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76화 (76/328)

076화 속고 속인다. (1)

태왕의 행차가 평양성으로 향하는 새벽, 요동성 성주 고무가 총관부로 급히 달려왔다.

“총관!”

문도 열기 전부터 고무의 다급한 음성이 울렸고, 마침 태왕의 행차 호위를 논의하던 부총관 을지문덕이 문을 열며 그를 맞아들였다.

“성주께서 이 시간에 어찌?”

자리를 권하는 을지문덕의 손짓에도 고무는 상기된 얼굴로 바삐 제 말부터 하였다.

“놈들이 파옥하였소! 총관이 보낸 병사들이 지키던 옥을 파하고 지상의 전옥소는 물론이요. 지하에 갇혔던 놈들마저 빠져나갔단 말이요!”

“성주님 차근차근 말씀하시지요. 누가 빠져나갔단 말인가요?”

고무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강이식이 되묻자, 고무가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크게 외쳤다.

“간자들이 도망쳤단 말이요! 파옥이요! 파옥!”

그제야 강이식도 놀라 고무를 빤히 쳐다보더니, 뜸 들이며 되물었다.

“어찌? 총관부의 정병들을 보내 지키라 했건만, 외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 것인가요?”

“외적은 아니고, 추포하지 못하였던 망우산의 도적 떼 수괴 두 명이 큰 도끼를 들고 쳐들어와 지상의 전옥소를 파하여 제 부하들을 꺼낸 후 지하의 전옥소마저 파옥했단 말이요.”

“이런…….”

“이를 어쩌면 좋소. 놈들이 서쪽 성문마저 뚫고 도주하였는데 어서 군사를 풀어야 하지 않겠소?”

강이식의 물음에 고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앉고 말았다.

을지문덕은 고무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르며 진정시켰다.

“그래, 죽은 군사는 없던가요?”

“상한 병사는 몇 되지만, 다행히 죽은 병사는 없다 하오. 아니, 총관부의 정병이라 하면서 어찌 도적 떼도 못 막고 도망간단 말이오?”

“허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송구하옵니다.”

“이를 태왕 폐하께서 아시면 전옥소 관리 책임을 내게 물으실 터인데 어쩌면 좋소? 총관은 어서 서둘러 총관부의 군사를 보내어 놈들의 뒤를 쫓아야 하지 않겠소?”

애타는 고무와 달리 언제나처럼 을지문덕의 표정에는 여유가 흘렀다.

“이미 놈들이 전옥소를 나온 뒤니, 지키던 이들의 안위도 생각해야겠지요. 죽은 이가 없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

“하오나 성주, 총관부의 정병은 태왕 폐하의 행차를 수행하여야 되니, 놈들의 뒤는 요동성 관에서 하셔야겠습니다. 뒤는 쫓으라고 명하셨는지요?”

되려 을지문덕이 고무에게 군사를 보내 쫓았냐고 물으니, 고무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미처 명하지 못하였소. 아! 오늘 폐하의 환궁 행차가 있지요?”

고무가 그제야 총관과 부총관이 태왕 행차를 호위해 평양성으로 향할 것이며, 한동안 오부 귀족 세력을 견제하여 다가올 전쟁에 대비할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강이식이 커다란 손으로 고무의 어깨를 두드리며 최대한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총관부의 정병들은 폐하를 모시고 평양성에 들어간 후, 어지러운 정국이 바로 서도록 도와야 합니다.”

“…….”

“음, 성주께서 추격대를 아직 보내시기 전이라면 지금이라도 서두르셔야 놈들이 요하를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총관부의 기병도 제가 따로 뒤를 쫓게 할 터이니 서두르십시오.”

“부탁하오! 여유가 없겠지만, 꼭 기병 오백만 보내주시오. 나도 서둘러 요동성 관군을 풀어 쫓게 하겠소. 부탁하오.”

고무가 연신 강이식과 을지문덕에게 부탁하며 서둘러 뛰어나가자,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크게 상한 이가 없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내 벗이라 다행이지, 적이면 내 속이 문드러졌을 것이오. 허허, 사람 참. 어찌 그리 짓궂소? 그나저나 목 씨 일가의 세력이었던 각 성의 군사와 그 지휘는 어찌해야 좋겠소?”

강이식은 을지문덕의 환한 미소에 손을 휙휙 내저으며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분명 오부 귀족들이 평양성에 들어가면 이 부분을 논할 터인데, 큰 전쟁을 앞두고 요동 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으니, 큰일이구려.”

을지문덕은 강이식의 걱정이 대수롭지 않은 듯 고무가 남긴 찻잔을 들어 비우며 말하였다.

“썩은 종기를 도려 내면 그 자리가 뻥 뚫려 새살이 돋아 아물 때까지 비게 마련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부 귀족들에게 대장군 고강의 신망이 높아 통솔케 하면 큰 반발은 없을 것이며, 요동성 성주 고무와 신성 성주 고성이 든든히 받쳐 준다면 경계는 굳건할 것입니다.”

신성 성주 고성은 대장군 고강의 아우로 평양성 내에 머물고 있었으나, 외적을 맞아 대적함에 신성으로 거처를 옮겨 단단히 지킴은 당연하였다.

“또한, 수군 기지인 비사성에 대장군 고강의 지휘부를 마련하고, 안시성이 앞에서 지킨다면 동과 서, 북과 남에서 서로 호응하여 그 어떤 적도 압록강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자신만만한 답변에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이견을 달았다.

“아직 내부의 간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터인데, 부총관은 요동성 성주 고무와 대장군 고강 형제를 믿소?”

“전략을 세움에 장수 배치는 가장 중요한 일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지요. 그렇기에 첫 번째 안은 저들이 적과 내통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음…….”

“만약 저들이 적과 내통하였다면 싸우기도 전에 성을 넘기고 군사를 바치는 격이니… 그렇기에 서둘러 간적을 색출함이 우선되어야 하겠지요.”

“맞는 말이오.”

“만에 하나, 저들 중 간적이 있다면 서둘러 군권부터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맡기고 새로 장수를 배치하여 경계를 세워야겠으나, 따져보니 시간이 꽤 촉박하군요. 허허허.”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을지문덕의 표정은 즐거워 보이며 크게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강이식이 괴이하게 여겨 손가락으로 을지문덕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시간도 촉박한데, 을지 공은 뭐가 그리 여유로워 웃기까지 하는 게요?”

“하하하, 그렇다고 울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을지문덕은 오히려 통쾌히 웃어젖히며 세상 근심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차를 음미하였다.

“이 보이차 맛이 참 좋습니다. 총관.”

* * *

요동성을 빠져나온 망우산 도적 떼 뒤를 총관부의 중무장 기병 오백 기가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뒤를 잡힌 도적 떼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개마무사의 창에 찔려 죽거나 사로잡혔고.

겨우 말에 오른 기 씨 삼 형제와 장 씨 삼 형제 여섯만이 아득히 먼 요하를 건너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쉬지 않고 내달려야 했다.

“요하를 건너 영주로 들어가야 산다! 계속 달려라!”

선두의 기악이 등에 화살이 박혀 속도가 느려진 막내 기훈을 돌아보며 독려하였다.

“큰형님! 저는 걱정 마시고 계속 달리십시오!”

애써 힘내어 답하는 기훈의 뒤로 멀리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천지를 뒤흔들 기세로 말까지 철갑을 두른 개마무사 오백 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제길! 저놈들은 저리도 무거운 철갑을 뒤집어쓰고 어찌 이리 지치지도 않는단 말이오!”

장 둘째가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내며 연신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했으나, 귓전에 울리는 개마무사들의 말발굽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둘째야! 말하지 마라! 호흡만 가빠지고 지친다! 달려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장 첫째가 일행들의 속도를 재촉하며 자신은 쉬지 않고 떠벌여 댔다.

“영주! 영주엔 수나라 총관부가 있으니, 결코 저 흉악한 고구려 기병 놈들이 들이닥치지 못할 것이오! 다들 힘내시오! 달려라!”

이미 목적지는 정해진 듯하였으나, 요하를 건널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형님! 우리가 아무리 도적 떼 괴수에다가 옥을 파하고 도망치는 신세라도 개마무사 오백까지 동원하여 잡아들일 리 없지 않소? 저자들 대체 뭐요?”

기범이 기악에게 바짝 붙어 장 씨 삼 형제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말 위에다가 평소 목소리 통 자체가 큰지라 장 씨 삼 형제의 귓속으로도 그의 물음이 쏙 들어갔다.

“둘째야, 조용히 하거라.”

기악이 장 씨 삼 형제의 시선을 의식해 기범의 목소리를 줄이려 했으나, 눈치 없는 기범은 오히려 더 크게 물었다.

“형님! 얼마 전 간자가 잡혔다던데, 혹시 저자들 아니오?”

기악이 서둘러 기범의 말을 끊으려 할 때, 영리한 기훈이 잽싸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럴 리가요. 간자라면 총관부에 가둬 심문할 것인데, 안 그렇습니까? 큰형님.”

“당연한 말이다, 저들도 도적이라더구나.”

뒤에서 개마무사가 뒤쫓아 오는 상황에 장 씨 삼 형제와 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은 기악이 기훈의 말에 동의하며 기범에게 눈을 찡긋하여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기악의 신호를 알아들을 기범이 아니었다.

“형님! 눈에 흙 들어갔습니까? 눈은 왜? 아무튼 간자가 아니라니 아쉽군요. 저자들이 간자면 내 이 도끼로 손모가지를 잘라 꽁꽁 묶어 저 개마무사들에게 던져 주면 우리 삼 형제 목숨은 건질 것인데 아쉽네. 아쉬워.”

기범이 무척 아쉬워하는 소리에 장 씨 삼 형제의 등에서 식은땀이 쭉 흘러 옷이 흠뻑 젖으니, 이를 기범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댁들 전옥소에 갇혀 몸이 상한 모양이군. 오한이라도 온 게요? 뒤처지면 버리고 갈 것이니, 빨리 말 모시오!”

부리부리한 눈으로 험악하게 기범이 큰소리치니, 장 씨 삼 형제는 찍소리도 못한 채 애꿎은 말에 채찍질만 할 뿐이었다.

‘저 험악하게 생겨먹은 도적놈의 도끼질이 무섭던데, 조심해야겠구나. 헌데 저 머리 허연 중늙은이는 우리가 간자란 것을 알면서도 어찌 덮어 주는 것인가?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장 씨 삼 형제는 기범이 휘두른 도끼질에 옥이 풍비박산 나고 지키던 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날리던 것을 떠올리며 감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기억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속내가 두렵고도 고마웠다.

“형님, 이들과 함께 움직이다가 저 도끼에 손목 날아가는 것 아닐까요? 우리 정체를 저 중늙은이가 알지 않습니까?”

기범의 눈치를 보며 장 둘째가 소리 낮춰 말하였으나, 장 첫째가 답하기도 전에 기범의 우렁찬 목소리가 덮쳐 왔다.

“떠들지 말고 달리라고! 기껏 살려 줬더니 종알종알 거려? 우리가 요하를 건너기 전까지 너희들이 있어야 위급할 때 도울 것 아니냐! 두 번 다시 잡소리 하면 대가리를 쪼개 놓을 것이다!”

기범의 엄포에 잔뜩 기죽은 장 씨 삼 형제는 서로 눈짓만 하며 열심히 말을 몰았다.

‘저 도적놈이 위급할 때 우리에게 뒤를 맡기고 요하를 건널 요령인가 보구나. 저놈 비위를 맞춰야 우리도 요하를 건널 것인데 큰일이다.’

새벽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개마무사와 일전을 벌이며 반나절이나 달렸다.

아직도 요하는 아직도 멀었고 개마무사들은 지침 없이 뒤를 쫓으니, 장 씨 삼 형제의 마음은 언제 기범이 도끼를 휘두르며 개마무사를 막으라고 윽박지를지 몰라 점점 불안해져 갔다.

기악은 이들 장 씨 삼 형제를 흘깃 보고는 두 동생을 돌아보며 근심을 담아 물었다.

“너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뚫고 파옥한 것은 의외였다. 형장으로 이동할 때 올 것이라 짐작했건만, 헌데 셋째가 왜 안 보이는 것이더냐?”

이 물음에 기범이 어린애처럼 큰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고, 기훈도 눈물을 뚝뚝 떨구며 답하지 못하였다.

“아니, 왜들 우는 것이냐?”

기악이 놀라 되물으니, 기범이 고삐를 쥔 손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한참을 울다가 겨우 답했다.

“형님을 구하려고 요동성 내를 기웃거리다가 을지문덕이 놓은 덫에 걸려 우리 셋이 그만 잡혔지요. 아이고! 기룡아!”

“답답하다. 어서 마저 말하거라!”

기악이 재촉하니, 기범이 소리 높여 울며 마저 말하였다.

“아이고, 내 동생 기룡아! 형님 우린 놈들이 태왕 행차를 준비하느라 부산한 틈에 간신히 도망쳐 나오는데, 그만 놈들이 눈치 채 뒤를 쫓지 뭡니까.”

“뭐, 뭐라? 그래서?”

“기룡이 우릴 지키기 위해 나서다가 화살에 목이 뚫려 쓰러졌고, 그 틈에 우린 몸을 빼내 곧바로 전옥소를 습격한 겁니다. 지체하면 형님도 못 구할 것 같아서요. 아이고, 내 동생 기룡아! 네가 살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이고!”

기범이 울부짖으며 말을 몰아 달리니, 기악도 가슴이 찢어져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말에 몸을 맡겨 달릴 뿐이었다.

“큰형님! 우릴 공격한 온달이란 놈이 첫째 원수요. 강이식이 둘째 원수고, 을지문덕이 셋째 원수입니다. 우리가 요하를 건너 도망치는 신세지만 언젠가 다시 강을 넘어 저 세 놈의 심장을 갈아 마시고 그놈들의 간으로 성주탕을 달여 기룡 형님 영전에 올려야 합니다.”

기훈이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애끓는 목소리로 말하니, 기억이 눈에서 불꽃이 일며 답하였다.

“뼈를 갈아 마시고 놈들의 살점과 내장으로 기룡의 제사상을 차릴 것이다.”

기 씨 삼 형제의 섬찟한 다짐에 장 씨 삼 형제는 가슴이 서늘해 서로 눈짓도 교환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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