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9)
온달의 물음에 호타크가 두려움 없이 마주보며 답했다.
“갈 길이 급해 서서 말하겠소. 카사르 부족장! 나는 평화와 아버지를 원하오. 팽 선생 이 말을 전해 주시오.”
호타크의 말을 팽무일이 더듬더듬 고구려 말로 전했고, 카사르가 이미 호타크의 말을 들은 터라, 팽무일이 중간에서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평화를 원한다는 호타크의 말에 카사르의 표정에 그늘이 내렸다.
‘우리 부족만으로 커레이트 부족을 상대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우울렌을 구한 것도 모두 고구려인들이 도왔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들판에서 죽었고, 우리 부족은 항가이에게 짓밟혔을 것이다.’
카사르는 그늘진 표정으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호타크가 평화를 원하지만, 내 아내가 당한 치욕은 어찌할 것인가? 복수를 하고 싶다. 그러나 전쟁은 고구려인들도 피해를 입을 것이고 그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에 카사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사려 깊은 해진이 이마에 주름 가득 잡으며 불편한 음색으로 대신 화답했다.
“평화는 우리도 원하지만, 전쟁은 그대들이 시작했고 여기 카사르 족장의 부인을 그대의 아우 항가이가 욕보였으니,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소?”
“…….”
“카사르 족장과 그의 부족민은 우리 대고구려의 친구요. 고구려인은 친구를 위해 천 리 길을 달려 목숨을 바치길 주저하지 않으니, 평화를 원한다면 그대는 카사르 족장에게 납득할 답을 내어야 할 것이오. 카사르 족장과 저 커레이트 전사가 듣도록 경우 네가 말을 전하거라.”
경우는 해진의 이 긴말을 단 한마디도 어긋남 없이 전하였고, 그녀의 입을 통해 고구려인의 결의를 들은 카사르는 너무도 놀랍고 고마워 눈가가 붉어졌다.
“나의 아버지와 우리 부족은 저 멍청한 항가이의 파렴치한 행동과 무관하오. 항가이는 이미 독립하여 따로 부족을 꾸리던 중이었소. 물론, 항가이를 돕기 위해 출전한 것은 잘못이오. 인정하오. 그 잘못으로 우린 많은 전사를 잃었고 포로가 되었소.”
“…….”
“카사르 부족장과 그대들 고구려인들이 나의 부친과 우리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을 풀어준다면 우리는 이 초원을 떠나 저 멀리 바이골(바이칼 호수)까지 가 두 번 다시 그대들과 다투지 않겠소. 우리를 쫓은 카사르 족장이 이 일대의 주인이 될 것이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평소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뚝뚝한 성격의 호타크였으나, 아버지와 부족 전서들을 구하기 위해 무단히 애썼다.
팽무일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말을 전하느라 꽤 신경 써야 했다.
이번엔 팽무일이 전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독고선이 카사르와 온달의 표정을 살며시 살피며 대신 답하였다.
“그대가 전쟁 대신 평화를 취하여 일대의 주인을 카사르 족장에게 넘김은 합당한 처사라 생각하오. 또한 그대의 부족이 항가이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말도 이해하오.”
“감사하오.”
“그러나 이해는 이해일 뿐, 일대의 주인은 카사르 족장과 우리가 힘을 합쳐 싸워 쟁취할 수 있으며, 그대의 부족은 이미 항가이를 도와 공격을 취했으니 마냥 무관하다 말 할 수 없소.”
“아니…….”
“평화를 원한다면 카사르 족장의 복수를 위해 항가이의 목을 내놓으시오. 전쟁을 끝낼 때는 합당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오. 그렇기에 전쟁은 시작하기 어려운 법인데 그대들은 너무도 쉽게 전쟁에 참여했소. 항가이의 목으로 대가를 치르시오.”
차분한 독고선이 카사르의 복수를 위해선 단호히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하자, 카사르는 그저 고마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진과 독고선이 온달과 평강보다 윗선이 아님을 잘 아는 카사르였기에 이 모든 것이 온달과 평강을 포함한 고구려군 모두의 뜻이라 생각하여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경우가 전하는 말을 모두 들은 호타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도끼를 굳게 쥐었고.
온달 일행의 무예가 모두 뛰어남을 잘 아는 팽무일은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도망칠 궁리부터 하였다.
‘괜히 이곳에 와서 죽게 생겼구나. 도망친다 하여도 이 초원의 놈들은 눈이 밝고 활을 잘 다루며 말까지 잘 타니 멀리 못가 온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가 될 것이다. 더구나 나의 뒤마저 무식하게 생겨먹은 놈이 지켜 서서 금강대도에 손을 올려두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도 살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팽무일이 안달병까지 생기려 할 때, 호타크가 커다란 도끼를 왼손으로 치켜들어 올렸다.
“호타크님! 진정하시오!”
팽무일이 놀라 호타크를 급히 말렸고 경우가 활을 들어 호타크의 머리를 겨누었다.
온달은 호타크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두려운 기색 없이 묵묵히 앉아 바라만 보았다.
최근 해진으로부터 파천귀검을 틈틈이 전수 받으며 상대의 보법과 어깨의 움직임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었다.
왼손으로 도끼를 치켜든 호타크의 자세가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나! 커레이트 부족의 대전사 호타크. 그대들의 말과 사정을 모두 이해하오. 허나, 내 동생의 목을 내가 벨 수는 없으니, 나의 오른팔로 대신하겠소!”
이 말과 함께 호타크가 자신의 오른팔을 도끼로 내리치자, 호타크의 강한 어깨 힘이 도끼날에 더하여 매우 사나웠다.
깡!
뼈 가르는 소리 대신 쇳소리가 크게 울리고는 호타크의 오른팔을 자르려던 도끼가 해진이 날린 찻잔에 맞아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그만! 그 팔은 받지 않겠소!”
온달의 외침에 도끼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은 호타크가 강렬한 눈빛으로 해진과 온달을 살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반응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도끼를 주어 들고 카사르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건넸다.
“카사르 족장! 미안하오. 부디, 용서해 주시오! 내 동생 항가이에게 그대가 복수하고 싶다면 언제든 바이골로 와 싸우시오! 하지만, 이곳에서의 전쟁은 나와 전장을 누빈 이 도끼로 끝내고 싶소. 부디, 내 의지를 생각해 주시오. 카사르 족장!”
호타크의 진정 어린 행동에 도끼를 받아든 카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의 복수는 추후 바이골로 찾아가 이 도끼로 항가이에게 하겠소. 커레이트의 대전사 호타크, 그대의 말을 따라 평화를 받아들이겠소.”
“…….”
“허나, 나의 친구 독고선의 누이동생 독고영을 저자가 납치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 내 친구의 복수가 남았으니, 그 부분도 고려하여 주시오.”
카사르의 이 말에 호타크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팽무일에게 집중되었다.
“나? 나, 왜? 아니, 왜? 당신 몽고 부족과 고구려인들이 언제부터 친구라고… 아니 도대체 저 온달이란 놈은 왜 자꾸 나와 엮이는 거야?”
자신이 팔 한쪽을 잘라 내는 시늉을 할 시, 아무도 말릴 이 없으리란 생각에 정신이 반쯤 나간 팽무일이 아무 말이나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여 댔다.
독고선이 빙긋 웃으며 카사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의 친구 카사르 족장, 그대의 배려 감사하오. 난 저 거북이의 팔이나 목은 필요 없고, 등에 멘 칼로 대신하고 싶소.”
독고선의 이야기에 카사르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자, 안색이 조금 풀린 호타크가 팽무일을 재촉했다.
“팽 선생! 다행이오. 당신의 팔 대신 그 칼을 받겠다 하니, 얼른 주시구려.”
속도 모르고 호타크가 재촉하니 팽무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려 하였다.
‘이 미친, 이 칼이 어떤 칼인 줄도 모르는 미개한 놈이… 내 짧은 팔보다 이 칼이 더 귀한데…….’
팽무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때 뒤에 서 있던 막바우가 덥석 손을 뻗어 금강대도를 쑥 뽑고는 온달에게 잽싸게 다가가 두 손으로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이 칼은 독고선님께 드리시고… 헌데, 그 칼집은 안 줄 것이오?”
온달이 금강대도를 독고선에게 넘기며 팽무일에게 칼집마저 달라 요청하자, 팽무일이 시뻘게진 얼굴로 칼집을 들어 온달의 앞에 던졌다.
“잘 받았소. 하지만 다음엔 좀 더 정중히 주시구려.”
온달이 칼집을 주어 독고선에게 넘기며 말하니, 화가 치민 팽무일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흥, 다음에 또 뭔가 받길 원하는 것이오?”
팽무일이야 어떻든 무시하며 독고선이 금강대도를 칼집에 넣어 온달에게 다시 바쳤다.
“저는 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온달이 고개를 끄덕여 금강대도를 받아들고는 팽무일을 향해 엄히 말하였다.
“이곳이 안정되면 내년 봄쯤, 이 칼은 그대의 동생 팽무성 장주에게 전할 것이니, 정녕 갖고 싶다면 팽가장으로 가서 달라 말하시구려.”
이 말은 죽으러 가란 소리와 다를 바 없어 팽무일은 이를 바드득 갈며 분을 참아야 했다.
‘대전사 호타크는 개뿔. 이놈은 이제 믿을 수 없다. 돌아가 욕심 많은 항가이를 꾀어 대족장에 오르게 한 후, 복수를 하자. 이놈, 온달! 네놈이 언제까지 거만 떨지 두고 보겠다.”
* * *
호타크는 대족장 하노르와 커레이트 전사 일백을 데리고 떠나며, 목숨이 경각에 달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쇼락의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대를 두고 떠나야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구려. 미안하오. 부디, 나를 용서하시오.”
“대전사 호타크, 염려 마시오. 나는 야크보다 튼튼하여 금방 일어나 당신 뒤를 따르겠소.”
쇼락을 두고 가며 호타크는 카사르와 온달에게 연신 그를 부탁하였고, 온달은 이 사내의 마음 씀씀이가 대장부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했다.
이후 호타크는 약속을 지켜 부족민을 이끌고 머나먼 바이골까지 이동을 하였다.
이 소식은 곧 일대에 퍼져, 산지사방에 작은 부족으로 나누어 살던 몽고 부족이 게르를 걷어 홍산을 찾아와 카사르 밑에 살기를 청하였다.
이외에도 카사르의 장인도 올구누트 부족을 이끌고 와 카사르를 기쁘게 하였다.
“카사르 자네가 이 일대의 대세력인 하노르의 커레이트를 물리쳤다 들었네. 우리 부족도 자네의 밑에서 지내길 원하니, 받아주시게.”
올구누트가 합세하자, 다른 부족들도 카사르를 찾아와 안정을 도모하였고.
민족 구분을 두지 않는 초원의 부족 특성상 차별 없이 모두를 받아들이니, 가을이 오기 전에 카사르는 천부장 여섯을 거느린 어엿한 대족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 바이골로 이동하였던 커레이트 부족이 돌아와 전쟁을 치른들 카사르의 힘만으로도 능히 그들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였고, 멀리 떨어진 다른 대세력들도 감히 카사르와 맞설 생각을 품지 못하였다.
카사르의 부족이 세력을 더해 갈수록 협력 관계의 적봉진은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해졌다.
해진을 도와 온동이 쇼락을 보살핀 결과 그의 상한 뼈도 차츰 아물어가며 위험한 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며 온동은 해진과 독고선의 지도로 더욱 성장했다.
온달은 평강이 작성한 책으로 파산귀검을 수련하였으며, 막바우도 틈틈이 도둑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린 온동의 배움이 너무나 빨라 온달과 막바우의 수련을 더욱 채찍질하였다.
이런 나날 중, 나그네들이 전한 소식에 바이골로 향하던 호타크의 부족은 내분이 일어나, 대족장 하노르가 항가이에게 죽임을 당했고, 대전사 호타크가 군을 이끌고 항가이와 팽무일에 맞서 간신히 물리친 후 족장에 올랐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대족장의 죽음에 비분강개한 쇼락이 채 낫지도 못한 몸으로 말을 달려 호타크를 도와 배신자 항가이의 목을 베고자 하였으나, 온달과 카사르가 그를 진정시켰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항가이는 다시 올 것이오. 몸을 추슬러 그때 싸워도 늦지 않소.”
“그렇소! 온달 장군의 말이 옳소. 항가이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초원을 뒤져 찾아내 이전 복수를 할 것이니, 쇼락 그대는 그때 나와 함께하여도 되오.”
이때부터 쇼락은 카사르 부족에 남아 온동에게 말 다루는 재주를 가르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