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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79화 (79/328)

079화 속고 속인다. (4)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한 기 씨 삼 형제는 또다시 요하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큰형님, 이 서찰에 의미가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평소 영민한 기훈을 아끼는 기악인지라, 막내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다.

“무엇이 수상한 게냐?”

“연의 태자 단이 진왕을 암살하여 전쟁을 막고자 형가를 보내지 않습니까? 진왕의 믿음을 얻기 위해 진에서 망명한 번오기의 목을 들고 말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결국 진왕에게 암살 계획이 들켜 형가도 죽고 연도 망하며 번오기도 헛되이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어찌 이상하단 말인 것이냐?”

기악은 기훈이 우려하는 의미를 여전히 파악 못하여 되물었다.

“형가는 을지문덕의 명을 따라 간자들을 데리고 이 요하를 건넌 저희와 같고, 진왕은 우문도웅과 같으며 진에게 멸망당한 연은 고구려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번오기는 그 간자들이겠지요. 이 서찰은 을지문덕을 조롱하는 서찰입니다.”

“아니, 그런! 기훈이 네가 이 서찰의 의미를 알아냈구나!”

기훈의 이야기가 꽤나 그럴싸한지 기범이 놀라 외쳤으나, 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였다.

“아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북주는 연의 뒤를 이은 선비족의 나라로 이 서찰은 그들과 내통한 고구려 인물들에게 전하는 것이니, 이는 필시 형가처럼 자객을 보내어 전쟁 전, 태왕을 시해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느니라.”

기훈의 이야기도 그럴싸하고, 기악의 이야기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머리 아픈 기범이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아이고, 어지럽다. 뭔 이딴 종이 쪼가리에 담긴 의미가 이다지도 다양하단 말이오. 아무튼 우린 이걸 을지문덕에게 고하고 우리 룡이만 찾으면 되오. 이걸 해석하는 것은 을지문덕 그자에게 맡깁시다.”

“범이의 말이 옳구나. 하나, 우린 이걸 바로 을지문덕에게 전하지는 못할 것 같구나. 우리를 쫓아오는 이들이 있을 것이야. 아무튼 이 요하부터 건너고 보자.”

기악이 뒤를 돌아보며 말하였으나, 탁 트인 사방 어디에도 따라오는 이 하나 없었다.

기 씨 삼 형제가 요하를 건너고 한 시진이 지났다.

그들이 지난 자리엔 공손향이 여느 때처럼 흑의 사내 둘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곧장 말을 몰아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또한 떠난 자리에 한 사내가 날 듯이 달려와 섰는데…….

그는 짐승 가죽을 걸치고 봉두난발해 있었고, 그의 양 허리춤엔 지나칠 정도로 칼날이 넓고 두꺼운 박도 두 자루가 매여 있었다.

길게 내려와 덮은 머리카락 탓에 사내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매서운 눈빛이 사내가 보통이 아님을 잘 보여주었다.

* * *

애써 변복을 한 보람도 없이 기 씨 삼 형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듯.

성문에선 검문이 심하지 않았고 성 내에서도 기 씨 삼 형제를 유심히 살피는 이가 없었다.

성주의 관저를 지키는 군사에게 몇 푼 찔러주며 성주에게 서찰 전달을 부탁한 기 씨 삼 형제는 다음 목적지인 평양성 고강의 사저로 급히 이동하였다.

“너무 쉽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간자들이 활동할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인가?”

기훈의 물음에 기악이 답하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며 기범이 재촉하였다.

“쉬이 일을 처리 잘했으면 된 것이지 뭐가 그리 걱정이시오? 몇 차례 소동을 겪은 민심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평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라 명했겠지. 어서 평양성으로 갑시다!”

‘범이의 말대로 지금은 평양성으로 이동이 급하다. 허나, 괴이한 일임은 틀림없구나.’

기악은 심중에 의구심을 애써 누르며 채찍을 휘둘러 말을 급히 몰아 나갔다.

미리 영주에 잠입하여 대기하던 요동성 총관부의 정병 이십여 명이 을지문덕의 명에 따라 멀리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앞뒤로 따르며 돕고 있음을 아직 눈치 못 채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기 씨 삼 형제를 성벽 위에서 바라보던 해권은 급히 말을 몰아 성문을 나서는 백의 여인과 흑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전서구를 바로 날렸다.

그는 신크마리 해진의 동생으로 지금은 서부총관부에서 정보 수집과 간자 색출 임무를 맡고 있었다.

크지 않은 키에 해진처럼 깡마르고 평범해 보이는 외모였으나, 그 역시도 한때 조의선인이었고 백두검법에 있어서 적수가 드물었다.

그가 날린 전서구는 기 씨 삼 형제의 앞을 달리는 수하들에게 향할 것이다.

“우리도 떠난다. 서두르자.”

평복으로 갈아입은 정병 여덟 명이 바삐 그를 따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때, 그중 눈매가 사납고 호랑이 수염을 거칠게 기른 사냥꾼 복장의 사내가 말에 오르며 물었다.

“뒤따르던 것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시온지요?”

“이보게 어득구, 저들에 관한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네. 앞서가는 창주에게 전서구를 보냈으니, 그가 부총관에게 알려 명을 받아 전할 때까지 그저 두고 볼 따름이지. 가세!”

해권이 수하 여덟 명을 끌고 말을 달려 나간 성문으로 봉두난발한 사내가 걸어 나오더니, 말도 없이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와 속도는 매우 거세고 빨라 마치 한 마리의 들짐승과도 같았다.

* * *

태왕의 행차는 마침내 평양성에 당도하게 되었다.

또한 강이식과 을지문덕은 목 씨와 우 씨를 따르던 세력이 다른 마음을 품어 헛된 망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총관부의 정병을 평양성 내로 들였고.

연태조는 홀로 대대로 후보가 되어 제가회의를 기다리게 되었다.

“경쟁자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연태조 그자가 이번에 가장 득을 본 거 아니오?”

궁궐 내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강이식이 자리에 앉자마자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처세를 잘한 덕이니, 하하하.”

“태대형을 따르던 각 성의 귀족들과 평양성 내의 귀족들이 그가 대대로에 오르도록 두고 보겠소?”

“아마도 그들은 연태조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좋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서둘러 대장군 고강이 목원의의 세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정비해야겠습니다.”

“가능하겠소?”

“고강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생각해 둔 방안이 있으니, 폐하의 허락만 얻으면 됩니다.”

“생각한 방안이란 것이 무엇이오?”

“마침 새로 선출할 대대로와 공석이 된 태대형을 대신하여 이 둘을 합치고 여기에 군권마저 더한 막리지(莫離支)를 두는 것이지요.”

“막리지? 그것이 무엇이오?”

“막리지는 제가 새로 마련한 직책으로 나뉘어 있던 병마와 인사 양권(兩權)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국정을 전담하는 최고의 관직입니다. 수나라로 치면 한 사람이 중서령(中書令)과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을 겸임하는 것이지요.”

“아니, 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몰아줘도 되겠소?”

“곧 전시에 돌입할 것이고, 목 씨와 우 씨의 병마를 흡수해야 하니, 필요한 직책입니다. 단, 견제책으로 삼 년 임기를 두고, 태왕 폐하가 임명하신다면 기존 제가회의를 통해 선출되는 대대로에 비하여 왕권 강화는 물론일 것입니다.”

“…….”

“또한 막리지가 지닌 인사권은 그동안 오부 귀족들이 사조직을 이끌며 자신들이 관직을 내리고 폐하께 사후 보고하던 악습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말처럼 오부 귀족들은 자신을 따르는 가신들에게 멋대로 관직을 정하여 내리고 태왕에겐 서면보고만 취하였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오부 귀족들이 지닌 인사권을 뺏어올 필요가 있었다.

“음, 의도는 좋은데 대장군 고강이 그 깜냥이 되겠소?”

“그릇이 되어 스스로 군권과 인사권을 잘 사용하여 정치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부족한 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허…….”

“허나, 그는 자신의 그릇이 부족함을 잘 알기에 함부로 군권과 인사권을 휘둘러 남용하지 않을 터이니, 어찌 생각하면 그보다 더 훌륭한 막리지는 없으리라 판단합니다.”

“뭐, 그대가 고심한 일이니 어련하겠소. 부디, 폐하의 허락을 득하여 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합시다.”

모든 부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을지문덕을 신뢰하는 강이식이었기에 대대로와 태대형을 합치고 대장군의 권한까지 더한 최고의 관직 막리지에 대한 이견을 내지 않았다.

“음, 막리지라… 부총관 그럼 대대로가 없어지고 태대형도 없어지는 것인가? 대장군도?”

“야전에서 전장을 돌볼 대장군은 남겨 두어야겠지요.”

“허허, 경쟁자들이 사라져 제가회의에서 대대로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잔뜩 꿈에 부푼 연태조만 불쌍해졌군. 허허. 을지 공, 그대는 참 짓궂소. 하하하.”

* * *

“공녀님, 곧 평양성입니다. 저들이 대장군 고강에게 서찰을 전하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실 것이신지요?”

천천히 말을 몰며 흑의 사내 중 하나가 공손향의 의사를 물었다.

“아니다. 우린 더 남아 형가의 역수가를 완성시키는 것이 좋겠구나.”

“형가의 역수가 말이시옵니까?”

“그렇다.”

“어찌?”

말이 없는 다른 흑의 사내와 달리 그의 궁금증은 계속되었다.

“형가는 자객 아니더냐? 그의 역수가가 다시 나돌았으면 자객도 있어야 놈들이 고무와 고강을 간적이라 확신을 품고 죽이지 않겠느냐.”

“설마, 태왕을 암살할 생각이신지요?”

흑의 사내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으나, 두려워서라기보다 피를 봄에 기쁜 것이었다.

“태왕은 무리겠지. 곧 대대로를 선출하기 위해 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제가회의를 열 것이다. 그 자리에 연태조와 모용설 그년도 나오겠지.”

“…….”

“우린 제가회의를 급습하여 연태조를 포함한 귀족들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하면 외적과 내통한 혐의로 고무와 고강의 목도 떨어지겠지.”

공손향이 자신의 사적 원한을 풀기 위해 모용설을 죽이고자, 제가회의를 급습하려 함을 흑의 사내도 인지하였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이견을 낼 뿐이었다.

“공녀님 판단은 훌륭하오나, 우리 셋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가능하다.”

공손향이 너무도 단호히 말하자, 되묻지도 못하는 흑의 사내였다.

“우리 뒤를 돌궐 제일 무사, 야수가 따르고 있다. 내가 제가회의를 급습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야수도 날뛸 것이니, 못할 일도 아니다.”

“아…….”

“고구려의 제가회의엔 고구려 군사는 대동하지 않고 귀족들의 사병 몇 명만 동행하니, 이들은 모두 야수의 밥이 될 것이다.”

“주군께서 노하시지 않겠습니까?”

흑의 사내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그녀의 계획이 성급하다 생각하여 불길함을 누를 수 없었다.

“주군께서도 연태조 그자를 없애고 싶어 하시나, 유역비가 말하길 서찰로는 죽일 수 없다 하였다. 아마도 을지문덕이 믿지 않을 것이란 뜻이겠지.”

“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그자의 목을 베어 형가의 역수가를 완성한다면 주군께서도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느냐? 전쟁도 하기 전 적의 장수 목을 하나 더 얻었는데,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이미 공손향의 마음은 확고해 흑의 사내는 더 묻지 못하고 그저 말을 몰아 나갈 뿐이었다.

‘어쩌면… 야수 그자라면 가능할 수도…….’

* * *

대장군 고강의 사저에 들른 기 씨 삼 형제는 문 앞을 지키는 하인에게 은자 몇 개 쥐여 주며 서찰을 전해달라고 당부하고는 재빨리 몸을 놀려 인파로 붐비는 시장통에 자리한 객잔으로 이동하였다.

“형님, 이제 우리 룡이를 찾으러 을지문덕 그자를 만나야 하지 않겠소?”

“듣자 하니, 궁궐에 거처를 마련했다던데, 쉽게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임무를 완수하고 평양성에 왔음을 을지문덕에게 알릴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기훈이 어두운 표정으로 차분히 말하자, 기악이 빙긋 웃으며 답하였다.

“그자가 궁금하여 우릴 먼저 찾아올 것 같구나.”

“어찌?”

기범과 기훈이 놀라 물으니, 기악이 창밖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우리가 평양성에 들어오니, 앞뒤로 사내들이 붙어 여기까지 따라오더구나. 이 정도로 대놓고 붙을 정도면 북주 놈들은 아닐 터이니, 을지문덕의 수하들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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