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80화 (80/328)

080화 속고 속인다. (5)

더벅머리에 짐승 가죽을 걸친 거구의 사내가 양쪽 허리춤에 커다란 박도 두 자루를 차고 당당히 눈앞에 서자, 평양성의 북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여편네가 아침부터 꿈자리가 좋지 않다며 나가지 말라더니, 이런 험악한 놈을 대하는구나.’

그들은 사내의 눈매가 건들면 달려들 듯 사나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선 수문장이 도끼눈으로 노려보니 엄히 살피지 않을 수 없어 꺼림칙한 심정으로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뭐 하는 놈이고? 어딜 가는 중이더냐?”

경비병의 물음에 더벅머리는 가려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매섭게 뜨고는 입꼬리를 실룩 움직이더니, 엄지를 치켜들어 뒤에 수레를 가리켰다.

“멧돼지 잡아 팔러 가는 놈이요.”

그의 건성건성 하는 답변에 경비병 둘이 수레를 덮은 거적때기를 창끝으로 들춰 보니, 금방 잡은 커다란 멧돼지 세 마리가 실려 있었다.

“이것을 너 혼자 끌고 온 것이냐?”

수레에 실려 있어도 멧돼지가 세 마리나 되니 혼자 끌고 왔으리라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원래 배달은 내가 하지 않으나, 오늘은 다들 바빠 나 혼자 왔소. 북문 안 저잣거리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는 유 씨에게 가는 길이오.”

푸줏간 유 씨라면 십여 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중국인으로 진나라 출신의 한족이었다.

“모양새가 말갈족 사냥꾼인가 보군. 어디 수레를 혼자 끌 수 있는지 보자. 보내주거라!”

뒤에 선 수문장이 더벅머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길을 열어주라 명하였고, 더벅머리는 힘든 기색도 없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 모든 이가 그의 괴력에 놀라고, 서늘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짐승의 눈빛에 또 한 번 놀라 일제히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덜덜덜.

수레를 끌고 멀어져가는 더벅머리의 등 뒤로 경비병들이 소리 죽여 말하였다.

“눈 꼬라지가 왜 저래?”

“그러게 꼭 미친개 눈깔 같구먼.”

이런 수군거림을 더벅머리도 들었는지 순간 걸음이 멈추었으나, 이내 곧 다시 걸음을 옮겨 경비병들을 안심케 하였다.

* * *

밤이 깊어 기 씨 삼 형제가 머문 객잔의 창가로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새처럼 날아 앉더니, 대뜸 창문을 열고 안으로 쑥 들어왔다.

“누구냐!”

“쉿! 범아.”

기범이 놀라 소리 지르자, 기악이 그를 조용히 시키고는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 다가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며 물었다.

“깊은 밤 몰래 찾아오신 것으로 볼 때, 조용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하온데…….”

“내가 떠나고 일다경 뒤, 누구도 모르게 객잔 뒷문으로 나와 서문 앞으로 와라. 그곳에 까마귀를 올려놓은 솟대가 있을 것이다. 누가 다가와 묻거든 창주가 안내하였다 답하거라.”

자신을 창주라 말한 검은 망토의 사내는 대답도 듣지 않고 창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어두운 밤하늘에 검은 망토를 날리며 사라졌다.

“갔네. 누구겠습니까?”

기범이 바로 물으니, 기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둘 중 하나 아니겠냐? 북주 놈들 아니면 서부총광부 놈들이겠지.”

사실 이들 두 세력 이외에 그들을 따로 조용히 부를 이들이 없음은 당연했다.

서문 안 솟대 앞에 당도한 기 씨 삼 형제는 솟대 아래에 떡과 음식을 올리며 절하는 여인네 한 명밖에 없자, 어둠이 짙게 깔린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솟대에 절하러 오셨으면 마침 여기 떡도 있으니, 함께 절하시지요.”

솟대에 절을 올리던 여인이 그 행동을 멈추지 않고 낮게 말하자, 기범이 놀라 큰소리를 내었다.

“절은 무슨…….”

“절이 아니면 누구의 안내로 오신 것이십니까?”

여인의 물음에 기훈이 재빨리 손을 들어 기범을 조용히 시키고는 나지막이 답하였다.

“우리는 절하러 온 게 아니라, 창주란 분의 소개로 온 것이오.”

기훈의 답이 적합하였는지 여인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고는 빠르게 이야기를 하였다.

“우측으로 가다 보면 누가 찾을 것입니다. 선예가 안내하였다 답하십시오.”

말을 마친 여인은 정성스레 다시 절을 올리기 시작했고, 기 씨 삼 형제는 우측 길로 몸을 이동하였다.

빠르게 발을 놀리던 기 씨 삼 형제의 앞으로 술병을 쥔 사내가 아름드리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술을 들이켜다가 대뜸 억지를 부렸다.

“이놈들! 술값 좀 줘라!”

기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소리 하려 할 때, 눈치 빠른 기훈이 나서며 답하였다.

“여기 얼마 안 되지만, 술 받아 드시구려. 우린 선예란 분이 안내하였소.”

“어? 은이네. 하하하, 인심 좋구나. 하하하.”

술값을 받아든 사내는 벌떡 일어나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뭐야? 그냥 술주정뱅이잖아.”

기범이 기가 차 어이없어하자, 사내가 휙 돌아서더니, 달려와 기범의 멱살을 잡고는 또다시 억지를 부렸다.

“뭐? 술주정뱅이? 이놈이 네가 언제 나 술 사 줘 봤냐?”

방금 기훈이 술값을 줬음에도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자, 화가 난 기범이 주먹으로 사내를 후려갈기며 말하였다.

“이 주정뱅이가! 어디서 땡깡이야!”

기범에게 얼굴을 맞은 사내가 얼굴을 기범의 품에 묻고는 엄살을 부렸다.

“어이쿠! 나 죽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어떻게 온 거야?”

사내의 물음에 기악이 웃으며 살며시 답하였다,

“선예라는 여인이 안내하였습니다.”

“뭐! 나를 또 때리겠다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이놈! 저기 저 집에 가서 이 어득구님을 네가 때렸다고 말하거라! 아마 우리 동생들이 네놈들 모가지를 분지를 것이야!”

그제야 기범이 사내를 풀어주니, 사내는 욕지거리를 하며 휘청휘청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기악이 어득구가 가리킨 집 문에 서니, 안에서 누군가 바로 물었다.

“이 밤에 누구요?”

“어득구를 때렸소.”

기범이 답하자, 문이 열리고 체격이 작은 해권이 나와 기 씨 삼 형제를 안으로 들였다.

* * *

“기 씨 삼 형제가 왔습니다.”

해권이 방문 앞에 서서 말하자, 바로 문이 열렸다.

기악이 앞장서 들어가니, 꿈에도 잊지 못할 강이식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봉황의 눈이 인상적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한눈에 그가 을지문덕임을 알 수 있었다.

“뒤따르는 이들이 있었겠지?”

강이식이 물으니, 해권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여지없이 따라오더군요.”

“아니, 우리는 시키는 대로 조심하였습니다.”

이에 기범이 당황해 변명하였으나, 을지문덕이 웃으며 진정시켰다,

“괜찮다. 너희 탓 아니고,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래야 일이 되는 것이지.”

“그래, 부총관 말이 옳다. 내가 우문도웅이라도 너희를 믿지 않았을 것이야. 어쨌든 고생들 했다. 그 서찰에 뭐라 쓰여 있는지 보았겠지?”

강이식이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기악의 앞에 서서 물으니, 그제야 기 씨 삼 형제는 북주의 우문도웅이 처음부터 자신들을 믿지 않고 이용했음을 깨달았다.

* * *

“공녀님, 놈들이 강이식과 을지문덕을 만났습니다. 놈들이 꽤 신경 써 추적을 피하려 했으나, 그들이 만나는 곳을 확인하여 강이식과 을지문덕이 말을 타고 떠나는 것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기 씨 삼 형제의 뒤를 쫓은 흑의 사내가 돌아와 공손향에게 보고하였다.

“잘 되었군. 역시 유역비 그자의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는구나. 이제 곧 대장군 고강 형제와 요동성 성주 고무가 추포되겠지. 참 잘 되었구나. 우리도 제가회의를 준비하자꾸나.”

흑의 사내를 칭찬한 공손향이 눈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대대로 합하께서는 내년에 압록강 이남을 다스리는 고구려의 왕이 되실 터이니, 이번 제가회의에서는 아무나 밀어 큰 선심이나 쓰시지요. 호호호.”

공손향이 교태롭게 웃으며 말하자 조용히 차를 들던 대실호연이 곁에 선 책사 하윤을 올려다보았다.

하윤은 그의 속내를 헤아리고는 손짓으로 수하를 불러 조용히 명하였다.

“너희는 중실 가문과 소실 가문에 연통을 넣어 제가회의는 합하께 위임하여 참석하지 말라 전하거라.”

중실과 소실 가문도 순노부에 속한 귀족이었다.

그러나 대실 가문의 잡다한 일을 맡아 처리하는 가신들로 세력이 약한 대실 가문이 그나마 순노부의 대가를 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들 두 가문의 지원 때문이었다.

“공녀님, 제가회의는 군사들이 경비를 서지 않으나, 각 귀족들이 대동한 사병들 수가 좀 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대실호연의 물음에 공손향의 대답은 차분하였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송구하오나, 그날 제가 도망치시는 합하의 등을 벨 것이니, 비명이나 크게 내시고 쓰러져 주십시오. 호호호.”

그녀의 말은 고왔으나, 내용은 정작 무섭게 그지없었다.

“만에 하나 을지문덕이 우리 계획을 눈치 채 고강과 고무를 구하고자 하여도 제가회의에서 피바람이 일어 꼼짝 못 할 것입니다.”

“내 등쯤이야 뭐 그리 대수겠소. 하하하. 형가의 역수가라… 연의 뒤를 이은 북주가 고구려에 자객을 보내어 제가회의 중 대대로를 포함한 오부 귀족들을 베는군요.”

“…….”

“이 사실을 북주에서 서찰로 고무와 고강에게 먼저 알린 셈이고… 딱 좋군요. 그림이 아주 좋아요.”

대실호연이 시원스레 승낙하였으나, 책사 하윤이 차분한 어조로 반대하였다.

“합하의 등은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된다? 내 등을 내어주고 의심을 받지 않게 되는데 어찌 반대하는가? 다른 이들은 죽는데 나만 온전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대실호연의 물음에 하윤은 여유롭게 미소를 담아 답했다.

“공녀님께서 제가 지금 올리는 말씀대로만 하신다면 굳이 합하의 몸이 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갓 스물, 눈빛이 선하여 남을 해할 것 같지 않은 하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내였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공손향이 재미있다는 듯 하윤을 향해 몸을 바짝 당기며 물으니, 하윤이 정중히 허리 숙여 답했다,

“문 앞에서 합하의 목을 가지러 왔다고만 하십시오.”

“뭐라?”

공손향이 어이없어 되물었으나, 하윤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네, 문지기가 ‘어찌 오셨냐?’ 물으면, 모두가 듣게 합하의 목을 가지러 오셨다고 하시면 되시옵니다.”

* * *

“고무와 고강이 간적일 것 같소?”

거처로 돌아온 강이식이 묻자, 을지문덕은 바로 의견을 말하였다.

“총관, 저들이 보낸 형가의 역수가에는 충직한 번오기의 목을 베고도 진왕 정을 암살하지 못한 형가와 연나라를 비웃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음…….”

“이는 곧 충신 고무와 고강의 목을 베고도 우리 고구려가 저들에게 망할 것이란 조롱이 되겠습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나, 우리의 판단은 추정일 뿐이고, 고강과 고무는 밀서를 받았으니…….”

“고무와 고강이 이 밀서를 누가 보냈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이곳저곳 물어볼 수도 있으나, 시국이 어수선하여 아직 보안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오?”

“네, 헌데 그들이 북주 우문도웅의 서찰을 받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쉽게도 고무와 고강을 비호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현재 우리만 아는 이 서찰을 반드시 누군가 공론화하겠지요. 우리보다 먼저 언급하여 공론화하는 이, 그자가 간적이겠지요.”

“허허, 대장군 고강과 고무 성주가 끝내 처형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오? 허허… 이런.”

“태왕 폐하께 저들은 간적이 아니라 설명 드릴 수는 있으나, 이 사실을 우리가 공론화한다면 목원의와 우연순이 간적으로 몰려 죽은 이 시점에서 고강과 고무의 목도 동일하게 베라 귀족들이 성토할 터이니, 살릴 방도는 없습니다.”

“허허… 이런, 이런. 먼저 공론화하지 않으면 고강과 고무를 살릴 수 있지 않겠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공론화하지 않으면 북주 놈들이 의심할 터라 이제 와 모른 척하기 쉽지 않습니다.”

“…….”

“더구나 고강과 고무가 무고하다면 간적이 따로 있을 것인데, 분명 서찰을 문제 삼아 그들을 간적으로 몰 것입니다. 살리기 난망합니다.”

영락없이 적의 간계에 빠진 셈이라 강이식의 입맛이 썼다.

“간적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이 죽겠군요. 목원의와 우연순이 남긴 세력을 와해시켜 대장군 고강 휘하로 사병을 흡수하려던 계획도 어렵게 된 것 아니오. 허허, 이런.”

“여러모로 어렵게 되었지만, 간적도 곧 노출되어 우리가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좋으나, 고강과 고무의 죽음은 우리 고구려에 너무 손실이 크지 않소? 다른 방책은 없는 것이오?”

강이식이 애석해하며 을지문덕에게 좋은 수를 바랐으나, 돌아온 답변은 차가웠다.

“지금 상황에선 고무와 고강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허… 이런…….”

그때, 강이식의 탄식을 끊으며 창주가 들어와 아뢰었다.

“기 씨 삼 형제의 뒤를 쫓던 사내가 북문 안 약방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잠시 뒤 대실호연이 나오는 것까지 확인하였습니다.”

“을지 공! 대실호연 그자가 간적이오! 서둘러 추포합시다!”

강이식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기뻐 소리쳤으나, 여전히 을지문덕의 답은 차가웠다.

“수상한 자들이 있어 뒤를 쫓았다 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대대로의 집에 군사를 보내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를 추포하면 북주의 우문도웅은 일이 틀어졌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아니, 그럼 여전히 고무와 고강이 죽는 길밖에 없는 게요? 허허… 이런 큰일이구먼. 큰일이야. 약방을 뒤지면 간자들이 나올 것인데 추포하여 대실호연과의 관계를 캐면 어떻겠소?”

“신중해야 합니다. 간자 몇 잡는 것보다 전쟁에서 승리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음, 총관 이리 해보시지요.”

“어떤?”

“해권에게 대실호연과 약방을 감시하라 명한 후, 우리는 내일 태왕 폐하를 알현하여 사실을 아뢰고, 고무와 고강을 우리 서부총관부에서 국문토록 재가를 받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을 잡고 있으면 적어도 그들의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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