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속고 속인다. (7)
“누이나, 동생 놈이나 시건방지긴 매한가지구나. 네놈의 목도 가져가마!”
공손향이 날카롭게 외치며 달려드니, 모용상과 단 사부가 동시에 그녀를 대적하게 되었다.
두 자루의 검을 빠르고 신묘히 놀려 모용상과 단 사부를 상대하는 공손향의 검술이 우위에 있어 모용상의 검끝이 흔들렸다.
이 빈틈을 매섭게 파고든 공손향의 검이 모용상의 어깨를 찔렀다.
“컥!”
모용상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니, 공손향이 더욱 매섭게 달려들었다.
단 사부가 모용상을 지키기 위하여 막아서지만, 공손향이 두 자루 검의 방향을 틀어 찔러 오니, 모두 막아 내지 못하고 옆구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그러나 단 사부도 만만치 않아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고도 악착같이 검을 휘둘러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한 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이들의 대결 중에도 흑의 사내들은 도망치는 오부 귀족들을 쫓으며 칼을 휘둘렀다.
또한 야수는 자신을 에워싼 호위 무사들을 대적하면서도 공손향에게 달려드는 호위 무사를 향해 몸을 날려 육중한 박도로 등골을 갈랐다.
야수의 거침없는 몸놀림에 호위 무사의 수가 삼십여 명이 넘어도 귀족들의 목숨을 지키기 어려워 보였다.
이때 박살 난 문으로 날랜 인영들이 나타나더니, 강이식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선예! 저 여인을 막고, 어득구와 창주는 사내놈들을 상대하라! 해권은 저 더벅머리 짐승 같은 놈을 잡아오너라!”
선예가 날쌔게 몸을 날려 탁자 위를 뛰어가며 철편을 휘두르자, 등 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공손향이 몸을 돌렸다.
공손향이 위험에 처하자, 야수가 허공에 몸을 붕 띄워 징검다리 밟듯 호위 무사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아 내달리다가 한 번 더 도약하여 선예의 등 뒤를 공격했다.
“너는 나와 백 합만 겨뤄 보자!”
해권이 선예를 돕기 위해 빠르게 달려와 야수의 앞을 막으며 검을 날렸다.
조의선인의 비검술이었다.
해권이 날린 검은 빠르고 정확히 야수의 왼쪽 어깨에 꽂혔으나, 그의 발을 멈추게 하지 못하여 선예도 야수의 박도에 등이 베어져 일격에 쓰러졌다.
선예를 제압한 야수가 몸을 돌려 해권을 향해 달려드는데, 선예가 스르르 몸을 세우며 야수를 향해 철편을 휘둘렀다.
“이년이 속에 철갑을 둘렀구나!”
선예가 등을 돌리자, 그녀의 등에 피가 흐르지 않음에 공손향이 깨닫고 크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야수를 향해 날아든 철편은 그대로 그의 목에 감겼다.
그 모습을 본 선예가 철편을 뒤로 끌어당겼으나, 야수는 목이 감겨 오는 극심한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권에게 달려들며 박도를 휘두른 그의 모습에 오히려 철편을 쥔 선예의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야수의 박도를 검으로 막은 해권의 눈에 야수가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달려와 그대로 머리를 들어 자신의 이마를 내리찍는 게 들어왔다.
야수에게 끌려가던 선예는 뒤에서 공손향이 덤비니 어쩔 수 없이 철편을 놓고는 몸을 굴려 피하는데, 이 바람에 목의 저항이 사라진 야수의 머리가 해건의 이마를 박살내듯 들이받았다.
“저놈, 저거!”
수하들이 위험에 처하자 강이식이 낭아봉을 쥐고 달려 나가려 하니, 을지문덕이 그의 소매를 잡아 세우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년이 우두머리 같은데 죽이진 마십시오.”
“해보고 나중에 말합시다.”
마음이 급한 강이식이 옷소매를 털어 을지문덕의 손을 떼어 내고는 몸을 날렸다.
을지문덕은 야수의 머리에 낭아봉을 휘두르고는 야수가 피하자, 땅에 발이 닿는 탄력 그대로 공손향을 향해 뛰어올라 낭아봉을 휘둘렀다.
공손향이 위험에 처하자, 흑의 사내 둘이 창주와 어득구의 공격을 무시한 채 강이식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강이식은 등 뒤로 시선도 옮기지 않고 왼팔을 뻗어 가장 먼저 달려온 흑의 사내의 멱살을 쥐었다.
그는 사내를 공선향을 향해 집어 던진 후, 재빨리 몸을 돌려 연이어 덤벼든 흑의 사내의 가슴팍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이때 바닥을 굴러 낭아봉을 피했던 야수가 두 자루의 박도를 휘두르며 옆에서 덤비니, 강이식이 급히 낭아봉을 휘둘러 막았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튀기는 그 사이로 야수의 사나운 얼굴이 나오더니 흉측한 아가리를 벌려 강이식의 목을 콱 물었다.
“이놈이 정말 짐승처럼!”
야수에게 목을 물린 강이식이 크게 노해 왼손으로 야수의 안면을 후려쳐 떼어 내고는 낭아봉으로 마무리하려 들었다..
그러자 야수가 땅을 굴러 피한 후 공손향을 옆구리에 끼고는 하늘로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
“그래, 가거라. 이 징그러운 놈아. 저리 나는 기술은 어디서 배우나?”
을지문덕이 여인은 죽이지 말라 당부한 것을 상기하면서 강이식이 어두운 밤하늘 위로 솟구쳐 지붕 위를 날듯 달리는 야수의 뒷모습에 허탈이 중얼거렸다.
그에겐 야수를 물리칠 무력은 있어도 야수처럼 절정의 경공은 익히지 못하였으니, 뒤쫓지 않은 것이다.
야수에게 물려 뜯긴 그의 목덜미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야수의 뒤를 창주가 검은 망토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야수보다 우월한 경공으로 소리 없이 뒤쫓으니, 을지문덕이 그제야 안심해 바닥에 쓰러진 흑의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손향이 사라지자 대실호연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쓰러진 흑의 사내들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네놈들이 내 집을 습격한 목적이 무엇이더냐!”
“네놈 집에 네놈 목을 받으러 오지, 왜 오겠느냐? 고무와 고강이 비록 네놈들에게 잡혔지만, 우린 그들에게 약조한 대로 고구려 대대로 대실호연의 목을 취하러 온 것이다!”
흑의 사내가 기세 좋게 소리치니, 누구도 대실호연이 외적과 내통했으리라 생각할 수 없게 하여 그를 돕는 형국이 되었다.
‘북주 것들과 내통한 대실호연이 자신의 집에 제가회의를 열 때부터 이런 사달이 날 것을 의심했어야 했건만. 내가 경솔하였다.’
을지문덕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느끼며, 다음 상황을 파악했다.
‘분명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살수들의 퇴로 역시 이곳에 미리 준비되었을 것이다. 이 일로 대실호연은 북주와 내통했으리란 의혹에서 자유로워지며 고무와 고강의 목숨은 보전키 어렵게 되었구나.’
을지문덕이 이런 생각을 하며 탄식과 함께 눈짓을 보내니, 강이식이 발끝으로 훅의 사내의 안면을 걷어차 기절시키며 엄히 말하였다.
“자객이란 말이로군. 그래, 너희는 우리가 잡아다가 더 물어야 하니, 지금은 잠시 쉬거라.”
을지문덕이 주위를 둘러보니, 제가회의에 참석한 오부 귀족 중 상석에 자리한 대실호연과 연태조만이 상한 데 없이 온전하였다.
“해권은 이 두 놈을 압송하고, 어득구는 총관부 정병을 이끌고 그 두 년놈을 잡아 오너라. 북문으로 향하는 동안 창주에게서 연통이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은 명을 내리며 상석에 자리한 신구 두 대대로에게 허리 숙여 예를 표하였다.
“두 분이 무사하시어 그나마 다행이옵니다.”
* * *
다음 날, 태왕의 수조하지처(受朝賀之處)인 정전(正殿)으로 부름이 없었음에도 신료들이 몰려와 웅성거렸고, 대실호연과 연태조가 나란히 등청(登廳)하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이들 신료들의 행태를 내려다보는 태왕의 눈빛이 차가웠다.
살수들이 자신의 목을 노렸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실호연이 뻔뻔스럽게 태왕의 앞으로 나와 머리 숙여 전날의 참사를 고하며 울분을 토했다.
“폐하, 북주 잔당의 우두머리 우문도웅과 돌궐의 사발략가한(莫何可汗)이 어찌 이리도 오만불손할 수 있사옵니까. 중원에서 쫓겨나 이젠 나라도 아닌 북주와 한때 우리 고구려를 섬겼던 돌궐이 감히 제가회의에 살수를 보냈으니, 이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사옵니다.”
“…….”
“폐하와 오부 귀족을 능멸한 아사나섭도(阿史那攝圖, 돌궐 사발략가한의 본명)와 우문도웅의 침공에 대비하여야 하옵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중원의 황제국, 북주(北周)의 무제 우문옹은 강성한 돌궐과 화친을 맺고자 목간가한의 딸을 황후로 맞았고.
그녀는 북주의 무성황후(武成皇后)가 되었는데, 돌궐 가한의 성이 아사나 씨라 하여 아사나 황후라고도 불리었다.
목간가한의 뒤를 이어 동생 타발가한(佗李垠佑)이 세력을 넓히자, 북주는 또다시 화친을 맺고자 아름답기로 천하제일인 천금 공주를 그에게 바쳤다.
천금 공주는 탁발가한이 세상을 떠나자, 가한의 동생 아사나섭도가 사발략가한에 오르며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으니, 바로 이 천금 공주가 현재 북주 잔존 세력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대실호연에 이어 기골이 장대한 대모달 주용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큰소리로 아뢰니, 사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도대체 북주 황실과 돌궐 가한의 족보가 어찌 되는 개족보인지 모르오나, 이런 행위나 일삼는 것은 신라 것들과 다를 바 없는 잡놈들임이 분명합니다.”
주용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이어 나갔다.
“제가 개마무사를 이끌고 끝없이 서로 진격하여 이것들에게 본디 사람이 지녀야 할 예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나이다. 더불어 천금 공주가 아직도 천금 이상의 가치가 있는지 대면하여 태왕 폐하께 바치겠나이다.”
대모달 주용은 강이식의 무용에 가려 있었으나, 대장군 고강과 강이식 다음 가는 무관으로 온달보다 체격이 컸다.
또한 강이식보다 무예가 떨어지지만 저돌적인 성격으로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위인이었다.
평양성 수비를 담당하고 있어 낙랑 사냥 대회에 참관하지 못하였으나, 만일 그가 참관하였다면 평소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목원의와 우연순이 함부로 변란을 꾸미지 않았을 것은 분명했다.
성격이 거침없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아마도 목원의와 우연순의 계획이 성공하여 평양성에 돌아왔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일 먼저 주용의 목을 베고 그다음에 강이식과 을지문덕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어허! 대모달은 폐하 앞에서 어디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고작 그대의 무용이나 뽐내고자, 머나먼 원정을 떠난단 말이오? 지금은 수성할 때요. 자중하시오!”
대실호연이 평소답지 않게 엄히 주용을 꾸짖었으나, 주용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당당히 서서 태왕을 올려다보았다.
“주용, 그대의 말이 옳다. 아사다 씨가 너무도 겁이 없구나. 천금 공주를 믿고 우리 고구려를 넘보는 우문 씨도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필요도 있고…….”
늙은 태왕이 충성스런 주용을 내려다보며 말하다가 대실호연과 연태조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로 진격하여 돌궐을 정벌하고 북주 잔당을 뿌리 뽑겠노라.”
“폐하, 어찌…….”
대실호연이 놀라 태왕의 말을 감히 끊었으나, 연태조가 나서며 평원 태왕의 하교(下敎)를 거들었다.
“받들어 적겠나이다. 태왕 폐하의 친정은 언제로 하오리까?”
평원 태왕은 손을 들어 연태조의 말을 받아 다시 명하였다.
“내년 삼짇날 전, 요동성에서 출정하겠노라.”
태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내년 봄 정벌에 나선다 하니, 대실호연이 놀라 다급히 소리 높였다.
“하오나, 폐하! 현재 우리 고구려의 북방 요충지 요동성 성주와 군권을 쥔 대장군이 부재이오며, 요동 각 성을 장악했던 태대형 목원의와 태대사자 우연순의 빈자리가 있사오니, 내부가 안정되지 못하여 멀고 먼 원정은 불가하옵나이다.”
평원 태왕은 대실호연의 지적을 기다린 듯 미리 준비한 계획을 망설임 없이 쏟아내었다.
“잘 말하였다. 그대의 우려가 모두의 근심이라, 미리 마련한 안이 있노라. 을지문덕은 앞으로 나와 대신해 내 뜻을 문무백관에게 전하거라!”
태왕의 부름에 을지문덕이 예의 여유롭고 평온한 표정으로 나와 차분하면서도 낭랑히 외쳐 전하니, 모두가 무릎 꿇고 태왕의 명을 받았다.
“고구려의 군권을 쥔 대장군과 대대로 다음 직책인 태대형과 태대사자의 자리가 부재인 터, 폐하께서 명하시길. ‘대대로를 대체할 직책으로 막리지를 새로 만들어 군권과 인사권을 담당케하라!’ 하시었다.”
“…….”
“모두에게 이르노니, 이 막리지는 제가회의에서 선출된 대대로와 달리 태왕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시어 그 정당성과 권위, 권한을 강화하노라.”
대대로를 없애고 태왕이 임명하는 막리지를 새로 만든단 소리에 오부 귀족들의 안색이 변하였다.
그러나 낙랑 사냥 대회부터 전날 제가회의에 이루기까지 너무도 많은 피를 본 터라 함부로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연태조는 앞으로 나와 명을 받으라!”
을지문덕이 연태조를 지목하자, 머리를 조아린 대실호연의 심중에 화가 끓어올랐다.
“연태조는 태왕께서 막리지에 임명하니, 폐하와 고구려를 위하여 군권과 인사권을 받들라!”
“삼가 연태조, 태왕 폐하의 명을 받사옵나이다.”
연태조가 절을 올리며 명을 받으니, 을지문덕이 다시 태왕의 명을 전하였다.
“요동성 성주로 대실호연을 임명하여 대고구려의 북방 요충지 수호를 맡기며, 막리지의 지휘를 받아 군을 이끌 대장군에 강이식을, 상장군에 주용을, 요동 서부총관부 총관에 을지문덕을 임명하니, 결코 허술함이 없이 직분을 다하길 바란다.”
대실호연과 강이식, 주용이 엎드려 명을 받으니, 을지문덕도 이들의 뒤에 엎드려 태왕에게 절을 올렸다.
“막리지는 당장 대장군 강이식, 상장군 주용과 논하여 요동 각 성의 군과 목원의 우연순의 사병을 편입하고 정벌 준비를 진행토록 하라! 또한 서부총관 을지문덕과 요동성 성주 대실호연도 북방을 안정키 위하여 서둘러 출발하기 바라노라.”
태왕의 명이 내리자, 모두가 엎드려 받았다.
‘하루 만에 이런 명을 준비했을 리 없다. 이미 을지문덕 저자와 태왕이 사전에 논의한 것이 틀림없다. 돌아가 하윤과 상의해야겠구나.’
대대로의 임기가 끝난 상태에서 요동성 성주의 자리를 얻은 터라, 불만을 표할 수도 없는 대실호연으로서는 이 순간 책사 하윤의 조언이 절실했다.
이런 대실호연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던 강이식이 을지문덕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두 년놈을 쫓아간 창주에게서 연락은 왔소?”
공손향과 대실호연의 행방을 물은 것이다.
“그게 말입니다. 창주 말로는 평양성 지붕 위를 빙빙 날아 다시 저자의 집 별채로 들어가 숨더랍니다. 허허, 참. 창주가 쫓지 않았다면 누가 거기 숨을 거라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교활한 것들입니다.”
“뭐요? 그럼 잡아들여야 하지 않소?”
강이식이 놀라 물으니, 을지문덕이 큰소리 내지 못하게 자신부터 소리 죽여 말하였다.
“쉿, 소리가 높습니다. 어차피 죽은 이 돌아오지 않고 일은 벌어졌으니, 우린 그 두 년놈은 물론이요. 대실호연도 잡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요동성 성주에 앉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