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77화 (77/328)

077화 속고 속인다. (2)

밤을 새우고 말을 달려 요하가 눈에 들어오자, 기악이 장 첫째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영주에 가면 그대들 일행도 있는가?”

이 물음에 장 첫째가 망설이며 답하지 못하자, 기악이 코웃음 치며 말하였다.

“너희를 넘겨주거나, 죽인들 돈 되는 것도 아니니, 염려 말거라. 영주에 너희 일행이 있다면 네놈들 몸값만 받고 우린 더 멀리 갈 것이다.”

“…….”

“만약 없다면 우리의 안전을 확보한 후 영주 성 밖으로 고구려군을 불러 그들에게 네놈들 몸값을 받고 넘기면 그만이고. 그전까지 나는 너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염려 말거라.”

그의 이 말은 장 첫째를 안심시키기는커녕 다른 마음을 품게 하였다.

‘요하를 건너기 전까지 이놈들과 동행하지만, 건너고 나면 바로 말을 달려 영주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결코 주군은 우리 몸값을 치르지 않을뿐더러 이런 떨거지를 끌고 갔다간 즉시 우리와 이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요하로 향하였고, 개마무사들도 쉬지 않고 쫓아왔으나 쉽사리 거리를 좁히진 못하였다.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오!”

봄 가뭄으로 강물이 줄은 곳을 용케 장 둘째가 안내하며 요하를 건널 때쯤, 고구려의 개마무사들도 요하에 당도하였으나, 이들처럼 강을 건널 순 없었다.

요하를 건너면 거란의 영토이면서 수나라의 대고구려 전초 기지인 영주 총관부의 세력권이기에, 섣불리 군을 동원하였다가는 전쟁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 씨와 장 씨 일행은 개마무사들이 요하를 건너오지 못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말을 쉬게 하지 않고 반나절을 더 달려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 겨우 숨 고르기를 했다.

“말이 쓰러지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습니다.”

기훈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하자, 기악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범도 말에서 내려 허리와 다리를 풀며 여전히 말에서 내리지 않는 기악에게 말하였다.

“형님도 내려 잠시 쉬시지요.”

기범의 말에 기악이 턱으로 말 위에서 우물쭈물하는 장 씨 삼 형제를 가리켰다.

“어라? 네놈들은 왜 안 내리는 거냐? 다리와 허리가 괜찮은 게냐?”

장시간 말 위에 앉아 허벅지와 허리가 아플 터인데도 정 씨 삼 형제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먼저 내린 기훈이 앞을 막고 앉아 있었으며 기악이 뒤에 있으니, 묘하게도 포위된 형국이라 내빼지도 내리지도 못하였다.

“놈들이 쫓아올까 두려워 말 위에 있겠습니다.”

장 첫째가 억지로 웃으며 답하니, 기악이 콧방귀를 뀌며 기범에게 명하였다.

“범아! 안 내리면 내리게 해주거라.”

기악의 명이 내리자마자 기범이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니, 장 첫째가 탄 말의 목이 허공에 솟으며, 머리 잃은 목에서 피가 뿜어져 올라 장 첫째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내 곧 근육의 힘이 풀린 말의 몸뚱이가 무너지듯 옆으로 쓰러지며 먼저 떨어진 장 첫째의 몸을 깔아뭉갰다.

“으악!”

장 첫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장 둘째가 놀라 도우려 말을 몰아왔다.

그런데 기범이 또다시 도끼를 휘두르니 말과 함께 장 둘째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범이 성큼성큼 걸어 장 둘째의 가슴팍을 오른발로 밟고 도끼를 치켜들자, 마음이 급해진 장 셋째가 냉큼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싹싹 빌었다.

“대왕님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시끄럽다! 죽이든 살리든 우리 형님 마음이니 달게 받아들이거라!”

기범이 으름장 놓으며 기악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제야 기악도 말에서 내려 바닥에 앉으며 편히 말하였다.

“범아! 훈아! 저놈들은 간자로 잡혀 있던 놈들이란다.”

“정말입니까? 형님, 그럼 이놈들 때문에 개마무사들이 그리 악착같이 쫓아온 것이군요. 진즉 말씀하셨다면 이놈들을 버리고 갔을 것인데 왜 이제야 말하시는 겁니까? 이놈들 때문에 우리 부하들이 죄다 잡혀갔지 않습니까?”

기범이 그동안 고생한 것을 원망하자, 기훈이 나서며 만류했다.

“큰형님의 말씀을 마저 들어보세요.”

기악은 두 동생의 꼬질꼬질한 몰골이 안쓰러워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기훈에게 명하였다.

“훈아, 일단 이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결박한 후 이야기를 하자꾸나.”

기악의 명에 기훈이 장 씨 삼 형제의 옷을 모두 벗기고, 천을 쭉쭉 찢어 끈을 만들고는 손을 묶고 올가미를 만들어 생선 엮듯 장 씨 삼 형제를 줄줄이 엮어 놓았다.

그러니 세 명이 함께 움직여야 한 발이라도 옮길 수 있는 몰골이 되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줄줄이 엮어 놨으니, 도망가 봐야 몇 발짝 못 갈 것입니다.”

“잘했구나. 내가 이놈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이제 우리는 고구려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니, 이놈들 일행에게서 몸값이나 받아 중원 어디로든 가야 되기 때문이다.”

“몸값을 안 주면 어떡합니까?”

기범이 기악의 말에 이견을 달자, 기악이 태연히 답했다.

“이놈들이 이 꼬락서니로 우리를 제 일행들에게 안내한다면, 영주성 내의 모든 이가 좋은 구경났다 생각하여 줄줄이 따라올 것 아니더냐. 간자를 부리는 입장에서 결코 몸값 실랑이할 처지가 못 될 것이다.”

“아하! 그렇겠군요.”

“뭐, 안 주겠다고 버티면 빼앗아야겠지. 놈들도 떳떳하지 못하니, 관에 신고는 없을 것이다. 하하하. 북주 간자라면 수의 영주 총관부에서도 참 좋아할 게야.”

“역시 형님이십니다.”

“하하하, 분명 수와 고구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연락책 삼을 거처가 영주에 마련되어 있겠지. 어서 가자꾸나.”

“아! 몸값 안 주겠다면 영주 총관부에 넘겨도 되겠군요. 하하.”

“역시, 큰형님의 판단은 항상 옳습니다.”

기악의 이 판단에 기범과 기훈이 무릎을 탁 치며 좋아했고, 장 씨 삼 형제는 이제 모두 황천길 동행이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 무식한 산적 놈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천지 구분도 없이 허망한 생각을 하는구나. 이제 우리와 이놈들은 모두 죽었다. 요하를 동행했더니, 삼도천까지 동행하게 생겼구나.”

* * *

벌거숭이 세 사내를 엮어 앞세운 기 씨 삼 형제가 영주에 들어섰다.

그러자 세상 좋은 구경에 길가는 모든 이가 돌아보았고, 철없는 아이들과 한가한 사내들이 쫄래쫄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더 인원이 느니, 기 씨 삼 형제의 마음을 든든히 해주었다.

“여기입니다.”

수치심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장 첫째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약재를 거래하는 제법 큰 약방 앞에 서서 말했다.

이미 이 소란에 밖에 나온 사환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여기서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드시오.”

사람 좋아 보이는 약방 주인이 기 씨 삼 형제를 안으로 들였고, 치밀한 기훈은 도끼로 약방문을 찍어 밖에 구경꾼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허허, 이 사람들 참… 문은 왜? 조용한 방으로 들어 이야기 좀 합시다.”

약방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좋은 말로 권하였으나, 들을 리 없는 기 씨 삼 형제였다.

“우린 여기가 좋소. 당신네 식구를 사지에서 구해 왔으니, 성의로 황금 서른 냥만 주면 우린 왔던 길 그대로 갈 것이오. 괜히 길게 이야기하면 저 밖에서도 다 듣소.”

기악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하자, 약방 주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난 이 세 사람을 모르오. 어찌 왔는지 모르겠으나, 생전 처음 본 벌거숭이 사내 셋을 묶어와 황금을 내놓으라니, 이게 뭔 경우요? 난 또 치료받으러 온 줄 알고 안으로 들이려 했지. 썩 가시오!”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사실을 말하는 듯해 보여 기범이 불안해, 기악을 바라보았다.

그때 기훈이 먼저 나서 대꾸하였다.

“이자들 모르오? 그럼 할 수 없지. 가자, 이놈들아! 형님들, 영주 총관부에 대충 넘기고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도움이나 받으시죠.”

기훈이 장 씨 삼 형제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 하니, 당황한 약방 주인이 앞을 막으며 사정했다.

“이러지 마시게. 이건 모두가 좋지 않네. 잠시 안에 들어가면 그깟 황금 서른 냥이 문제겠나? 진정하고 들어가 이야기나 좀 하세.”

“황금 서른 냥이야 여기서 받아도 되고, 더 나눌 이야기도 없는데 어딜 들어가자 말하는 것이오? 안에 혹시 살수라도 숨겨 둔 게요?”

약삭빠른 기훈이 오히려 놀리니, 약방 주인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때 안에서 중년의 풍채 좋은 사내와 이십 대 중반의 비리비리한 사내가 무기도 없이 나와 구석에 자리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중후한 음색으로 중년의 사내가 약방 주인에게 말하였다.

“송 약사, 그만하시게. 들을 사람들이면 이처럼 시선 끌며 오지도 않았을 것이네.”

“예예, 죄송하옵니다.”

송 약사라 불린 약방 주인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고, 장 씨 삼 형제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벌벌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놈이 우두머리로구나!’

기악이 중년의 사내를 경계해 살필 때, 약방 문 앞에서 여인의 고운 음색이 들려왔다.

“그렇지요. 보통내기들이 아니네요. 헌데, 그대들은 황금 서른 냥을 받아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기 씨 삼 형제가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백의의 여인 뒤로 흑의의 건장한 사내 둘이 나타나더니 약방 문 앞을 막아서며 구경꾼들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세 분 장사께선, 여기가 어디라 생각하신 것이신지요? 호호호.”

백의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살기가 흐름을 느낀 기악은 손에 쥔 도끼에 힘을 주며 언제든 휘두를 태세를 취하고는 태연히 답하였다.

“우린 당신들의 친구를 구하느라 많은 부하를 잃었다오. 적어도 그들의 장례와 가족들에게 보상은 해야 하지 않겠소? 이 큰 약방에서 황금 서른 냥이 어렵다면 할 수 없지요. 길이나 트시오. 나가야겠소.”

말은 차분히 하였으나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자세인지라, 여인도 경계하며 허리에 찬 환도에 살며시 손을 대었다.

이때, 비리비리한 젊은 사내가 힘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공손향님께서 칼부림할 일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그깟 황금 서른 냥 드리지요.”

“유역비님께서 지불하시겠습니까? 자상도 하셔라. 하오나, 저들이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후환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영주 땅에서 나 공손향이 사내 셋의 목 좀 벤들 누가 나를 탓하겠습니까? 호호호.”

공손향은 여전히 기 씨 삼 형제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년이 꽤 당차구나. 말투를 보니, 영주 총관부에 입김이 닿아 기세가 등등한 모양인데, 어디 얼마나 실력이 그 입방정만큼 대단한지 두고 보겠다.’

기악이 이런 생각을 하며 눈짓으로 두 아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기범과 기훈도 일전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다.

“공손향! 유역비 이 친구에게 황금 서른 냥은 없을 것이네. 그대도 알다시피 이 친구에게 황금 서른 냥은 너무도 무거워 지닐 힘이 없지 않은가.”

중년의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기악에게 다가가며 말하였다.

시선은 기악을 향했고, 이야기는 공손향에게 하였으나, 반응은 장 씨 삼 형제가 보여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나 우문도웅이 그 황금을 줄 터이니, 들어가 이야기나 좀 하세. 난 허튼소리 할 신분이 아닐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