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8)
해가 뜰 무렵, 경계를 엄히 세운 온달은 다친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을 치료하라 명하고, 사망자는 예를 다해 초원의 풍습대로 묻으라 지시 내렸다.
대족장 하노르의 손발을 묶은 줄을 풀어주고, 온달과 평강이 사용하던 게르에 감금하며 병사를 두어 감시케 하였다.
또한 천부장 쇼락은 부상이 매우 심하여 따로 사람을 두어 돌보게 하였다.
포로로 잡은 커레이트 부족 전사의 수가 일백여 명이 넘어 지키기에도 매우 벅찬 상태였으나,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초원의 관습이라면 적의 시체는 늑대와 독수리의 밥이 되는 것인데, 이다지도 정성을 다하는군요.”
커레이트 전사들의 시체를 묻는 모습에 커사르가 막바우에게 말을 건넸으나 알아들을 리 없는 막바우였다.
하지만, 카사르도 적을 예의로 대하여 매장하는 광경이 싫지 않아 그 목소리가 부드러웠기에, 막바우는 카사르가 대승을 거두워 기분 좋은가 보다 생각하였다.
“살아 돌아간 적이 오백여 명가량 된다 합니다.”
독고선이 온달의 곁에 다가와 전투 결과를 보고했는데, 온달의 고구려군과 카사르의 전사들은 사망자 없이 이십여 명의 부상자만 내었다.
“우리의 전투 가능 인원은 일백구십오 명, 카사르의 전사들은 칠십팔 명입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군요. 다행입니다.”
담담히 답하는 온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침착한 독고선은 아직 보고할 것이 남은 듯했다.
“살아 돌아간 적이 오백여 명에, 대전사 호타크가 아직 사천의 전사를 이끌고 있으니, 수일 내로 더 큰 전투가 예상되오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부분은 대족장을 생포한 점입니다.”
“아직 적의 수는 여전하군요. 확실히 소수로 많은 수를 대적함은 고난한 일입니다. 좀 더 싸워야 할 테니,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후 준비해야겠습니다.”
수가 적은 병력이 대군을 상대할 때는 전술과 기동 역시 중요하지만, 매 전투 매 상황에 운이 따라야 했고, 대군은 단 한 차례만 운이 좋아도 이기기 마련이다.
독고선이 온달의 명을 받아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부디, 호타크가 부친의 안위를 염려하는 자이기를 바랄 뿐이지요.”
평강이 세운 본래 계획은 하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일부러 자신들이 사용하던 게르마저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비가 사로잡혔는데도 혼자 살기 위해 내뺀 항가이의 행동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호타크도 별반 다를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대족장이 인질로 가치가 없을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일대의 지배자이니, 예를 다하라 각별히 주의를 주시고, 그 용맹한 돌풍 천부장 쇼락이 쾌유토록 극진히 보살피시구려.”
“명을 받습니다만, 쇼락이란 장수의 명은 며칠 남아 보이지 않습니다.”
침착한 독고선의 의견인지라, 온달이 안타까워하며 탄식하였다.
“적이지만, 주군을 위한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였는데…….”
포로가 일백이 넘으니, 감시도 힘들었고 다음 전투 준비도 서둘러야 하기에, 여인과 아이들까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 속에 온동과 독고영의 모습도 보였다.
어리디 어린 사내아이가 앞장서 달려가며 어른들을 돕고 그 뒤를 더 조그만 여자아이가 쪼르르 따르며 돕는 모습에 왜인지 온달의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우리가 지면 누가 저토록 돌보겠소. 다음 전투도 대승을 거두어야 피해가 적을 테니 서두릅시다.”
* * *
호타크는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 항가이와 오백여 전사들 앞에서 분노로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떨구고는 국 끓던 솥에 걸쳐진 뜨거운 국자를 집어 들었다.
이내 호타크는 당장 달려가 국자로 항가이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살아 돌아 온 것이더냐? 아버지를 버려 두고 살아 돌아 온 것이더냐? 오백 명이나 남았는데, 다시 돌아가 아버지를 구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더냐?”
“…….”
“멀쩡한 전사 오백이나 있으면서, 고작 이틀을 거지꼴로 돌아오기만 한 것이더냐? 네가 정녕 사람 새끼냐! 늑대도 너처럼 살지는 않는다!”
천부장들이 달려와 호타크를 간신히 뜯어말리지 않았어도 국자 따위에 맞아 항가이가 죽을 위인은 아니었으나, 뭐가 그리 무서운지 항가이는 땅을 벌벌 기며 변명조차 제대로 못 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
호타크가 국자를 패대기치며 항가이를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자, 그제야 항가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이 있었습니다, 형님, 고구려의 대군이 홍산에 숨어 야습을 했습니다.”
이틀 동안 말 달리며 커레이트 전사들이 지난 전투를 곰곰이 되씹어 보았으나, 고구려군이 야습한 것은 맞았지만 그들의 수가 결코 대군은 아니었었다.
하지만 사실을 고할 지휘관이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이라! 고구려의 대군? 그들이 왜 그곳에 있단 말이냐? 터무니없는 소리다. 가당치 않은 변명으로 잘못을 덮으려는 네놈의 모가지를 분질러 주마!”
오히려 호타크가 더 격분하자, 항가이가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나이든 천부장 한 명이 나서 겨우 호타크를 진정시켰다.
“대군은 아닐지라도 고구려군이 그곳에 있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나, 자칫 고구려와 전면전이 될 수 있으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역시 호타크는 대전사라 불릴 만큼 지혜도 뛰어나, 늙은 천부장의 조언에 격노를 억누르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곧 명을 내렸다.
“팽 선생을 모시거라!”
호타크의 명을 받은 전사가 달려가 멀리 떨어진 게르 안에서 팔다리가 짧고 머리가 몸뚱이에 달라붙은 땅딸보 사내를 데려오는데, 형상이 거북이를 닮았고 등에는 제 키보다 더 큰 환도를 메고 있었다.
망우산에서 온달에게 쫓겨 줄행랑 놓은 팽무일이었다.
“호타크님 부르셨습니까?”
팽무일이 공손히 예를 올리며 주위를 살며시 둘러보니, 지난번 출병 결과가 꽤 나빴음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양이나 치던 비렁뱅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어디서 줘 터지고 왔구나. 헌데, 대족장 하노르가 보이질 않네?’
팽무일은 동생 팽무성과 팽가장의 고수들이 두려워 중원으로도 못 가고 고구려는 더욱 몸 둘 수 없어 북방 초원으로 올라왔다.
그는 손님을 반기는 대족장 하노르의 배려로 커레이트 전사들에게 알량한 무예 지도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커레이트 부족의 극진한 대접에도 본성이 치졸하고 간사한 팽무성의 속마음은 항상 이들을 미개하다 업신여겼다.
“고구려군이 몽고 부족을 도와 아버지가 포로가 되셨소. 팽 선생 그대는 고구려 말을 할 줄 아시지요?”
‘아하! 나의 힘이 필요로 한 게로구나! 이 빌어먹을 풀밭에선 그나마 이들 커레이트 인들이 일대의 세력가니, 이들을 도와 훗날 무성이를 혼내 줄 때 도움 좀 받아야겠다.’
그 순간 팽무일의 머리가 재빨리 돌며, 그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고구려군이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오겠나? 군을 피해 도망쳐 온 고구려 비적 떼거나 그들을 쫓아온 군사겠지. 아무튼 내겐 실력을 보여 줄 좋은 기회다.’
팽무일은 느긋한 표정으로 호타크의 말에 화답하였다.
“그것 참으로 큰일 아닙니까?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대족장의 무탈을 빌며 돌아오시게 최선을 다해 돕겠소. 무엇을 도우리까?”
그의 자신만만함은 사실, 카사르의 전사가 일백 남짓이란 소리를 이미 들은 바 있고, 고구려 군사 몇쯤 아무것도 아니란 판단과 함께 커레이트 전사 사천여 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소! 팽 선생 고맙소!”
호타크가 감격해 팽무일의 두 손을 잡고 연신 허리를 숙이자, 팽무일이 거만한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물었다.
“그래, 출병은 언제 하시오?”
“출병은 하지 않을 것이오.”
“아니, 뭐 그런… 허면?”
호타크의 말에 팽무일이 당황해 묻었으나, 호타크는 거짓 없는 진지한 눈으로 팽무일을 더 불안케 하였다.
“아버지가 그들의 포로인데 싸울 수야 없지요. 나와 선생 둘만 가서 화친을 청하고 아버지를 모셔옵시다. 어서 준비하시오.”
“아니 아니… 아, 이런 뭐. 아… 네 아무튼 준비하겠습니다.”
이 순간 팽무일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근접전에 약한 몽고 전사 나부랭이와 고구려군 몇 정도는 금강대도로 제압할 수 있고, 호타크의 전사 사천여 명이 뒤에 있으니, 적이 아무리 무지몽매하여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함께 동행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 * *
이틀을 호타크와 단둘이 말을 달려 홍산 앞까지 온 팽무일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놈의 인간들은 어찌 이리도 말 위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인가? 하여간 말에 관하여 이 초원의 인간들을 대적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팽무일이 이런 불평을 하는 중에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카사르의 부족 전사 중 한 명이 말을 몰아 나오더니, 앞장서 길을 열어 주었다.
안내를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팽무일의 눈에 포승줄에 묶여 무릎 꿇은 커레이트 전사 일백여 명이 들어왔다.
또한 홍산 위의 목책도 보였으며 각궁과 환도, 박도, 곡도로 무장한 몽고 전사들의 모습도 들어왔다.
‘이들의 무장이 고구려군과 비슷하여 커레이트군보다 우위에 있다. 어찌 된 일인가? 분명 저 홍산 위에 고구려군이 있을 듯한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일부러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일 테지.’
팽무일이 놀라 속으로 의아해할 때, 앞장서던 몽고 전사가 손짓으로 경비가 삼엄한 게르 안으로 들라 하였다.
호타크와 팽무일은 일부러 더욱 당당히 게르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커레이트의 전사 호타크요. 그대들과 평화를 논하고 부친을 모시러 왔소.”
호타크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며 말하자, 팽무일도 따라 예를 올렸다.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으나, 본좌는 중원 무림의 검술 명가, 하북 팽가장의 장남 팽무일이라 하오. 커레이트의 대전사 호타크와 함께 대족장을 모시러 카사르 족장을 뵙소.”
팽무일은 감히 중원 무림의 인사를 네놈들이 알겠느냐는 생각으로 거드름 피우며 말하고는 짧은 목을 들어 게르 안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었다.
그때였다.
“뭐야? 팽무일이잖아?”
팽무일의 등 뒤에서 막바우가 대꾸하며, 팽무일이 등에 멘 금강대도에 커다란 손을 올렸다.
“내 여동생을 납치했던 팽무일이로군. 네놈이 어찌?”
온달의 곁에 앉은 독고선도 놀라 중얼거리다가 화친에 결례가 될 듯싶어 급히 입을 닫았다.
‘원래 납치범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인가?’
이 말은 그저 침착한 독고선의 생각으로만 남았다.
동생 항가이가 카사르의 아내를 납치해 사달이 났음에 격노한 호타크였기에, 팽무일이 여자아이를 납치했었단 사실에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도 상종 못 할 패 죽일 개놈이구나!’
눈치 빠른 팽무일인지라 사방에서 살기를 느끼며 버벅거렸다.
“아니… 아니. 뭐 이런… 아니.”
팽무일이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니, 상석에 카사르와 온달, 평강이 나란히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그 양옆으로 해진과 독고선, 경우 등 낯익은 얼굴들이 도끼눈을 뜬 게 들어왔다.
더구나 막바우가 등 뒤에 서서 자신이 금강대도를 뽑지 못하게 손을 뻗고 있으니, 그 어디에도 살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와 저 온달이란 놈과는 전생에 뭔 원수가 져서 이다지도 엮인단 말이더냐?’
팽무일이 이렇듯 한탄할 때, 온달의 당당한 음성이 웃음을 담아 게르 안에 울렸다.
“그래, 두 분께서 이토록 용감히 적진에 들어오신 연유가 어찌 되시는지 듣겠습니다. 일단 편히 앉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