군을 준비해 급히 기병을 끌고 요하를 건너올 것입니다. 하여, 원정은 없을 것입니다.”

“뭣이라? 그러하다면 더 큰일 아니오? 우리가 준비한 원정군이 적을 맞아 요동벌에 진을 치고 싸울 때, 만일 대실호연이 배신하여 요동성에서 보급을 끊고 뒤를 치면 원정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되는 것 아니오?”

이 물음에도 을지문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답하였다.

“이미 막리지께서도 대실호연 그자가 배신할 것이라 생각하시는데, 뒤통수 맞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

“그자가 움직일 때, 이미 준비한 이가 그의 목을 벨 것이고 그를 믿고 진군한 돌궐과 북주만 낭패를 보겠지요. 속고 속이는 간계와 술책 속에 누가 최후에 속을지… 하하하.”

을지문덕의 호쾌한 웃음이 꽤 멋들어지게 울려 퍼졌다.

‘이 모든 것이 원하는 곳, 원하는 시일에 적을 끌어들여 싸우기 위한 을지문덕의 계획이었구나.’

연태조는 을지문덕의 치밀함에 내심 탄복하였다.

* * *

“너희는 이제 북주와 돌궐에게 적이 되었다. 내가 일전에 너희를 중히 쓰겠다고 약조했듯이, 너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노라.”

을지문덕의 말에 기 씨 사 형제가 무릎 꿇어 명을 받았다.

“총관, 하명만 하십시오. 우리 사 형제 은혜를 갚고 공을 세워 보답하겠나이다.”

기룡마저 합류한 기 씨 사 형제의 기세가 높아 을지문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희는 이 길로 안시성에 가, 양만춘 성주를 만나거라. 그가 너희에게 길을 설명할 것이니, 네 갈래로 떠나면 대기한 기병이 있을 것이다.”

“네.”

“그들을 이끌고 홍산 적봉진에 가서 총관 건무 저하와 부총관 온달의 명을 따르거라. 곧 있을 전쟁에서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 온달을 언급하니, 기 씨 사 형제가 모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치 빠른 기악이 재빨리 고개 숙여 명을 받았다.

“낙랑 사냥 대회의 대영웅 온달님을 모시며 반드시 공을 세우겠나이다.”

홍산 적봉진의 온달 일행은 가을이 되자, 개마무사 일천과 경기병 일천을 끌고 나타난 기 씨 사 형제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이들이 전한 을지문덕의 서찰에 온달은 의심 없이 기 씨 사 형제를 수하로 받아들였다.

* * *

대실호연의 도움으로 요하를 건넌 공손향은 바로 돌궐로 향했고, 우문도웅과 천금 공주는 사발략가한에게 청하여 고구려 원정을 떠날 대군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비밀리에 군을 준비하여 이월 중순에 전격 진격해 삼짇날 전 요하를 건너야 했기에, 우문도웅과 사발략가한이 이끈 선발대와 본대는 기동성을 중시한 기병 위주였다.

보급 부대와 공성 병기를 운반하는 후발대는 시일을 두고 각기 따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만의 기병을 우문도웅이 이끌고 선발대가 되었고, 사발략가한이 기병 십만을 끌고 뒤따르니,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서벌략가한은 자신과 우문도웅이 친히 출정하였음에도 전군 총사령관에 용병술이 뛰어난 만부장 이계찰(利稽察)을 임명했는데.

이계찰의 입장에선 자신보다 윗선을 둘이나 모시고 전쟁을 치르는 하늘 위에 하늘이 또 있는 옥상옥의 형국이라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공손향이 이끈 척후대가 나뉘어 상단으로 꾸며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자리한 거란의 영토에 진입한 후, 수나라의 영주총관부를 급습하여 고구려 침공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 결과 수나라 조정에서도 북주 잔당과 돌궐이 연합한 대군의 고구려 침공 첩보를 접하게 되었으나, 이리와 호랑이의 싸움을 구경하며 패한 세력의 배후를 취해 이득을 보고자 주시하고만 있었다.

대돌궐 총사령관 공손성을 편전에 조용히 부른 수의 황제 양견의 곁엔 그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수나라의 황후인 당대의 여걸 독고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총사령관, 오랜만이에요. 영주총관부가 북주 잔당에게 공격받았다던데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던가요?”

독고황후가 황제 양견보다 먼저 공손성에게 물었으나, 그녀가 황제보다 앞서는 행동이 늘 있는 일인지라 공손성은 담담히 받아들이며 답하였다.

“척후대를 지휘하는 공손향이 상단으로 위장하였기에 실상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영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쉽게 함락된 듯하옵니다.”

공손성의 말속엔 영주자사 고보녕(高保寧)이 돌궐과 내통하여 성을 그대로 바쳤음이 담겨 있었다.

“허면, 군을 보내 영주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양견이 공손성에게 의견을 물으니, 이번에도 독고황후가 나사며 말을 끊었다.

“아니지. 아니야. 영주자사가 고 씨라 께름칙했는데 역시나 적과 내통하였군. 뭐, 영주총관부는 언제든 적의 공격에 불타고,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는 곳이야.”

“…….”

“급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지. 그곳엔 요택과 더러운 거란인만 살 뿐이고 주위는 돌궐과 고구려, 말갈뿐인데 뭐 그리 가치가 있다고 서두를 것 없지.”

황제 양견에게 하대를 하듯 말하는 독고황후의 언행은 이미 수나라 문무백관들에게 익숙했다.

심지어 황제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 그녀가 칼을 휘두르며 정전에 쳐들어와 양견의 뒤를 쫓기까지 하였기에, 독고황후의 이런 태도에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하오면, 황후께서 생각한 바가 있소이까?”

오히려 황제 양견이 독고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물으니, 독고황후는 양견에게 답하지 않고 공손성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기병 십만을 준비하여 그동안 돌궐에게 당한 치욕을 씻을 준비나 하세요.”

“황후는 고구려가 돌궐을 이기리라 생각한 것이오?”

양견의 이번 물음에 독고황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답을 하였다.

“고구려와 돌궐의 싸움에서 돌궐이 이길지, 고구려가 이길지 그거야 누가 알겠냐마는, 어쨌든 우리의 영주총관부를 공격한 책임을 돌궐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고구려는 성이 많고 수성에 능하여 쉽게 점령하지 못하나, 대군이 빠져나간 돌궐에 우리가 군을 이끌고 들어가면 돌궐 놈들은 제 땅도 버리고 멀리 튈 것이니, 우선 돌궐을 치는 것이 명분도 있고 실리도 있겠지요.”

“…….”

“그러니 공격 방향을 당연히 그곳으로 정해야지요. 아니 그렇소? 폐하.”

그녀의 말에 양견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며 중얼거렸다.

“하긴, 돌궐을 복속시켜 놓고, 이번 기회에 고구려에게 은혜를 베풀며 고구려왕에게 관직을 내려 충성케 하는 것이 가장 쉽고 이득이겠구려. 역시 황후요.”

이렇게 당대의 가장 큰 세력들인 수나라와 고구려, 돌궐과 북주 잔존 세력이 각기 대군을 이끌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가운데.

머나먼 북방 초원에서 온달과 건무도 홍산 적봉진의 군을 이끌고 나서니, 대족장 카사르가 자신의 올루스마저 이끌고 뒤를 따르며 지원에 나섰다.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에 도착하여 출병을 준비하던 고구려군에게 돌궐과 북주 잔존 세력이 대군을 몰아 진군 중이었다.

그러면서 이미 공손향이 척후대를 이끌고 수나라의 영주총관부마저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성을 주장하는 귀족들에 의해 급히 회의가 열렸다.

“우리 고구려는 성이 높고 튼튼하여 청야전술을 펼쳐 수성을 하면 아무리 대군이라도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

“원정을 위해 준비한 십만 정병 이외에도 각 성을 수비하기 위해 배치된 군사들이 있으니, 이들을 활용하심이 옳다 사료되옵니다. 더구나 적은 기병 위주라 공성전에 약하니 이곳 요동성에서 적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귀족들의 중론에 대실호연이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출병을 주장하기를 바라자, 아니나 다를까 을지문덕이 나서며 말하였다.

“모든 의견이 옳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들은 급히 몰아오느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수성은 우리가 유리할 것입니다.”

귀족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을지문덕이 서두를 꺼내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허나, 청야전술을 펼치고 수성을 벌이면 농지가 불에 타 피폐해지며 독을 푼 우물은 다시 사용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피해는 다음 해와 내후년까지 이어질 것이니, 그다음에 있을 전란에 무방비해집니다.”

을지문덕이 그 다음에 있을 전란을 언급하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또한 우리가 수성을 하면 적은 기병이라 요동의 각 성을 돌아 수일 내로 평양성까지 내달릴 것이고, 후방의 각 성들도 청야전술로 수성을 하면 우리 고구려의 모든 국토가 황폐해집니다.”

“음…….”

“적을 치러 군을 끌고 나왔는데, 먼 길 갈 수고 없이 제 발로 적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원정을 위해 준비한 정병으로 바로 이 요동벌에서 적을 격파해야 하옵니다.”

을지문덕이 언급한 그다음에 있을 전란이란 수의 고구려 침공을 의미했으나, 이 의미를 이해한 이는 몇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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