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3)
카사르가 이야기를 마치자, 좌중의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고 그저 온달의 기색을 살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온달은 카사르의 눈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카사르, 그대의 말이 옳소. 이곳 홍산에 우리가 군을 이끌고 진을 세운 것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오. 우리는 이곳을 기반으로 조만간 할 일이 있소. 머지않아 돌궐과 북주의 잔존 세력이 연합하여 우리 고구려를 침범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물자 수송을 막아야 하오.”
온달이 극비 사항을 서슴없이 털어놓자, 카사르를 포함한 모두가 놀라 당황하였다.
“그대는 어찌 내게 그런 중요 기밀을 말하는 것이오?”
카사르가 놀라 묻자, 온달이 웃으며 답했다,
“기밀이 누설되면 그것을 아는 외부인은 처단하여 보안을 유지해야 하오. 허나,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홍산의 이 진영을 지키겠다고 제안까지 하였으니, 외부인이 아닌 우리의 동지요.”
“…….”
“나는 이 홍산 전초기지를 책임지는 부총관으로서 당신과 당신의 올루스를 우리와 위아래 구분 없이 동등한 관계의 동맹으로 생각하오.”
온달의 진정 어린 목소리를 평강이 카사르에게 그대로 전하였고, 그가 이야기를 마저 할 수 있도록 그 누구도 말을 끊지 않았다.
“카사르, 그대는 우리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협곡으로 피하라는 의견과 우리를 대신하여 이 홍산 적봉진을 지키겠다는 제안을 하였소. 참으로 고마운 말이오.”
그 순간, 온달은 결정을 내린 듯 말을 이어 갔다.
“허나, 우리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는 것 못지않게 이 홍산의 적봉진을 지켜, 향후 큰 전쟁에 맡은 바 소임을 해야 함 역시 중대한 일이오.”
잠시 말을 멈춘 온달이 좌중을 천천히 돌아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곳에 남아 그대와 함께 이 적봉진을 지키겠소. 다른 분들은 군을 이끌고 협곡에 잠시 피하시기 바라오. 나 혼자라면 고구려군이 이곳에 기지를 세웠다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오.”
“…….”
“또한 카사르, 그대의 부족민 중 싸울 수 없는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들도 양 떼를 이끌고 협곡에 피하라 전하시오.”
온달이 홀로 남아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과 함께 이곳, 적봉진을 지키겠다고 말하자, 가만히 있을 막바우가 아니었다.
“아니, 그럼 나도 남겠습니다.”
“아닐세. 이곳의 진영을 카사르의 부족민이 세운 것으로 하여 지킨다면 나 혼자 이들과 섞여 있어도 의심할 이 없겠으나, 너무 많이 남게 되면 우리 고구려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의심을 살 수 있네.”
온달이 잘라 말하였으나, 막바우의 논리도 정연하였다.
“아니, 어차피 나는 항가이란 놈과 얼굴도 맞댄 사이인데, 내가 있든 없든 이제 와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나도 남을 것입니다.”
말문이 막힌 온달이 난처해하자, 평강이 웃으며 나섰다.
“우리 장군님의 말씀 백 번 옳습니다. 하온데, 제가 경우님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차분한 평강의 어투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가득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기대를 품게 하였다.
“공주, 말씀하시오. 좋은 의견이 있소?”
평강을 부인이라 칭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주라 존대하는 온달의 말속에는 평강에 대한 무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을지 공께서 이곳에 군사 기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 명하신 부분은 전술의 기본으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이옵니다. 또한 우리 장군님께서 말씀하셨듯 이 군사 기지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은 대국을 널리 보는 것으로 전략의 근간이 되는 더 큰 일이옵지요. 비밀만 지키고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평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일행들의 안색을 살피니, 모두가 수긍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온데 항가이의 커레이트 부족의 세가 크다 하니, 카사르님의 부족만으로 이 홍산을 지키기엔 역부족일 것이고, 당연히 이 기지는 불태워질 것입니다.”
“…….”
평강의 말을 카사르 또한 귀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카사르님의 부족이 패하면 항가이의 커레이트 부족은 이 초원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삼을 것이니, 우리가 다시 이곳에 기지를 다시 세운들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
“그때는 카사르님의 부족민들이 홍산 아래에 터를 잡고 우리를 지켜 보안을 유지하던 지금과 많이 다르겠지요. 이 자리에 을지 공이 계셔도 숨지 말고 모두가 힘을 합쳐 이곳을 지키라 하실 것이옵니다.”
모두가 듣고 보니, 비밀을 지키는 것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이 적봉진을 지키려 함인데, 비밀만 지키고 적봉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일이었다.
“공주의 말이 백 번 옳소. 허면 우리가 모두 남아 일전을 벌이자는 말씀이 되겠군요. 건무 저하께도 알려야 하겠구려.”
온달이 평강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하자, 평강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마저 이야기를 하였다.
“총관께 알림은 당연하오나, 이번 전투는 이곳 홍산의 인원으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평강의 이 말은 카사르를 놀라게 하여 바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항가이가 이끄는 커레이트 부족 전사는 천 명가량 된다 하고, 그의 아비는 따로 부족을 이끄는 커레이트의 대족장으로 전사만 오천이 넘어 일대에서 겨룰 부족이 없다 합니다.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카사르님은 이 사실을 알고도 부족 전사들만으로 이곳을 지키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평강이 웃으며 되물으니, 카사르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고자 하신 것이시겠지요. 허나, 카사르님이 죽으시면 이 홍산 아래는 누가 지키고 저희는 누굴 의지하여 물과 식량 등의 보급을 받겠습니까?”
“아…….”
“카사르님과 부족민들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셔야 하옵고, 제게 계책이 있으니 적의 수가 많다 한들 능히 물리칠 수 있다 생각합니다.”
평강의 이 말은 카사르의 마음을 흔들어 진정 생사고락을 함께할 동지로 여기게 하였다.
“듣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십시오.”
카사르가 의견을 청하자, 방긋 웃으며 평강이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곳 초원의 민족들은 돌궐이나 거란과 달리, 월등한 시력과 활에 의존한 전투를 치른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접전보다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며 활로 서로를 겨누어 쫓고 쫓기며 물러났다가 되돌아 치는 전법은 끝없이 펼쳐져 시야가 탁 트인 이 초원에서 가장 잘 어울릴 전법이고, 누구도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초원은 사람 수가 적어 아껴야 하기에, 말 달리며 서로 활을 쏘다가 멀리 물러나는 일방이 패퇴하는 전투를 취하지요.”
카사르가 평강의 말에 답하니, 기다렸던 평강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렇기에, 날이 어두워 활을 날리지 못할 시엔 대규모 전투는 피하고 멀리서 포위하는 방식을 취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날이 어두우면 서로 말 달리며 활을 당긴들 화살만 낭비하니, 대규모 전투는 피하고 약탈 정도만 일어나지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항가이가 전사를 이끌고 들이닥치면 카사르님은 모든 부족민을 이끌고 이곳 홍산에 올라 우리와 함께 계시면 되십니다.”
“적이 아래를 둘러싸면 우리는 이 홍산에 갇혀 굶어 죽게 될 것인데, 초원에서 일전을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강의 제안에 카사르가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되묻자, 부드러운 어투로 평강이 그 근심을 덜어주었다.
“맞습니다. 이 위에 갇히면 안 되지요.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아래에 불을 던져 환히 밝히고 일제히 말을 몰아 적을 물리치게 될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고구려군은 야습이 능하고 돌격과 근접전에 익숙합니다.”
홍산을 둘러싼 대군과 야전을 벌이겠다는 평강의 말에 이런 전법이 익숙지 않은 카사르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수성전과 야습에 익숙한 해진과 경우는 고개를 끄덕여 평강의 계획에 동의를 표하였다.
초원의 민족은 훗날 테무진이 금나라를 정벌하기 전까지, 공성전이 전무하였다.
또한 테무진과 자무카가 초원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일전을 벌이기 전까지 야전과 악천후 속에서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였기에, 이날 카사르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야습을 예상하지 못할 적을 상대로 평강의 계획은 타당한 전술임은 분명하였다.
“제가 세부안을 말씀드릴 터이니, 모두 들어 보십시오.”
붓과 종이를 꺼내 일대의 지형을 그리며 평강이 설명하기 시작하니, 모두가 귀를 기울여 들었다.
* * *
회의를 마친 카사르는 바로 부족민들을 불러 홍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게르들을 홍산과 좀 더 붙이고 게르와 게르 사이를 넓게 벌려 다시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카사르의 부족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홍산 아래로 고구려군은 온달과 평강이 사용하던 게르를 뜯어 옮겼다.
또한 그 안에 두 내외가 사용하던 비단 금침과 비단 옷도 그대로 옮겨 놓을뿐더러 술잔과 식기 및 온갖 세간살이도 그대로 함께 옮겨 마치 그 안에서 조금 전까지 살았던 듯 생각 들게 하였다.
“우리 온달님 살림살이를 몽땅 옮기면 어쩌냐?”
짐을 나르면서도 막바우의 근심은 가득했고, 조막손으로 그를 돕던 온동이 오히려 막바우를 안심시켰다.
“이건 적을 혹하게 하려는 계책이여유. 놈들을 물리치고 찾으면 되쥬. 심려 마셔유.”
“누가 모르냐? 하지만, 그놈들에게 이 금침을 한 시도 넘겨주기 싫어 그런 거 아니냐?”
“맞아요! 너무 아까워요!”
막바우의 말에 독고영이 곁을 따라다니며 맞장구쳤고 그런 독고영이 마냥 귀여운 막바우에게 온동이 어른스럽게 한소리 더 하였다.
“금침을 내주어야 안방 차지한 줄 알고 안심할 거잖아유. 다 잘 될 거구먼유.”
자신보다 더 진중한 온동을 막바우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끔뻑거리다가 다시 짐을 지고 앞서 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놈 속에 늙은이가 들어앉았어. 백 년 전에 죽은 이백 살 드신 노친네 혼이 들어간 게 분명해. 완전 애늙은이야.”
이 중얼거림을 귀 밝은 온동이 못 들었을 리 없으나, 역시 애늙은이라 못 들은 척 물건만 날랐고, 독고영이 놀라 대신 이 말을 받았다.
“와! 귀신 붙은 거예요? 온동 오빠 속에 요괴가 들어간 거예요?”
* * *
온달의 지시로 협곡의 건무에게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알리고 적을 맞아 싸울 모든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홍산 위에서 망을 보던 카사르의 수하가 붉은 기를 급히 올렸다.
홍산 위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 신호에 양 떼를 몰던 카사르가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니, 지평선 끝에 흙먼지가 날리고, 그 속에 항가이가 이끄는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이 말을 몰아오는 것이 들어왔다.
“시작이구나. 오라! 네놈들의 무덤을 마련해 놓았다.”
이 순간에도 항가이의 커레이트 전사들은 멈춤 없이 말을 몰았고, 홍산 위에서는 온달이 조그만 게르에서 나와 망을 보던 카사르의 수하에게 물었다.
“몇이나 되는가?”
눈치가 빨라 고구려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 사내가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활짝 펴 보였다.
흙먼지의 크기로 달리는 말의 수를 가늠한 것이다.
“오백? 오백이더냐?”
온달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온달은 카사르 부족 전사 일백과 홍산 위 고구려 군사 이백을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로군.”
온달의 짐작대로 항가이는 자신을 습격한 고구려인의 수가 많지 않고, 카사르의 부족 전사 일백만 염두에 두어 겨우 오백의 전사로 폭풍처럼 몰아쳐 일거에 카사르 부족을 몰아칠 요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