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72화 (72/328)

072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6)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날린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덮자, 이내 곧 돌격을 시작한 하노르와 항가이의 중앙 본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의 수는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좌우 양측에서 에워싸며 전진하던 하노르의 전사들이 말을 급히 몰아 나오며 화살을 날리니, 오히려 위급해지는 것은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었다.

“말을 몰아 홍산에 오른다!”

카사르의 명에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려 홍산으로 향하며 몸을 돌려 살을 날리는데, 이 솜씨들이 신묘해 한 발 한 발 정확히 다가오는 적을 마상에서 떨구었다.

하지만 말을 달려 화살을 날리는 사법은 적들도 구사 가능하며, 당장 사거리를 좁히지 못할 뿐이지, 수적 우세로 화살의 수가 많은 적이 금세 카사르의 부족 전사를 제압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과연, 놈들의 화살이 무섭구나! 더욱 속도를 내어 뒤를 쫓으며 살을 날려라! 사거리를 좁혀야 한다!”

단 한 차례의 일제 사격으로 자신의 전사 수십 명이 나뒹군 것에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을 칭찬하며 하노르가 달리는 마상에서 재차 명을 내렸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진군한 탓에 아직 힘이 펄펄 나는 말들이 주인보다 더 기세 좋게 퇴각하는 적의 뒤를 쫓으니, 이미 승기는 하노르의 군에게 온 듯 보였다.

“더욱 속력을 내어 홍산을 올라라! 뒤를 잡혀선 안 된다!”

목이 터지라 카사르가 외치며 몸을 돌려 활을 당기니, 여지없이 적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홍산이 점점 가까워지자, 뒤를 쫓는 적들도 점점 사거리를 좁혀왔고 카사르는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더욱 크게 소리쳐 독려하였다.

“말에서 내리지 마라! 그대로 홍산을 오른다! 달려라! 달려야 한다!”

드디어 홍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적들도 세 방면에서 몰려오며 화살을 날렸고 이제 사거리는 거의 좁혀 있었다.

“좀 더 힘을 내 쫓아라! 사정거리가 좁혀져 간다!”

도주하는 적의 뒤를 쫓는 쾌감에 흠뻑 젖어 든 항가이가 크게 소리쳐 명을 내릴 때, 늙은 대족장 하노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서라! 도망칠 곳 없는 산에 오르는 놈들이다. 무리해 쫓지 말고 에워싸 투항을 받아야 한다.”

“아닙니다! 놈들이 산에 올라 저항하면 우리의 피해도 커질 것이니, 산에 오르기 전 뒤를 잡아야 합니다.”

“항가이야, 놈들이 저항하면 우리도 피해가 커질 수 있으니, 뒤를 쫓지 말고 에워싸 투항을 받자는 말이다.”

아비가 좋은 말로 권했지만, 이미 승리에 도취한 항가이는 이 소리가 그저 노인의 근심이라 생각하여 무시하고는 자신의 전사 칠백을 돌아보며 급히 명을 내렸다.

“잡아라! 놈들이 산에 오르기 전 뒤를 쳐야 한다!”

항가이의 명령에 거침없이 칠백의 전사가 함성을 지르며 성난 파도와 같이 내달리니, 그 기세가 무척 사나웠다.

카사르 부족 전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홍산을 날듯이 올라 벌써 중간 이상 올랐다.

항가이의 전사 칠백도 살을 날리지 않은 채 뒤를 쫓는 데만 전념해 어느새 홍산 아래에 당도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홍산의 목책 사이에서 화살 수백 발이 일제히 날아와 항가이의 전사들을 향해 쏟아졌는데.

본디 화살은 높은 곳에서 쏘는 경우 더 멀리 나르고 위력도 강하여 항가이의 전사들 목에서 비명을 뽑아내고 몸에서 피를 뿜게 하였다.

“아니, 이런!”

감정 기복이 심한 항가이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하노르가 아들의 말고삐를 대신 쥐어 끌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는 말하였다.

“적을 너무 급히 몰면 안 된다. 다치진 않았느냐?”

“아버지, 어찌 저 위에서 날아온 화살의 수가 이다지도 많답니까? 고작 노인과 여인, 아이들이 피해 올라간 곳인데…….”

“본래 사내들이 전장에 나서면 올루스는 여인들과 노약자들이 지키는 법이다. 저들도 한 사람의 전사로 인정해야 하느니라.”

“고작 노인과 여인네들이 날린 화살에…….”

항가이의 전사들은 산을 오르며 화살을 날리기 여의치 않고, 날린들 홍산 위 사람들은 튼튼한 목책에 몸을 가린 상태라 타격을 주기 어려워, 이백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홍산에서 물러나야 했다.

노련한 하노르는 혼란 속에서도 적이 날린 화살의 수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올라간 수에 비하여 화살의 수가 너무 많은 것 같구나.”

“대족장의 눈이 정확하십니다. 수가 많고 정교합니다. 뭔가 더 있습니다.”

영리한 천부장이 하노르의 말을 받아 답하며, 카사르의 부족 누구도 산을 벗어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홍산을 에워싸 포위하라 명하였다.

하노르와 천부장이 군을 재정비하는 동안, 어리석은 항가이는 홍산 아래에 크고 화려한 게르를 발견하여 그 누구도 먼저 약탈하지 못하도록 말을 달려 차지했다.

그리고는 수하들에게 밖을 지키라 명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하노르와 천부장이 전사들을 움직여 홍산을 둘러싸는 동안.

항가이의 남은 전사 오백여 명은 전투를 뒷전으로 양 떼와 게르 뒤지기에 여념 없어 아비 하노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전리품을 나누어야 하거늘… 어찌 저리도 서두른단 말인가?”

대족장의 한탄에 충성스런 천부장이 애써 마음을 달래 주었다.

“우리는 대족장을 따라 싸울 뿐, 이 조그만 전투에서 전리품에 욕심낼 생각은 누구도 없습니다. 항가이의 부족 전사들이 원한다면 모두 주셔도 되십니다.”

그의 말대로 주인 잃은 초원의 양 떼와 게르 오십여 개로는 전리품을 나누기에 너무나 작았다.

“호타크의 말대로 과연 얻을 것이 없고 사상자만 낸 싸움이다.”

큰아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전투라 하노르는 입맛이 썼다.

영토를 탐하지 않는 초원의 민족 특성상 사람이든 가축이든 혹은 게르를 털어 나오는 재물이든 이것을 취하면 사실상 전투는 종료되고 약탈자들은 만족해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사상자가 나왔으나, 게르와 양 떼를 취했으니 하노르와 항가이의 연합군이 승리했음은 분명하였고, 전리품을 취하기 위한 약탈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목적은 항가이의 복수전으로 카사르의 투항이나 목을 베어야 마무리됨이 당연하여, 하노르의 전사들은 그 누구도 전열에서 이탈하여 약탈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자신의 복수를 위해 지원 온 하노르 군의 성의마저 무시한 채 약탈에 앞장선 항가이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였다.

“대족장, 곧 날이 저물 것입니다. 모실 게르를 찾겠습니다.”

천부장이 하노르를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단연 돋보이는 게르가 눈에 들어왔다.

터무니없게도 그곳에는 항가이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었다.

격분한 천부장이 그대로 말을 몰아 게르 앞에 서서 채찍으로 항가이의 수하들을 쫓고는 게르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항가이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왔다.

“아무리 배은망덕한 도적놈이라도 아버지를 모실 게르를 훔칠 수 있더냐!”

용맹하기로 항가이의 형인 대전사 호타크 다음 가는 천부장이 노해 꾸짖은 것이다.

못난 항가이는 땅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였다.

“됐다. 그냥 쓰게 두어라. 나는 저기 묵겠다.”

어차피 항가이는 후계자도 아니며 더 가질 것도 없으리라 생각한 하노르가 천부장을 말리고는 항가이가 차지한 커다랗고 화려한 게르와 조금 떨어진 작고 초라한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천부장이 뒤따라 들어가면서 이후의 일을 묻자, 하노르가 양 가죽이 펼쳐진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답했다.

“이 게르 안을 보게. 말린 양고기와 마유주가 가득하지 않은가? 저 밖엔 양 떼들과 여분의 말들도 그대로 있고. 놈들은 저 홍산에 올라 우리가 이것들을 취하고 떠나길 바랄 것이야.”

“…….”

“하지만 우린 그들의 뜻을 따르진 않을 것이고. 이대로 양을 몰아 돌아가면 우린 그저 약탈자가 되는 게야. 놈들이 저 홍산 위에서 무엇을 먹고 지내겠는가?”

“…….”

“버텨 봐야 스스로 무너져 수일 내로 투항할 것이고, 우린 그들을 받아줘 용서하면 약탈자가 되지 않을 것일세. 물론 이 전투에서 다치고 죽은 이들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겠지. 자네도 좀 쉬게.”

“놈들이 산을 내려와 저항하지 않겠습니까?”

“굶어 죽기 전에 뭔가 하려 하겠지. 그러니 경계를 단단히 하게나. 지금은 놈들도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테지만, 밤이 되면 그제야 갇혔다 느끼고 생각이 많아지겠지. 아마도 내일 새벽 해가 뜨면 포위망을 뚫고자, 시도하지 않겠나?”

자신의 나이보다 더 많은 전투 횟수를 경험한 하노르의 예감은 늘 맞았고, 천부장은 항상 그를 진심으로 따르었기에 바로 명을 받아 나갔다.

* * *

서쪽 들판으로 해가 누우며 붉은빛이 초원을 물들이자, 가뜩이나 붉은 홍산이 핏빛으로 변하며 기괴해 보였다.

천부장은 홍산 아래를 지키는 전사들에게 환히 불을 밝혀 삼엄히 경계를 명하였다.

산이라 하기에 너무도 작은 겨우 구릉 정도 크기의 홍산을 둘러싸고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자 영락없이 불길이 홍산을 포위한 형국으로 저 위에서도 이 불빛으로 인하여 천 명이 넘는 전사들이 엄히 지킴을 확인해 감히 내려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숙소로 정한 자신의 게르로 돌아온 천부장은 백부장들을 소집해 인원 보고를 받았다.

“항가이의 군사는 오백이십 명이 전투 가능하며, 우리는 팔백칠십 명이 전투 가능합니다.”

잠깐의 전투로 삼백여 명이나 사상자를 냈음에 천부장이 낮게 신음을 뱉었다.

“놈들의 시체는 단 한 구도 없는데, 어찌 이다지도…….”

이기고도 손실이 큰 전투였다.

“최대한 놈들을 자극하지 말고, 말라 죽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백부장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 순간, 경비를 서던 전사가 황급히 뛰어들며 보고하였다.

“항가이가! 항가이가 군을 이끌고 홍산을 오릅니다!”

“뭣이! 이 망할 놈이!”

천부장이 크게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홍산을 둘러싸고 대낮처럼 환히 모닥불이 타올랐고, 그 앞에 경비병들이 홍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부장이 경비병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응시하자, 어둠이 내린 홍산 중턱에 항가이의 전사들로 추정되는 움직임이 어둠에 묻혀 꾸물꾸물 거렸다.

어둠에 의존해 홍산을 올라 기습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말도 끌지 않고 살며시 움직이는 모습이 꽤 신경 쓴 듯 보였다.

항가이는 아마도 이번 기습을 성공시켜 그동안 망신당하며 밑바닥까지 보인 자존감을 세우고 싶었으리라.

“이런, 멍청한! 하긴 말을 잘 들으면 항가이가 아니지. 이왕지사 이리된 것. 모두 소리 내지 말고 항가이가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돕거라.”

어둠을 의지해 산을 오를 수만 있다면 지닌 재주가 형편없는 항가이라도 승리를 취할 수 있어 보였다.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언제든 우리도 산에 오를 준비를 하라! 천천히 소리 없이 말이다.”

미워도 도와야 함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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