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68화 (68/328)

068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2)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모닥불 가의 커레이트인 중 하나가 바닥에 손을 대고 진동을 확인하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 한 필. 한 명입니다.”

땅의 진동으로 수를 헤아리는 사내의 말에 항가이는 카사르를 떠올렸다.

‘몸 상태로는 혼자 따라올 수 없을 것인데.’

장막이 드리운 듯 어둠이 내려 상대를 식별하기 어려웠다.

소리에 집중하며 항가이는 게르를 세우고 잔가지를 칠 때 사용하는 손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다른 사내들도 각기 짐승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자를 때 사용하는 무두질 칼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어둠에 가려졌던 형상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원의 말과 비교할 시 상대적으로 키가 큰 말, 가죽을 겹쳐 만든 옷이 아닌 초원의 민족은 가질 수 없는 솜을 누빈 값진 천으로 만든 옷 그리고 손에 쥔 긴 창.

초원의 민족은 아니었다.

카사르의 부족민이 뒤를 쫓아 왔으리라 경계하였던 항가이는 이 기이한 방문객을 주시하며,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초원의 관습상, 쉴 곳을 찾아온 나그네를 내치는 것은 그 나그네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받아들여 함께 모닥불 가에 앉아 말젖을 발효한 마유주를 나눠 마시든가, 내치면 어차피 죽을 사람 모닥불 가에서 죽이든가.

항가이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어, 춥다! 나 거기 앉아도 되나?”

창을 쥔 사내가 어느새 다가와 말에서 내리며 말하였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인의 언어였다.

“저자는 고구려인입니다.”

커레이트 사내 중 하나가 용케 알아듣고는 항가이에게 설명하였다.

영주 총관부의 시장으로 사냥한 가죽을 팔러 다니며 고구려인과 접촉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구려인이 왜?”

활은 없고 창만 쥔 사내의 행색은 결코 사냥꾼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 불 좀 같이 쬐면 안 돼? 나, 그냥 가? 어떻게 할까?”

여전히 창을 쥔 사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구려 말을 하였다.

“족장, 저자가 모닥불을 쬐고 싶은가 봅니다.”

창을 쥔 사내의 시선이 모닥불에 향해 있어 항가이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앉아서 마유주를 함께 마시자고 전해라. 저자의 창과 말 괜찮군.”

항가이는 두 개의 선택지 중 나그네의 죽음을 택하였고, 커레이트 사내들도 그의 마음을 헤아려 거짓 웃음으로 나그네를 받아들였다.

손짓으로 모닥불 가에 앉으라 권하는 커레이트 사내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 표시를 한 고구려 사내가 창을 쥔 채 말에서 내렸다.

“아이고, 춥다! 나도 가죽 옷을 걸쳐야겠어. 아, 물론 그런 겹쳐 기운 거지같은 옷 말고. 제대로 옷의 형태를 지닌 가죽 옷 말이야. 추워서 살 수가 없네. 지금 여름 아닌가? 왜 이리 춥지? 이놈의 동네는 어떻게 허구한 날 춥고 바람만 불어?”

알아듣지도 못할 고구려 말로 혼자 지껄이며 모달불 앞에 턱 앉은 사내는 커레이트 사내가 건넨 마유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시다. 그래도 맛은 좋네. 한 잔 더 주쇼.”

고구려 사내가 커다란 사발을 들어 올리자, 커레이트 사내가 다시 마유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여기 혹시,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 있소?”

고구려인 말을 겨우 몇 마디 알아듣는 커레이트 사내는 그저 억지 미소만 지을 뿐 달리 대답은 못 하였다.

“하긴, 알아들을 리가 있나. 나도 댁들 말 못 알아들으니 됐어.”

다시 마유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고구려 사내는 자신의 등 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가 가리킨 곳에 옷이 찢겨진 우울렌이 묶여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시선에 담지 않기 위하여 등을 돌려 앉은 듯했다.

손으로 가리키면서도 고구려 사내의 시선은 모닥불로 향해 있었다.

“옷을 찢었으면 당신들이 걸친 그 거지 같은 넝마라도 덮어 주든가 해야지. 저대로 속살이 보이게 할 거야? 그럴 거야?”

따지듯이 말하면서도 고구려 사내의 말투는 부드럽고 입가의 미소마저 담겨 있어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뭐라고 하는 거냐?”

항가이가 고구려 말을 겨우 조금 알아듣는 커레이트 사내에게 묻자, 사내는 고구려 사내의 표정과 말투만 판단해 겨우 답하였다.

“저 여자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커레이트 사내의 심정이 그러한 모양이라, 자신의 생각대로 항가이에게 답한 것이리라.

“건방진… 곧 뒈질 놈이.”

자신이 약탈한 여인을 고구려인이 탐한다고 생각한 항가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 당장 이 고구려 사내를 죽이고 그의 말과 창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말과 창은 내가 갖고, 저놈의 옷은 공이 가장 큰 자에게 주겠다.”

항가이가 웃으며 커레이트 사내들에게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고구려 사내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며 몸을 일으키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한 발 뒤로 물러서 우울렌의 앞에 섰다.

우울렌은 줄곧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는 이 고구려 사내가 왠지 두렵지 않아, 손발이 묶인 상태로 간신히 몸을 세워 앉으려 애썼다.

“마유주 두 잔 주고 술값으로 내 목숨을 받으려는 건가? 너무하잖아.”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커레이트 사내들의 돌발 행동에 대비하였다.

이글거리는 모닥불에 커레이트 사내들이 쥔 날들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쳐라!”

항가이의 외침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고구려 사내로 제일 앞에 선 커레이트 사내의 목에 창날을 박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커레이트 사내가 몸을 축 늘어뜨리자, 고구려 사내는 재빨리 오른발로 사내의 몸통을 걷어차 창을 빼내었다.

그 순간, 항가이의 손도끼가 고구려 사내의 머리를 노렸고, 다른 커레이트 사내 둘도 일제히 달려들었다.

“컥!”

하지만, 비명 소리는 무두질 칼을 든 사내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그의 뒤통수에는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또다시 두 대의 화살이 날아왔다.

“족장, 매복입니다. 고구려인들이 더 있어요!”

커레이트 사내들이 놀라 외쳤으나, 항가이는 고구려 사내를 내리치던 도끼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며 악착같이 시퍼런 도끼날을 휘둘렀다.

고구려 사내는 항가이의 빠른 도끼질에도 우울렌을 지키고선 자리를 비키지 않고 버티다가 어깨를 스친 도끼날에 비명을 내뱉었다.

“어이쿠, 경우! 뭐해?”

고구려 사내는 막바우였고, 그의 외침에 화답하듯 또 한 대의 화살이 항가이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는 그 짤막한 소리에 항가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하고는 그대로 말 위에 올라 어둠 속으로 내뺐다.

족장이 몸을 피하자, 남은 커레이트 사내도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 급히 말에 올라 항가이에 뒤를 따랐다.

“놈들을 쫓아가야 해!”

막바우가 어깨에 피를 흘리면서도 말 위에 올라 도망치는 항가이 일행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말을 달려온 경우가 그의 앞을 막으며 제지하였다.

“무리야! 우린 부상자가 셋이고, 놈들은 이제 어둠 속에 숨었어. 일단 치료부터 하자.”

경우의 말에 막바우가 카사르와 우울렌 두 내외를 바라보니, 우울렌은 자신을 구하러 온 남편을 외면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더러워졌어요. 나를 잊으세요.”

우울렌의 말에도 카사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내에게 다가가 자신이 걸친 가죽 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가리고는 되물었다.

“너는 도적놈이 내게 침을 뱉어 내 얼굴이 더러워지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도적놈을 때려줄 것인가?”

카사르의 물음에 우울렌은 답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기만 하였다.

“카사르가 뭐라고 한 거냐? 왜 그의 아내가 우냐? 카사르 저 친구 속이 좁은 그런 친구였나? 경우, 카사르가 뭐라 했냐고!”

몽고어를 모르는 막바우가 답답해 물었으나, 경우는 그의 어깨를 지혈만 할 뿐 답할 생각은 없었다.

‘카사르 두 내외가 분위기 잡고 있는데, 눈치 없는 이 막바우가 쇠 징 치는 소리로 여지없이 방해하는구나. 이것도 재주야.’

* * *

아침 일찍 출발한 경우 일행은 아직 해가 남았을 때 홍산에 도착하였다.

카사르의 부족민들은 피로 범벅이 된 카사르의 몰골에 놀라 부산하였고, 온달과 평강도 전날 돌아왔어야 할 경우와 막바우가 부상당한 카사르와 함께 돌아온 것에 놀랐다.

경우의 설명을 들은 평강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만하면 다행이라 말하며 막바우와 경우에게 쉬라고 권하였다.

“공주, 걱정되시오?”

평강의 표정이 어둡자, 온달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우리의 위치가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근방에 고구려인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돌까 염려스럽네요.”

“떠돌이 도적 무리로 생각하지 않겠소? 설마 이 홍산에 우리가 터를 잡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구려.”

“그렇겠지요?”

온달과 평강 두 내외의 바람과 달리 세상일은 우려하던 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초원의 복수는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것으로 항가이의 커레이트 부족민은 카사르의 몽고 부족민에 비하여 그 수가 많아, 이들의 복수는 필연이었다.

해가 질 무렵 카사르가 홍산에 올라 온달의 게르를 찾아왔다.

어두운 표정의 카사르를 맞은 온달은 불길한 기미를 느껴 경우와 막바우 그리고 해진과 독고선도 불러들였다.

우랑은 건무를 도와 협곡에 마련한 본진에서 머물고 있었다.

몽고어를 꽤 익힌 평강이 카사르의 말을 받아 온달 일행에게 전해 주었다.

“당신들 고구려인이 이곳 홍산을 찾은 뒤로 나와 우리 부족은 이전보다 부유해졌습니다. 나는 어제 당신들 고구려 친구들에게 목숨을 빚졌고, 빼앗긴 아내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나에겐 당신들은 하늘이 내린 복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나와 엮여 곤혹스런 일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평강으로부터 카사르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온달 일행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표정이 굳어져 갔다.

“제 아내의 이야기로는, 항가이는 커레이트 부족의 족장으로 그들 부족은 이곳에서 삼일 거리에 있습니다. 나의 올루스(백성, 나라)보다 항가이의 커레이트 부족이 더 강합니다.”

“음…….”

“그는 자신들보다 약한 우리 몽고인에게 반드시 복수하러 올 것이고, 그를 물리치면 좀 더 남동쪽에 따로 부족을 꾸리고 있는 그의 부친이 더 많은 전사를 이끌고 올 수도 있습니다.”

카사르는 말을 이어 갔다.

“항가이의 부친은 커레이트 부족의 대족장 하노르이며 그의 형은 커레이트의 대전사 호타크라 제 아내가 말하더군요.”

“아니, 그게 뭐 어떻다고…….”

막바우가 카사르의 말을 끊으려 하자, 경우가 잽싸게 그의 입을 막고는 카사르에게 고갯짓으로 어서 마저 말하라 표현했다.

“나는 그대들 고구려인들이 왜 이 홍산에 왔는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나, 그대들이 이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지내고 싶어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당신들께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곳을 떠나 협곡으로 가십시오.”

“뭐라?”

“이 홍산의 목책은 저와 제 부족민들이 세운 것으로 하여 반드시 지켜 내겠습니다. 항가이의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을 막아 낸다면 그때 돌아오십시오.”

카사르의 둥글고 큰 눈에 진정성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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