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81화 (81/328)

081화 속고 속인다. (6)

“나의 아우 고무와 대장군 고강이 우문도웅의 서찰을 받았단 말인가?”

태왕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답하는 강이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그대들이 부린 기 씨 삼 형제의 뒤를 북주 간자가 미행하였고, 간자들이 머문 약방에 대실호연이 방문하였고?”

“그러하옵니다.”

“허면, 그대들은 대실호연이 간적이라 판단한 게로군.”

“그러하옵니다.”

“헌데, 왜 대실호연을 잡아들이지 않은 것인가?”

태왕의 이 물음에 을지문덕이 대신 나서 차분히 답하였다.

“고무와 고강을 추포하고 대실호연은 모른 척함이 장차 북주와의 전쟁에 이롭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 우리 고구려의 요충지를 지키는 요동성 성주와 고구려의 군권을 지닌 대장군보다 간적의 안위가 더 중요하단 말이더냐?”

태왕의 물음에 노기가 실려 있어 강이식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여전히 평온한 눈빛을 유지한 채 답하였다.

“고무와 고강을 추포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계책이 성공하였다 믿고 방심할 것입니다. 병법에서 이르길 방심한 적을 깊이 끌어들이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줄로 아뢰나이다.”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태왕은 긴 한숨 한 번 내쉬고는 강이식에게 명하였다.

“총관은 서둘러 요동성 성주 고무와 대장군을 추포하여 나를 대신해 국문토록 하라.”

* * *

대장군 고강과 동생 고성이 추포되고 며칠 뒤.

요동성 성주 고무마저 서부총관부에 추포되어 평양성으로 압송되자, 오부 귀족은 물론이요.

고구려 민심마저 흔들려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강이식과 을지문덕이 정권을 잡고자, 귀족들을 모두 잡아들인다.

—북주가 간자를 보내어 내통한 이들을 잡아들이느라 더 많은 귀족들의 희생이 있을 것이다.

—목원의와 우연순의 사병들도 흡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장군과 요동성 성주마저 추포되었으니, 장차 고구려군은 누가 이끈단 말인가?

여러 말들이 오가고 이 소문은 곧 우문도웅에게도 전해질 것이 분명하였다.

적을 속이기 위한 방책이라도 내부가 술렁이며 사기마저 저하되니, 서부총관 강이식의 고민도 함께 커져만 갔다.

“총관, 오늘 제가회의가 있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고심도 모른 채 태연히 들어오며 말을 건네자, 강이식은 탄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뭐가 그리 좋아 표정이 밝은 게요? 오늘 오부 귀족들이 모여 온갖 망상과 우리를 성토할 것인데.”

“총관의 시름이 크군요. 아무튼, 대대로를 선출할 것 아닙니까? 내일이면 폐하께 선출된 대대로를 아뢰겠지요. 시기가 왔으니, 즐겁지 않습니까?”

“뭐가 즐겁소? 내일 또 다른 원망이 우리를 향할 것인데, 을지 공, 성격이 원래 그렇소?”

“하하하, 내 성격이야 원래 그러하지만, 담대했던 총관의 성격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을지문덕이 여전히 농을 거니, 강이식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져 갔다.

그때 해권이 들어와 아뢰니, 그제야 얼굴이 조금 펴지는 강이식이었다.

“약방의 간자들이 움직였습니다.”

“뭣이라? 그래 어디로 향하더냐?”

팔을 걷어붙이는 강이식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쫓아가 분풀이할 기색이었다.

“제가회의가 열리는 대대로의 집 방향입니다.”

“뭐라?”

불길한 기미에 강이식이 놀라 을지문덕을 바라보자, 을지문덕도 공손향의 행동이 의외라 잠시 말이 없더니, 일어나 강이식을 재촉하였다.

“우린 초대받지 않았으나, 못 갈 곳도 아니니 채비를 하시지요. 해권 너도 창주와 선예, 어득구를 데리고 따르거라.”

* * *

제가회의가 열리는 대실호연의 사택.

목원의와 우연순이 죽어 경쟁자 없이 대대로에 오르는 연태조가 못마땅한 귀족들은 각 부의 대가와 대실호연에게 위임장을 전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겨우 십여 명의 귀족만이 후원에 마련된 연회석에 자리했고, 이들의 등 뒤로 수행인들이 서서 이전 제가회의와 달리 꽤 조촐하였다.

더 참석할 이가 없음을 깨달은 대실호연의 제안으로 제가회의는 큰 논의 없이 새로 대대로가 된 연태조를 축하하는 연회로 바뀌었다.

“합하, 들어오면서 보니 문에서부터 후원에 이르기까지 오늘 죽음을 맞는 이들이 상당하였습니다.”

상석에 대실호연과 나란히 앉은 연태조에게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이 소리 죽여 속삭였다.

“뭐라? 음, 그중에 우리 일행도 있더냐?”

연태조가 함께 동행한 모용상과 단 사부를 포함하여 안위를 물은 것이다.

“우리 일행 중엔 없으나, 이 연회석에서도 많은 이가 명을 달리합니다.”

연태조가 술잔을 들어 마시며 모용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누구 짓이더냐? 저자더냐?”

“문을 지키던 대실호연의 수하들도 죽으니, 저자의 소행이라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봉두난발한 사내와 흑의 사내들의 소행이온데, 지금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용설의 답변에 연태조는 술을 권하는 대실호연에게 환히 웃으며 화답하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족한 이 연태조를 다시 선임하여 주시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신망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연태조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니, 대실호연을 비롯한 귀족들이 모두 소리 높여 화답하였다.

“대대로를 믿고 따르겠소이다.”

연회에 참석한 오부 귀족들에게 연태조가 눈을 일일이 맞추며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 앉으며 모용설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상이와 단 사부에게 조심하라 전하거라.”

* * *

문을 지키는 사병이 자신들의 앞에 선 백의 여인과 흑의 사내 둘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오셨는지요?”

제가회의에 참석차 온 오부 귀족의 일행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여인의 화사한 미모와 기품 있는 태도가 범상치 않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내가 여길 온 이유를 말해야 하는가? 후원에서 제가회의 중이라 들었는데, 우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왔다네.”

“혹여, 안에 일행이 있으신지요?”

“일행은 없고 볼 사람들이 좀 있지.”

오부 귀족의 일행도 아니면서 제가회의 장소에 들어가겠단 여인의 말에 문을 지키는 사병들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니, 하윤이 웃으며 다가와 여인에게 정중히 되물었다.

“안에 전하실 말씀이 계시면 제게 하여 주십시오.”

“그대에게 전하면 되는가? 그럼 북주의 공손향이 고구려의 대대로 대실호연의 목을 가지러 왔으니, 대실호연은 냉큼 나와 목을 길게 늘어뜨리라 전하시게나. 호호호.”

공손향의 이 말에 문을 지키는 사병들의 표정이 변하며 일제히 병장기를 빼어 들었고, 하윤은 공손향의 오만한 태도에도 변함없이 웃으며 답하였다.

“합하께서는 이제 대대로가 아니시나, 안에 들어가 북주에서 살수가 왔다 전하겠습니다. 여기 잠시만 계시지요.”

공손히 뒤돌아서며 안으로 향하던 하윤이 손짓으로 사병들을 불러들이며 차분히 명하였다.

“합하를 뵙고 나올 때까지, 저 년놈들을 무릎 꿇려 놓거라.”

공손향은 후원으로 향하는 하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자신들을 에워싸는 대실호연의 사병 십여 명을 둘러보며 빈정거렸다.

“그 수로는 내 뒤에 저 사내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더 데려오너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십여 장 떨어진 어둠 속에서 봉두난발한 사내가 양손에 박도를 빼어 들고는 질풍처럼 달려오는데 그 기세가 무척 사나웠다.

“저놈도 일행이다! 저놈을 막아라!”

사병들 중 우두머리의 외침에 봉두난발한 사내를 막기 위해 사병 서넛이 일제히 칼을 휘두르며 내달렸으나, 이내 곧 처참한 비명과 박도에 잘린 그들의 팔다리만이 밤하늘을 물들일 뿐이었다.

* * *

“송구하오나, 북주의 살수들이 합하를 노리고 찾아왔사옵니다.”

후원에 들어선 하윤이 큰소리로 대실호연에게 아뢰니, 모든 이가 놀라 술렁였다.

“나를? 북주에서? 허허, 형가의 역수가가 돌고 평양성 내의 수상한 이들이 있어 내가 사람을 붙여 확인 중이었는데, 기어코 살수가 제가회의마저 들이닥쳤구나. 그래 몇이더냐?”

대실호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장황스레 말하고는 하윤에게 물으니, 연태조를 제외한 모두가 그의 행동에 어색함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연태조는 내심 의문을 품으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상황을 살피었다.

“살수들은 여인 하나에 사내 둘이었습니다.”

어느덧 비명 소리가 크게 일고 있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고작 그 정도로 내 목을 취하려 하다니, 이 대실호연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 아닌가?”

대실호연의 사병들 이외에도 후원에는 오부 귀족을 수행 온 그들의 호위 무사들이 삼십여 명이나 있으니, 대실호연의 말이 아니라도 두려운 기색을 띤 귀족들은 없었다.

이때 단단히 닫혔던 후원 문이 박살나며 짐승의 눈빛을 한 봉두난발의 사내가 박도 두 자루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의 얼굴과 몸에는 사병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와 살점들이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 명이 더 있는데, 아직 못 보고 전하러 갔구나. 호호호.”

공손향이 뒤따라 들어오며 교태롭게 말하니, 연태조의 뒤에 서 있던 모용설과 모용상 남매가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공손향은 이들 남매의 시선을 즐기며 상석에 앉은 대실호연을 가리켜 물었다,

“진왕 정의 목을 베려던 형가의 마음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고구려 대대로의 목을 가지러 왔다. 누가 대실호연이냐?”

그녀의 도발에 살수가 고작 넷임에 우습게 여긴 오부 귀족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엄히 명하였다.

“감히, 대고구려의 제가회의에 와서 누가 이리도 오만방자하단 말인가? 당장 저 년놈들을 잡아 꿇리거라!”

그의 명에 호위 무사 삼십여 명이 일제히 내달렸고 이에 모용상과 단 사부도 달려 나가려 하자, 모용설이 이들의 소매를 잡아 세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합하의 명이다. 자리를 지켜라.”

이 소리를 들었는지 대실호연의 시선이 잠시 옮겨 왔으나, 호위 무사들의 비명 소리에 다시 시선을 이동하였다.

“야수!”

공손향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두 자루의 박도를 휘두르며 야수라 불린 사내가 호위 무사 속으로 뛰어들어 칼춤을 추니, 살이 튀고 피가 뿜어져 오르며, 제 몸을 벗어난 호위 무사들의 머리통과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광기 실린 야수의 기세에 질린 오부 귀족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흑의 사내 두 명이 날렵히 몸을 날려 탁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귀족들의 몸뚱이에 칼질을 해대었다.

겁에 질린 귀족들이 탁자 밑으로 숨고 울부짖으며 도망치기 시작하니, 흑의 사내들은 입가에 비웃음을 담고 하나하나 쫓으며 시퍼런 날을 번뜩였다.

“설아, 정녕 우리 일행은 무사하더냐?”

연태조가 점점 다가오는 공손향에게 시선을 두고 물으니, 모용설은 여전히 차분하였다.

“오늘은 저들에게 죽지 않사옵니다.”

모용설이 일부러 다가오는 공손향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답하였다.

“훗, 시건방지긴… 모용설! 네년의 헛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신선하구나.”

공손향이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고 대실호연이 아닌, 연태조를 향해 한 발 나서니.

모용상과 단 사부도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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