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4)
초원의 민족들은 전투 시 보급 부대를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두의 전사들이 말을 몰아 진격하면 후방의 모든 가족이 남은 전사들과 함께 게르를 수레에 싣고 양 떼를 몬다.
올루스(나라, 백성) 전체가 하루나 이틀거리를 두고 따라 이동하기에, 보급 부대가 필요 없었고 지켜야 할 땅도 필요 없었다.
이들이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전장을 함께하는 올루스였고, 올루스를 지키기 위해선 전투에 승리하거나, 적이 쫓아오지 않을 곳까지 멀리 도망쳐야 했다.
만약 적이 뒤를 돌아 올루스를 공격하면, 남은 가족과 전사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레로 견고히 벽을 쌓아 화살을 날리며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버텼다.
그리고 그들이 버티는 동안, 앞서간 전사들이 말을 돌려 적의 뒤를 치는 전술을 사용하기에 올루스 공격은 오히려 스스로 함정에 뛰어드는 셈이었다.
올루스의 여인과 노약자들도 활을 당길 수 있으며, 그 실력이 대단하여 이들이 남은 전사들을 도와 적의 접근을 막으면, 적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꺼릴 것이다.
그때, 근접전을 회피하며 올루스를 둘러싸고 말을 몰아 맴돌면서 활을 날려 기회를 엿봐야 했다.
탁 트인 초원에서는 이것이 공성전이라 봐도 무방하여 선두의 전사들을 무시한 채 올루스를 습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올루스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이렇듯 늘 올루스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던 초원의 전투 방식과 달리, 이번 항가이가 이끈 군대는 올루스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이틀거리에 위치한 탓도 있지만, 카사르의 부족 따위는 단번에 몰아붙여 멀리 쫓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족장, 놈들의 게르가 보입니다.”
다른 민족의 시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카사르 부족의 게르를 가리키며 백부장이 항가이에게 말을 건넸다.
초원의 민족은 기병 위주로 가장 친한 열 명을 단위로 부대를 만들어 십부장을 두고.
이들 십부장 열 명을 지휘하는 백부장을 두며 또다시 백부장 열을 통솔하는 천부장이 있었다.
이런 군사 체계는 초원을 질주하며 활을 날리는 전투 방식 탓에 진영을 이루기 어려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항가이는 백부장 열을 통솔하는 천부장의 지위를 지닌 부족장이었고, 그에 비해 카사르는 십부장 열을 지닌 백부장 지위의 부족장이었다.
기병 한 명이 보병 여덟을 대적하고 초원의 기병은 그 이상의 위력을 지녔으니, 항가이의 오백 기병은 그 수에 비하여 막강한 공격력을 지닌 셈이었다.
여전히 말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항가이도 초원 위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르들을 응시하며 거칠게 뱉듯이 말하였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우리는 각기 한 필의 말밖에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대로 계속 몰아나가면 말들이 지쳐 놈들의 말을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백부장이 여전히 근심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말에 이견을 달자, 항가이의 입술이 실룩거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놈들은 싸울 수 있는 사내가 고작 백 명 남짓이다. 감히 맞서지 못하며, 맞선들 뭐가 두려우냐? 아마도 이 흙먼지에 놀라 게르를 수레에 싣고 내빼기 바쁠 것이다. 우린 그 뒤를 쫓으며 놈들의 뒤통수에 화살을 날려 사냥하면 된다.”
항가이의 말처럼 게르를 수레에 싣고 도망갈 시, 그 속도가 느려 충분히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사르의 전사들이 맞선다 하여도 올루스를 벗어나 멀리까지 말을 내달리며 싸울 수 없을 것이니, 모든 전투는 올루스 주위에서만 일어나고 마무리될 것이 분명하였다.
항가이의 단호한 표정에 다섯 백부장들은 말 달리는 상태를 유지한 채, 손짓으로 십부장들을 불러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하도록 명하는 한편 더욱 속도를 내게 하였다.
달리는 마상 위에서 진행된 전투 회의 후, 커레이트 전사 오백이 몰던 말들이 일제히 긴 울음을 내고는 이전보다 더 속력을 내어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 * *
홍산에 붉은 기가 올라가니 카사르 부족민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들의 게르로 달려가 아이와 노인을 업으며 홍산 위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사 백여 명만이 말 위에 올라 모든 부족민이 안전해질 때까지 점점 가까워지는 흙먼지를 응시하였다.
“족장…….”
점점 거대해지는 흙먼지에 십부장 한 명이 말꼬리를 흐리며 카사르에게 말을 건넸다.
십부장의 떨리는 손을 살며시 내려다보며 카사르가 다시 더욱 자욱해진 흙먼지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깃발은?”
“아직 붉습니다.”
십부장이 답하자, 카사르는 각궁에 손을 대고 전투 준비를 시작하였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준비하라!”
카사르의 명에 백 명의 전사들은 일제히 각궁을 들어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는 준비를 하였다.
게르와 들판의 양 떼도 그대로 놓아둔 채,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들이 홍산을 향해 뛰어오르는 모습은 항가이의 커레이트 전사 오백 명에게도 이제 또렷이 보이고 있었다.
“족장! 놈들이 산으로 오릅니다.”
붉은 흙과 돌로 구성된 홍산에 붉은 기가 나부끼고 아이와 노인 등이 선두로 산에 오르며 그 뒤로 활을 맨 여인들이 별다른 짐조차 없이 뒤따르는 모습에 항가이는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카사르란 놈이 고작 백 명의 전사로 맞서려 하는구나.”
산 위로 가족들을 대피시키고 카사르가 일전을 벌이려 한다 생각한 항가이는 백부장들에게 명하여 더욱 속도를 내게 하였다.
“단숨에 밀어버려라! 우리의 화살로 놈들을 쓸어버리자!”
오백 명이 날리는 화살 수는 당연 백 명이 날리는 수보다 압도적이며, 이 수적 우위는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말들이 내달릴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 당연하였다.
모두가 명사수인 초원의 민족끼리의 전투에서는 화살 하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의 수가 더 줄어들게 되니, 항가이의 오백 전사들은 사기가 올라 이미 승리한 듯 게르와 양 떼를 차지하기 위하여 맹렬히 말을 몰아 나갔다.
* * *
“족장, 파란 기가 올랐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파란색 깃발이 홍산에서 펄럭이자, 십부장이 소리 높여 외쳤다.
카사르가 잠시 고개 돌려 홍산을 바라보니, 모두가 안전히 올라간 듯 보였다.
“되었다! 이제 안심하여도 된다.”
카사르의 이 말에 조금 전까지 손을 떨던 십부장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지며 당당한 전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마도 게르의 가족들이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우리의 활은 각궁이다! 놈들보다 사거리가 길고 강력하다. 놈들이 수가 많다 하여도 우리의 몸에 놈들의 화살은 결코 닿지 못할 것이다!”
카사르의 이 자신감 넘치는 외침은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각궁은 그 크기가 작아 마상에서 당기기 수월하며 사거리와 정확도는 물론이요.
그 위력마저 초원의 민족이 지닌 그 어떤 활도 압도하고 있었다.
카사르가 먼저 활을 당기자, 일백의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여 개의 화살이 항가이가 이끄는 커레이트 전사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족장!”
예상 밖의 거리에서 화살이 날아들자, 놀란 백부장이 항가이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항가이도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화살에 기겁하여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이 한순간의 사격으로 커레이트 전사 삼십여 명이 말 위에서 떨어져 나뒹굴었고 그제야 항가이가 정신 차려 외쳤다.
“대응하라! 응사!”
여전히 말을 달려 나가며 활을 당겨 보지만, 그들의 화살은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 근처에도 닿지 못하였다.
이때 다시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고 말을 돌려 물러나는데,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화살의 속도가 너무도 맹렬하여 또다시 항가이의 커레이트 전사 사십여 명이 말 위에서 떨어져 들판에 나뒹굴었다.
항가이의 전사들도 대응 사격을 하며 말을 달려 나갔으나, 뒤로 물러나며 화살을 날리는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은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었고,
오히려 재차 날아온 화살에 항가이의 전사들만 계속 말 위에서 떨어졌다.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이 날린 단 세 차례의 일제 사격으로 백여 명이나 잃은 항가이는 그제야 손을 들어 말을 멈추고 불타는 시선으로 카사르를 노려보더니 퇴각 명령을 내렸다.
먼 길을 달려온 지친 말을 몰아 카사르의 전사들과 거리를 좁히기 어렵다 판단한 것이다.
“놈들을 얕보았다. 거리를 벌려라! 부족으로 돌아간 후 아버님과 형님께 도움을 청한다. 부상자를 챙겨라!”
늦었지만, 항가이의 이 판단은 적절하였다.
제아무리 명사수에 수가 많다 하여도 사거리가 닿지 않는 거리에선 속수무책임은 당연했다.
항가이의 전사들이 말 머리를 돌리자, 지치지 않은 말과 사거리가 긴 각궁으로 무장한 카사르의 부족 전사 일백 명은 뒤를 쫓아, 이들이 쉽게 물러나도록 두고 보지는 않았다.
사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까지 항가이의 전사들을 쫓으며 대승을 거둔 카사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돌아왔을 땐, 홍산 위엔 그 어떤 깃발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 위 양 떼들은 여전히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무런 기도 내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홍산 위에서 망을 보는 전사의 눈에 그 어디에도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대승입니다. 말 오십 필, 활 삼십 자루, 칼 열 자루를 얻었습니다. 고구려군의 존재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홍산 아래까지 마중 나온 온달에게 달려와 카사르가 전과를 보고하며 전리품을 나누려 하자, 카사르의 말을 경우가 통역하여 전하니 온달이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진심으로 축하하오! 이번 승리는 그대가 이룬 것이니 전리품은 모두 그대의 부족민들 것이오. 하하하.”
온달의 말에 카사르가 기뻐하며 십부장들을 불러 전리품을 나누라 하였고, 이때 평강이 카사르의 부족민들을 이끌고 홍산에서 내려와 카사르의 인사를 받아 화답하였다.
“이 한 번의 전투로는 일대의 주인이 정해지진 않을 것입니다. 항가이는 아직 남은 전사가 많고, 그의 부친도 상당한 세력이라 하니, 며칠 내로 대군이 찾아들 것입니다.”
평강의 이 말에 카사르도 예상하고 있다며 답하였다.
“항가이는 근래에 처음 만났으나, 그의 부친과 형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비는 커레이트 부족의 대족장 하노르이며 그의 형은 커레이트의 대전사 호타크입니다.”
“네.”
“항가이는 아마도 아비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지요. 그들이 올루스를 모두 끌고 온다면 적어도 오천 이상의 전사를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카사르의 이 말은 온달도 예상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몇이 오든, 우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족장을 잡도록 합시다.”
오천이 넘는 전사 속에서 대족장을 사로잡기란 쉽지 않은 일임에도 듣는 모든 이의 눈빛엔 자신감이 가득하였다.
이때 평강이 살며시 나서며 차분히 의견을 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탓과 이번 전투에 우리 고구려군이 노출되지 않았고, 카사르 족장님이 이끈 전사의 수가 백 명 남짓임만 놈들이 파악하였기에, 결코 올루스 전체가 움직이진 않을 것입니다.”
“…….”
“예상컨대, 적의 병력은… 최대치가 항가이의 전사 칠백 남짓과 대족장의 전사 삼천 정도가 될 것입니다. 허나, 대족장은 카사르 족장님의 전사가 일백이란 것에 결코 대군을 보내진 않을 듯싶으니, 제 짧은 소견에 그가 보낼 전사를 일천으로 예상해 봅니다.”
올루스를 두고 전투를 벌일 시 항상 예비 병력을 남기기에, 그녀가 예상한 최대치의 병력은 합당해 보였으나, 대족장이 천 명의 전사만 보낼 것이란 예상은 카사르를 당황케 하였다.
“어찌? 예상한 수치입니까?”
“전쟁은 항상 자원이 많이 들고 동원된 병사가 많을수록 더 들지요. 대족장 정도의 지위를 지녔다면, 적을 상대로 열 배 이상의 병력은 낭비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평강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보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 카사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