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7)
“날아든 화살 수가 생각보다 많고, 우리의 사거리가 길어, 놈들은 이 홍산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평강의 말대로 적의 활은 홍산 중턱까지 올라 날려야 정상 위 목책에 겨우 사거리가 닿았다.
그러나 온달의 고구려 군과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목책 뒤에 숨어서 살을 날려도 충분히 홍산 아래까지 닿고도 남았으니, 하노르가 무리해 홍산을 오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둔한 항가이는 달랐다.
항가이는 전사가 아닌 도적이었고, 그의 머릿속엔 전술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천부장에게 질질 끌려 나와 바닥을 긴 망신을 한 번에 만회하고 싶은 치기만 있을 뿐이었다.
온달 일행이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게르에 온동이 급히 뛰어들며 소리쳤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구먼유. 어두워 보이진 않지만, 그 사람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유!”
귀가 밝아도 너무나 밝은 온동이란 아이가 홍산 위에 있음을 항가이는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일제히 밖으로 나가 보니, 온동이 가리키는 산 중턱에 어둠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런, 딱 사정거리군요.”
경우가 온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카사르가 손짓을 해왔다.
그러자 전사 십여 명이 횃불에 불울 붙여 들고 와 미리 준비한 짚을 실은 수레 십여 개에 불을 붙였다.
준비를 마친 카사르가 온달을 올려다보자, 평강이 대신하여 답하였다.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시작하시지요.”
카사르의 지시로 십여 개의 수레가 일시에 미끄러지듯 산 아래로 내려가자, 바퀴가 덜컹거릴 때마다 수레에 실린 불타는 짚더미가 튀어 사방으로 날렸다.
산 위에서 불붙은 수레들이 내려오며 주위를 밝히자, 당황한 항가이와 함께 산을 오르던 전사들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이 불빛에 드러남과 동시에 빗발치듯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기습이 실패함은 물론이요.
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다 생각한 항가이는 퇴각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자신만 살고자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고, 그 뒤로 쏟아지는 화살 속에 그의 전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간신히 산 아래까지 내려온 항가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니, 불타는 수레들로 산 중턱이 아직도 환히 밝았고 그 속에 자신의 부하들이 쓰러져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 무능하고 멍청한 자식! 어찌 이리도 제멋대로냐!”
격노한 천부장이 달려와 항가이의 텅 빈 머리통을 발로 차 기절시키기 전까지.
그가 한 것은 제 부하를 사지에 몰아넣고 멍하니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 * *
항가이의 기습을 물리치고 다시 게르에 돌아와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온달 일행의 표정들이 사뭇 어두웠다.
“야습을 해도 되겠습니까?”
산 아래의 경계가 삼엄해졌으리라 생각한 경우가 물었으나, 이번엔 평강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이번 적의 기습을 막은 탓에 적들의 경계가 심해졌을 것이오. 오늘 밤 야습은 어렵지 않겠소?”
온달이 평강을 대신하여 의견을 내니, 다른 이들도 이 의견에 반론을 내지 못하였다.
‘오늘 밤 야습을 못 하여도 내일 하면 되지만, 점점 물과 식량이 줄어들 테니, 아침이 되면 바로 물자 점검을 해야겠구나.”
평강도 온달의 말에 동의하며 하루 더 버틸 준비를 하는데, 게르 밖에서 또다시 온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 반대편 산 아래엔 사람 소리가 줄었구먼유.”
온동의 이 말이 평강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였다.
“온동이냐? 늦도록 네가 귀 기울여 경계를 서느라 고생이 많구나. 이리 들어오너라.”
평강이 다정히 부르니, 온동이 조심조심 들어와 꾸벅 인사를 하였다.
“회의하시는데, 송구하구먼유.”
“아가, 괜찮다. 방금 한 말이나 마저 해보렴.”
평강이 온동의 입을 틔우니, 하고 싶은 말을 술술 꺼냈다.
“좀 전에 쳐들어오던 방향으로 아직 수레가 활활 타고, 자빠져 신음과 비명을 지르니, 산 아래에서 그걸 바라보며 지키느라 반대편 산 아래의 경계 서는 사람 수가 줄었구먼유. 소리가 거의 안 들려유.”
온동의 이 말에 평강은 바로 계책을 생각해 냈고, 병법을 익힌 독고선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해진도 깨닫는 바가 있어 동시에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났다.
“제가 말을 달려 단숨에 내려가 뒤를 칠 테니, 혼란한 틈에 온달님께서 앞을 쳐 대족장을 잡으십시오!”
“이 해진이 더 늙어 말에 오르지도 못하기 전에 아직 생생한 허리로 말에 올라 놈들의 시선을 흐트려 계획대로 야습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들의 지원에 이미 계획이 선 평강이 방긋 웃었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바우도 뭔가 해볼 요령으로 벌떡 일어나 지원하였다.
“뭔지 모르겠으나, 나도 가겠습니다!”
“든든합니다. 독고선님과 막바우님이 군사 오십을 이끌고 뒤편으로 돌격하여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주십시오. 우리 온달 장군님과 해진님, 경우님이 남은 병사를 이끌고 정면을 공격하시고요.”
“네.”
“아, 카사르님은 부족 전사들을 이끌고 좌측에서 불화살을 날려 놈들의 시선을 끄신 후, 독고선님과 막바우님이 기습하여 혼전이 벌어지면 바로 말을 몰아 내려가 놈들의 뒤에서 살을 날리십시요.”
“알겠소.”
“이 홍산이 비록 작으나 일천으로 에워싸기엔 부족하며, 주의가 흐트러진 지금은 더욱 포위망이 엉성할 것입니다. 독고선님과 막바우님은 커사르님이 공격을 시작하여 불화살을 날리시면 돌격을 시작해 주십시오.”
평강의 계획에 모두가 수긍하여 바로 맡은 위치로 이동하였다.
* * *
카사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노르 군이 경계를 서기 위해 불을 밝힌 모닥불 덕에 멀리까지 환히 시야가 잘 확보되어 있었다.
기름 먹인 화살에 불을 붙여 날리자, 어두운 밤하늘에 유성우가 쏟아지는 장관이 펼쳐졌고, 좌측 하늘이 불타오르자 독고선과 막바우는 바로 말을 몰아 산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좌측에서 불벼락이 홍산 뒤편에서는 말울음이 동시에 일자, 놀란 전사들을 독려하며 천부장이 소리쳤다.
“놈들의 야습이다! 뒤로 돌아오는 놈들을 막아 포위망이 뚫리지 않게 하라!”
천부장의 명에 뒤편 수비를 담당한 백부장 두 명이 서둘러 말을 몰아갔다.
그런데 어느새 산을 내려온 독고선이 경비 서던 전사들의 몸뚱이를 단번에 창으로 뚫고는 길을 열자, 근접전과 야습에 익숙한 고구려 기병들이 청과 칼로 하노르의 전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에 격분한 백부장 둘이 동시에 말을 달려왔으나, 독고선이 창을 한 번 휘둘러 둘을 동시에 떨구었고 이 광경에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은 서로 앞 다퉈 도망치기 바빴다.
막바우도 그동안 독고선의 봉술을 잘 배웠는지, 마상에서 창을 놀리는 솜씨가 제법이라 벌써 그의 창에 다섯이나 쓰러졌다.
커레이트 전사들이 야습에 맞서기 위해 말에 오를 틈도 주지 않고, 온달이 해진과 경우와 함께 정면으로 말을 달려 내려왔다.
결국 마상 위에서 경우가 날린 화살에 백부장 하나가 절명하였고, 해진 역시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자에게 비검술을 시전하여 또 다른 백부장이 절명하였다.
온달이 가장 앞서 달리며 산 아래에 내려가자마자 마주한 적들에게 운철 대검을 휘두르니, 어둠을 닮아 시커먼 운철 대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달의 군은 말에 올라 창과 칼을 휘둘렀고, 커레이트 군은 미쳐 말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기병과 보병의 대결이 되었다.
가뜩이나 근접 무기가 부실한 커레이트 전사들은 치열한 백병전에 이골이 난 고구려군의 칼날에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뿐이었다.
온달은 곧장 자신이 사용하던 게르를 찾아 말을 몰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커레이트 전사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흉곽을 부쉈다.
그렇게 그가 지나는 길은 비명이, 그가 나아갈 길은 도망치는 아우성만 가득하였다.
게르에서는 겁에 질린 항가이가 튀어나오다가 기골이 장대한 온달이 그보다 더 큰 시커먼 검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기세에 놀라 털썩 주저앉았는데.
어느새 말을 몰아 도착한 독고선이 창으로 항가이의 뒤통수를 후려쳐 쓰러뜨렸다.
“이건 너무 젊은데요? 어? 그놈이네. 항가이!”
막바우도 말을 몰아오더니, 바닥에 쓰러진 항가이를 살피고는 온달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런… 대족장이 아니구나!”
온달은 항가이를 막바우에게 넘기고 말 머리를 돌려 하노르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마침 하노르가 근처 게르에서 나오더니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날이 휜 곡도를 빼 들고 달려왔다.
“대족장! 안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천부장이 말을 끌고 와 하노르를 태우고는 자신의 안위도 생각지 않고 평소 싫어하던 항가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온달은 이 용감한 사내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혼신의 힘을 실어 운철 대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천부장은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천부장의 몸이 밤하늘에 날아올랐고, 온달의 돌진은 여전하여 하노르의 뒤를 쫓았다.
“대족장! 어디 가시오! 나 좀 봅시다!”
온달의 이 기세가 너무도 흉악해 보인 하노르는 고구려 말을 알지 못하여 온달이 자신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고 엄포 놓는다 생각하며 혼이 나가 말 달리기 바빴다.
바닥에 쓰러졌던 항가이는 천부장이 이끌고 온 커레이트 전사들이 막바우에게 달려들자 제 몸 살리기 위해 땅을 기어 내빼기 시작했는데…….
커레이트 전사들을 모두 창으로 뚫어버린 막바우가 횃불을 들고 반대편으로 찾아다니자, 이 틈에 냅다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하노르를 쫓는 온달에게 급히 달려온 하노르의 충성스런 백부장 셋이 일시에 화살을 날리며 말을 몰아 덤벼드니, 온달도 말을 멈추고 이들의 화살을 막아야 했다.
이 틈에 하노르가 멀리 도주하는데 그 앞으로 쏟아지듯 화살이 날아오며 카사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결국 하노르도 좌절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대족장! 옆으로 말을 모십시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천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온달의 운철 대검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 천부장이 고통을 참으며 말을 달려 카사르의 앞을 막았고, 또다시 하노르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노르가 어두운 들판을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뒤따르는 커레이트 전사의 수는 계속 줄었다.
또한 멀리서 뒤를 쫓는 말울음과 함께 한 대의 화살이 날아와 하노르가 탄 말 머리에 박히며 노련한 하노르도 말과 함께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 제일의 명궁, 경우의 화살이었다.
거친 들에 나뒹군 대족장을 구하기 위해 커레이트 전사들이 말을 돌리려 할 때.
온달과 독고선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운철 대검과 창을 휘두르니, 속절없이 모두의 명줄이 끊기었다.
그러나 대족장을 구하고자 이번에도 천부장이 피를 철철 흘리며 오십여 명의 커레이트 전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라 죽기 전까지 결코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온달의 운철 대검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카사르가 이끈 전사들의 화살이 네 개나 등에 박혔으면서도 그의 투지만큼은 그 누구보다 대단하였다.
“독고선님은 대족장을 사로잡아 가시오! 놈들은 내가 대적하겠소!”
온달이 불사신 같은 천부장을 인정하며 앞을 막아서니, 독고선이 하노르를 말 위로 끌어올려 싣고는 온달의 뒤를 지켰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온달이 가장 익숙한 몽고어로 천부장에게 묻자, 달려오는 기세를 유지하며 천부장이 답했다,
“쇼락! 내가 쇼락(돌풍)이다!”
금방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도 그의 기세는 굳건하여 과연 돌풍이란 이름이 잘 어울렸다.
천부장이 선두로 달려오며 맹렬히 곡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길이에서 앞선 운철 대검이 바람을 가르며 그의 곡도를 박살내고는 그대로 천부장의 어깨뼈마저 으깨었다.
그렇게 용맹한 천부장이 몸을 꺾으며 말 위에서 떨어지니, 수하들은 기가 꺾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커레이트의 대족장 하노르를 사로잡은 대승이었다.
해가 떠오를 때쯤, 커레이트 전사들은 온달의 기습으로 사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대족장마저 잃은 체 하염없이 말을 달렸다.
이들의 목적지는 호타크가 남은 커레이트 부족이었고, 이 패잔병들의 우두머리는 목숨줄만큼은 그 누구보다 긴 항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