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속고 속인다. (3)
중년의 사내가 자신을 우문도웅이라 말하자, 기악과 기훈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살아 돌아가기 틀렸다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기범이 앞으로 나서며 흔쾌히 답하였다.
“대장부네. 좋아! 믿고 들어가 봅시다. 형님 뭐하시오?”
기범의 이 천진난만한 태도에 우문도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 약사에게 시선을 옮겨 명하였다.
“공손향도 있는데 장 씨 삼 형제가 벌거벗고 덜렁거리니, 뭐라도 걸치게 하여 들이시게.”
“명을 받습니다.”
송 약사가 공손히 명을 받으니, 기범의 손을 끌며 우문도웅이 안으로 들어갔다.
“큰형님, 이 일을 어찌?”
기훈이 뒤를 따르며 기악에게 살며시 속삭였으나, 기악인들 이 상황에 뾰족한 수를 내진 못하였다.
‘정녕 저자가 북주의 수장 우문도웅이란 말인가? 어찌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하면 이 영주 총관부가 혹시?’
상대가 우문도웅임을 안 이상 무턱대고 몸을 빼낸들 입을 막기 위해 살수들이 쫓을 것은 당연했다.
또한 이 약방 밖 구경꾼들 중에도 우문도웅의 수하들이 있음도 당연하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왔구나. 호랑이를 잡지 않고 살길은 호랑이가 살려 주기만 바랄 뿐인데… 이를 어쩐다.’
* * *
“장 씨 삼 형제는 대를 이어 우리 우문 씨를 섬겼는데, 이들 형제가 모두 고구려에 붙잡혀 생사를 가늠키 어렵다 하여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이었소.”
“…….”
“그대들 세 장사가 잘살려 데려와 주니 황금 서른 냥이 뭐 그리 대수겠소. 여기 받으시오.”
넓은 방에 마련된 탁자에 자리하자마자 시종이 쟁반에 커다란 황금을 받쳐오니, 우문도웅은 손짓으로 기악의 앞에 놓으라고 명하였다.
우문도웅과 마주보고 자리한 기악은 오십 냥도 넘을 황금에 입이 떡 벌어졌으나, 과연 이 황금을 들고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고맙소. 잘 쓰겠소! 우린 공치사 받을 일은 없으니, 인제 그만 일어나겠소. 가시죠. 형님.”
기악과 달리 기범은 신이 나 황금을 냉큼 챙겨 등에 멘 보따리에 담아 짊어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악을 재촉했다.
“대왕님, 우리 삼 형제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기악이 조심스레 우문도웅의 안색을 살피며 물으니, 선선히 그러라 답하였다.
“볼일을 보셨으면 가셔야지요.”
“문 뒤에 계신 분도 우리를 보내주신다 하십니까?”
기악이 들어온 문이 아닌, 우문도웅의 등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문도웅의 뒤는 평범한 벽으로 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기악이 이렇듯 묻자 영리한 기훈이 도끼를 꽉 쥐며 경계를 했다.
또한 기범도 그제야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경계해 말하였다.
“음, 형님과 훈이가 먼저 나가시지요. 제가 대왕님의 용안을 마지막까지 가슴에 새기며 나가겠습니다.”
기범의 이 말에 우문도웅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 저 뒤에 있는 자는 항상 나의 뒤를 지키는 무사로 한낱 살수 따위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시오.”
우문도웅의 이 말은 기 씨 삼 형제를 더욱 긴장케 하였으나, 기악과 기훈이 문으로 나가고 기범이 그 뒤를 따라 문 앞에 설 때까지 우문도웅이 말한 무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잠시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우문도웅이 기범의 발을 멈추게 하였다.
“이 서찰 두 개를 각기 다른 이에게 보내려 하는데, 도와주겠소?”
“돕지 못할 이유야 없으나, 어디에 누구에게 가는 것이오?”
기범이 어정쩡 서서 물으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우문도웅이 답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서찰이오.”
“아니, 우린 고구려에서 도망 나온 처지인데…….”
기범이 말꼬리를 흐리자, 유역비가 우문도웅을 대신하여 좋은 말로 권하였다.
“그러니, 주군께서 부탁하는 것이지요. 그대들은 그냥 돌아가 잡혀도 죽고, 간자가 되어 돌아가 잡혀도 죽을 테니, 간자 노릇하여 공을 세움도 좋지 않겠습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유역비는 비리비리 하다못해 가냘픈 체구에도 눈빛만은 형형히 빛나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말은 기범에게 너무도 허황되게 다가왔다.
“아니, 뭐가 좋다는 것이오? 안 돌아가면 죽지 않을 것인데.”
“잡히지 않으면 죽지도 않을 것이며, 훗날 주군께서 고구려를 정벌하신 후에 그대들이 머물 땅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땅이오? 땅?”
“무릇 기댈 나라 없는 백성의 한을 우리 주군께서 익히 잘 아시기에, 고구려를 떠나 이국땅을 떠돌 그대들을 가엾이 여겨 내린 제안입니다.”
“…….”
“주군께서 북주를 다시 세워 황제에 즉위하시면 그대들의 공을 인정하여 성 하나쯤 안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하셔야겠지요?”
유역비의 세 치 혀 놀림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기범이었다.
“누구에게 전하는 서찰이오?”
“요동성 성주 고무와 대정군 고강입니다.”
서찰을 전할 상대가 만만치 않음에 기범이 놀라 되물었다.
“고무와 고강이요?”
“네, 그렇습니다.”
“하, 이거… 참… 아, 다 좋은데, 요동성에서 우리를 벼르고 있을 것인데…….”
아무래도 내키지 않은 기범이 더듬더듬 말하니, 유역비가 맞장구까지 친다.
“그렇겠지요. 옥을 부수고 성문도 뚫었으니, 총관부에서 아주 이를 갈겠지요.”
“내 말이 그 말이오.”
“다행스러운 것은 강이식과 을지문덕이 태왕 행차를 수행하기 위해 오늘 요동성을 떠났고, 총관부의 정병들도 그 뒤를 따랐다는 것이지요. 기회가 좋습니다.”
기범의 손이 떨리며 자신을 향한 서찰을 받아들일지 머뭇거리는 순간.
기범의 등 뒤에서 기악이 나타나 불쑥 서찰을 받아 품에 넣으며 외쳤다.
“받겠소! 고구려는 내 아우를 죽인 원수의 나라이니, 그곳이 망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소! 하겠소!”
* * *
기 씨 삼 형제가 떠나자, 공손향이 바로 들어와 앉으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어찌, 저것들을 믿고 일을 맡기시는지요?”
그녀의 물음에 우문도웅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편안히 답하였다.
“나는 믿지 않는다.”
“아니, 하오면 왜?”
유역비가 우문도웅을 대신하여 공손향을 달래며 말하였다.
“간자를 잡아 심문하여 정보를 얻는 것은 하책이요. 간자를 풀어주고 그 뒤를 캐어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중책이며, 간자를 포섭하여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습니다.”
“하여, 상책이라도 쓰겠다는 것이오?”
그녀의 물음에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아닙니다.”
“아니면?”
유역비가 말장난한다 생각한 공손향이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띠며 물으니, 유쾌한 표정으로 유역비가 청량히 답하였다.
“을지문덕은 장 씨 삼 형제를 놓아주고 그 뒤를 케어 동향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바로 중책이지요.”
“그렇다면 우린 저들을 포섭하여 이용하겠다는 것이오?”
“아닙니다. 우린 저들을 속이고, 저들을 이용한 을지문덕도 속여 요동성 성주 고무와 대장군 고강의 목을 벨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소리에 공손향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무와 고강의 목을? 그게 가능한 일이오?”
“가능하지요. 서찰 두 개면 을지문덕이 고무와 고강의 목을 벨 것이고, 전쟁도 하기 전에 적의 대장군과 요동성 성주의 목을 베니, 싸우기도 전에 우리의 승리가 보장되겠다 할 수 있습니다.”
“음…….”
“먼 길을 나는 새는 바람을 거꾸로 날기도 하니, 우린 을지문덕의 잔꾀에 노하지 않고, 이를 역으로 이용하면 좋은 성과를 취할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소리라 이 기회에 더 성과를 내보자 공손향이 물었다.
“고무와 고강이라… 연태조와 강이식의 목도 벨 수는 없는 것이오?”
“그들의 목은 서찰로 끊을 수 없습니다.”
유역비의 이 말에는 섣불리 강이식과 연태조의 목을 노리다간 그 잔꾀를 을지문덕이 대번에 눈치 챌 것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공손향은 유역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 계책을 활용하여 더 좋은 성과를 만들 수 없는지 고심하게 되었다.
유역비와 공손향이 대화하는 동안, 조용히 차를 들던 우문도웅이 가만히 손을 들어 이 둘의 대화를 끊고는 명하였다.
“송 약사에게 장 씨 삼 형제의 몸은 양지 바른 곳에 잘 묻고, 머리는 돼지에게 줘 아랫것들에게 본을 보이라 하라. 또한 그들의 처와 자식은 죄가 없으니, 이전과 다름없이 잘 대해라 각별히 전하라.”
그의 이 말에 시종이 문밖에서 공손히 답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시종의 발소리가 멀어지니, 우문도웅이 공손향에게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의 목소리에 애틋함이 묻어 있는데, 아마도 모용설, 모용상 남매에게 죽은 동생 우문도지 때문이리라.
“나는 오늘 유 책사와 함께 돌궐로 돌아갈 것이니, 그대는 당분간, 이 약방에 들리지 말라. 여긴 을지문덕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공손향이 머리 숙여 답하니, 우문도웅이 엄히 말을 이었다.
“야수는 나를 따르지 말고, 이곳에 남아 공녀님을 지켜라!”
그의 명에 등 뒤에서 칼집에 칼을 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벽으로 위장한 문 뒤의 무사는 공손향마저 믿지 못하여 칼을 뽑아 대기하던 모양이었다.
* * *
“형님, 어쩌자고 그 서찰을 받으신 겁니까?”
약방을 나와 한참 걸어 뒤따르는 이가 없자, 기범이 바로 기악에게 물었다.
“너는 느끼지 못한 것이냐? 우문도웅 그자 뒷벽은 사실 좌우로 열리는 문이었고, 그 안에 엄청난 살기를 지닌 자가 있었다. 내 평생 그런 살기는 처음이다.”
기악에게 팽무일은 무예보다 금강대도가 뛰어났고, 온달은 신력이 압도적이었으나, 전혀 살기를 내뿜지 않았었다.
강이식 또한 무예가 뛰어났으나, 이들과 대적할 때 살기를 품지 않았었다.
허나, 오늘 문을 사이에 두고 느낀 살기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어마어마하여 마치 굶주린 호랑이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마,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를 죽이려 달려들었을 것이다. 맹수였다. 무공의 고강을 떠나 그 살기는 참으로 지독하였다.”
기악의 이 말에 기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우문도웅 정도의 지위라면 그 호위 무사는 절정의 무예를 지녔겠지요. 아무튼 호랑이 굴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입니다. 하온데 큰형님, 이제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오늘은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니, 일단 조용한 객잔을 잡아 잠시 쉬며 논의하자. 이 품속 서찰 내용도 궁금하구나.”
“좋은 생각이오. 뭔 내용인지나 알고 전할지 말지 따져야 할 것이니, 그리고 우리도 형님께 따로 드릴 이야기가 있다오.”
기범이 동의하며 슬쩍 운을 띄우니, 기악은 궁금함을 누르며 걸음을 서둘렀다.
* * *
객잔에서 조용한 방을 얻은 기 씨 삼 형제가 서찰을 들여다보니, 밀봉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기악이 조심스레 서찰을 펴 보니, 두 개의 서찰에는 모두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風蕭蕭兮易水寒.
(바람 쓸쓸하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진왕 정을 암살하기 위하여 역수를 건너던 자객 형가가 배웅 나온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 일행 앞에서 부른 노래가 서찰에 적혀 있었다.
“형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범은 아무리 읽어도 서찰이 담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기악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그에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희대의 자객 형가를 이용하여 연나라의 태자가 진왕 정이 연나라를 침공하기 전 암살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태자의 명을 받은 자객 형가가 역수를 건너며 부른 노래입니다.”
“그렇구나…….”
“형가는 진왕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하기 위하여 진에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라는 장수의 목을 베어 지니고 갑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기범이 재촉하자, 기훈이 마저 말하였다.
“진왕을 형가가 알현하였으나 암살은 실패하여 형가는 진왕에게 죽고, 연나라 역시 진왕에게 멸망하지요. 결국 진왕 정은 중원을 통일하여 진시황이 됩니다. 어차피 진왕을 속이지도 못하고 실패할 암살, 번오기만 헛되이 죽고 연나라가 망한 것이지요.”
가만히 듣던 기악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잠시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기범에게 물었다.
“범아,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 이제 해보아라.”
기악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범이 환히 웃으며 말하였다.
“형님! 우리 룡이는 살아 있습니다. 을지문덕이 우리에게 적을 속이기 위하여 옥을 파하고 간자들을 풀어주어 어디로 가는지 동태를 살피라 명하였지요.”
“뭐, 뭐라?”
“이제 우리 임무가 성공하였으니, 돌아가면 을지문덕이 우리 룡이를 놓아줄 겁니다.”
기범의 이 이야기에 기악의 표정이 금세 밝아져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그 말이 참말이더냐? 아니, 이럴 수가… 룡이가, 우리 룡이가 살아 있다니. 안 되겠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당장 을지문덕을 찾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