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5)
커레이트 부족의 대족장 하노르는 늦은 밤 자신의 게르를 찾아온 둘째 아들 항가이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굳게 다문 입을 겨우 열었다.
“그래, 고작 백 명을 오백으로 공격하다가 패하여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게냐? 아직 네겐 올루스의 몸 성한 오백 명의 전사가 더 있지 않으냐?”
항가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커레이트의 대전사 호타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항가이를 쳐다보며 아비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놈은 그저 도적입니다. 부족장이란 놈이 남의 아내를 훔쳐 욕이나 보이다가 공격당해 도망가고는 분풀이하러 다섯 배나 되는 전사를 끌고 가 오히려 이백 명이나 잃고, 제 부족에게도 못 가고 여길 찾아와 대신 복수해 달라 말하는 꼴 좀 보십시오. 저게 어디를 봐서 족장의 모습입니까?”
형의 거침없는 비난에도 항가이는 변변한 말조차 못 하고 그저 아비인 대족장 하노르의 눈치만 살폈다.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야.’
이런 항가이의 믿음처럼 하노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곧 얼굴을 펴고 큰아들 호타크에게 좋은 말로 사정했다.
“호타크야, 항가이는 네 동생 아니더냐. 이 녀석이 조금 부족하고 정직하지 못한 일로 욕을 보더라도 우리는 가족이니, 서로가 안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네?”
“네가 돕고 내가 끌어주지 않으면 다른 부족들이 저 아이를 업신여길 것인데, 이는 곧 우리의 수치도 되느니라.”
“아닙니다! 저런 도적놈을 품는 것이 오히려 우리 가족의 수치이며, 부족의 치욕입니다. 남의 아내나 훔치고, 정당한 명분 없이 수적 우위와 아버님의 명성만 믿고 일으킨 싸움은 약탈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항가이의 형, 호타크는 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도적질만 일삼는 저놈 때문에 우리 커레이트 부족을 다른 부족들이 뭐로 보겠습니까? 도적 떼 말고 달리 생각할 리 없지 않습니까?”
한마디 한마디 호타크의 말이 옳음을 대족장의 지위에 앉은 하노르가 모를 리 없으나, 그래도 자식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호타크야, 너는 장남 아니더냐? 내 나이 일흔이 다 되어 가니, 곧 네가 대족장에 오를 것인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 항가이를 네가 남 보듯이 대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근심이 크구나. 생각해 보렴.”
“…….”
“항가이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도 너와 다투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이들과 따로 부족을 차려 나름 열심히 살아보려 하지 않았느냐?”
“음…….”
“항가이는 제 부족이 세를 키우면 형을 돕고 잘 살 아이란다. 이 아이가 제 부족을 잘 건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너를 돕고 우리 커레이트 부족을 돕는 길이 아니겠느냐?”
하노르의 말처럼 항가이는 후계자 자리를 형인 호타크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자의가 아닌, 평소 행실의 문제로 따르는 이가 호타크만 못하여 물러난 것을 커레이트 부족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타크는 늙은 아비가 이토록 사정하니, 계속 반대만 할 수 없어, 머리를 푹 숙이고 처분만 기다리는 항가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호타크의 이 말에 항가이는 내심 기뻐 속으로 껄껄껄 웃었다.
‘잔소리나 하는 형의 도움은 받아 봐야 나중에 피곤해진다. 잘 됐다. 아버지가 군사를 내주면 그 길로 카사르를 요절내고 돌아와 형과 일전을 벌여주마.’
아비 하노르가 대군을 내줄 거로 생각하며 혼자만의 상상에 젖어 든 항가이의 귓속으로 하노르의 다정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그래, 호타크 너는 역시 장남이다. 잘 생각하였다. 이번 항가이의 복수는 내가 친히 나설 것이다.”
“아니, 아버님 연세도 계신대… 어찌? 군사만 내어주시면 제 복수는 제가 하겠습니다.”
부친이 직접 군을 이끈다 말하자, 항가이가 오히려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이 기회에 아비의 군대를 취할 요령이 무산된 것에 꽤 당황한 듯 보였다.
“너는 오백으로 일백도 못 당하는데, 어찌 너를 믿고 군사를 내 줄 수 있겠느냐? 내가 늙었어도 오랜 세월 말을 달리며 전쟁을 치렀으니 너보다는 나을 것이다.”
부친의 단호한 말에 항가이는 달리 수가 없어 비굴한 표정으로 따르겠다는 웃음만 지었다.
“군사 몇을 준비시킬까요?”
호타크가 부친을 염려해 전쟁 준비를 묻자, 하노르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간결하게 답하였다.
“천 명이면 된다. 물자는 오 일치 식량을 각기 준비케 하거라.”
“천 명과 오 일치 식량으로 족하시겠습니까?”
호타크가 놀라 되물었으나, 백전노장의 하노르는 자신만만한 표정에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백 명을 상대로 천 명도 많다. 더 많이 끌고 가면 남들이 비웃을뿐더러, 고작 게르가 오십여 개인 카사르의 부족을 공격해 얻을 전리품이 뻔하지 않느냐?”
“…….”
“천 명이 나누기에도 너무 적다. 식량은 카사르의 부족이 가까워 전투를 치르고 돌아올 정도면 충분하느니라.”
하노르의 말대로 전투에 참여한 전사들은 전리품을 나누는데, 카사르 부족을 탈탈 털어도 천 명의 전사가 목숨 걸고 싸운 대가를 얻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호타크는 바로 믿을 만한 천부장을 불러 부친을 보좌케 하며 출전 준비를 명했다.
* * *
이틀을 달리니, 처음에 준비했던 식량이 줄어들며 말의 부담이 적어져 전투를 치르기 적당해졌다.
역시 노련한 대족장 하노르 다운 계산이었고, 카사르의 부족과 가까워지자, 잠시 말을 쉬게 한 후 천천히 이동하여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사람과 말의 체력 안배도 신경 썼다.
덕분에 항가이가 맹렬히 돌진하던 이전 전투와 달리, 흙먼지를 거의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전진할 수 있었다.
하노르는 멀리 초원 위 우뚝 선 홍산의 모습이 드러나자, 천부장을 불러 새로 명을 내렸다.
“삼백은 좌로 돌아 전진하고, 삼백은 우로 돌아 전지케 하라.”
세 갈래로 전진하여 카사르 부족의 일제 사격을 저지할 요령이었다.
천부장이 곧 백부장들을 불러 명하니, 삽시간의 대열이 갈라지며 홍산을 세 방향으로 에워싸고 진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항가이, 항상 적보다 많은 수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승리의 방안이나, 그 수는 세 배가 가장 적당하단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물자에 대한 부담이 커, 이기고도 남은 것이 없느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항가이는 아버지의 노력이 담긴 말에도 대충 답하고 있었다.
“그래, 기병은 보병의 여덟 배나 강하고 우리 같은 궁기병은 장기전과 기습에 모두 유리하니, 보병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시에는 우리의 기병 하나가 여유롭게 적의 보병 셋을 상대한다 생각하면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아들에게 하나라도 자신의 경함을 남겨주기 위하여 늙은 대족장 하노르는 마상에서 차근차근 항가이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궁기병으로 말을 타고 활을 날리는 기사를 사용하니, 적이 수레와 짐으로 단단히 벽을 쌓고 수비에 들어가면 과격이 뚫고 들어가 난전을 벌이지 말고, 빙 둘러 말 달리며 활을 당겨 놈들의 물자가 고갈되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
“우리의 전사는 한정되어 있으니,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족장은 고사하고 한 명의 전사로라도 제 몫을 하길 바라며 이야기하는 아비의 마음도 모른 채, 항가이는 곧 있을 복수전에 마음이 들떠, 이미 승리라도 한 듯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의 천 명과 나의 칠백이면 이미 카사르의 일백 따위는 제아무리 활이 훌륭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적보다 세 배가 아닌 열일곱 배나 많은데, 아버지는 무슨 세 배 타령이신가? 하여간 노인네의 잔소리란.”
* * *
하노르가 이끈 전사들은 속력을 내지 않아, 흙먼지가 크지 않았다.
홍산 위에서 망을 보던 카사르 부족 전사가 눈치 챘을 땐 이미 그들은 세 갈래로 홍산을 에워싼 채, 전진하고 있었다.
“놈들이 이제야 눈치 챈 모양입니다.”
천부장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홍산 위를 가리키며 하노르에게 보고하였다.
홍산 위에선 붉은 기가 나부꼈고, 초원에선 아이와 노인을 데리고 젊은 여인들이 홍산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게르와 양 떼는 그대로 초원에 버려둔 채,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옮기지 않고, 그저 몸만 끌고 피하는 모습에 하노르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저 붉은 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고, 도대체 풀 한 포기 없는 저 홍산은 왜 오르는 것이지?”
항가이가 이 답을 가질 리 없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영리한 천부장이 의견을 내었다.
“홍산 위에 목책으로 보이는 것이 빙 둘러 있습니다. 짐작하건대 저 붉은 기는 외적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게르와 양 떼를 끌고 도망가며 싸우는 것은 뒤를 잡혀 위험하다 생각해 비전투 인원을 일시 대피시키고 저들이 우리를 대적할 모양입니다.”
천부장이 가리킨 곳에 카사르가 일백 전사를 이끌고 마상에서 활을 들고 있었다.
“숫자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노약자들의 피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는 좋은 전술이다. 허나, 우리를 상대로는 도망치지 않으면 살길도 열리지 않을 것인데, 잘못 선택한 전술이 되겠군. 천부장은 전군이 천천히 전진하도록 신호를 보내라!”
결코 서두르지 않는 하노르의 명에 따라 세 갈래 모두 천천히 전진하여 홍산까지는 아직 한 식경은 더 남아 보였다.
“아버지, 우리가 세 갈래로 전진하느라 북쪽은 아직 에워싸지 않았는데, 저들이 그쪽으로 도망치면 어찌합니까?”
“도망치면 가게 두어라. 가족들을 두고 전사들만 도망가진 않을 것이니, 얼마나 가겠느냐? 사방을 포위하면 적이 도망치지 않고 맹렬히 덤비기에 오히려 한 곳은 풀어놓고 퇴각을 유도하여 뒤를 치는 것이 더 좋으니라.”
어리석은 항가이에게 인자히 설명하는 아비였으나, 알아들을 항가이가 아니었다.
‘퇴로를 열어 주고 이렇게 느릿느릿 전진하면서 큰 소리는… 아버지는 너무 늙고 고집만 세시다.”
항가이의 이런 생각과 달리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삼면에서 진격해 오는 하노르의 대군이 속도를 내지 않아 오히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 * *
“족장! 사거리가 닿지 않습니다.”
“족장, 놈들이 삼면을 에워싸고 오는데 어디부터 일제 사격을 해야 합니까?”
“족장! 한쪽에 일제히 화살을 날릴 경우 다른 두 곳이 말을 달려 사거리를 취한 후 살을 날리면 우리 측 피해가 클 것입니다. 세 군데 모두 살을 날려 타격을 주어야 전진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불안해 제각각 한 마디씩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카사르는 요지부동 전면 중앙 본진의 하노르와 항가이만 노려보았다.
“우린, 저 두 놈에게 집중한다.”
카사르의 침착한 태도에 전사들의 술렁임도 가라앉으며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일제 사격을 시작한 순간, 양측에서 맹렬히 덮쳐 올 것이다. 최대한 전사들의 피해가 없어야 하니, 일제 사격은 단 한 차례만 가능하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며 카사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일제 사격!”
카사르의 외침과 동시에 일백 대의 화살이 바람을 갈랐고, 하노르의 입에서도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전군! 돌격하며 살을 날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