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67화 (67/328)

067화 초원의 대족장 카사르 (1)

“한 명이 없다고? 셋이 아니었어?”

언덕 위 사내 셋 이외에 한 명이 더 있다는 우울렌의 이야기에 카사르가 다급히 물었다.

“네, ‘항가이’라고 저들의 부족장이 항상 함께 사냥하러 왔어요. 아버지에게 분쟁을 일으키기 싫다며 그가 게르로 찾아왔었거든요.”

중요한 이야기였다.

카사르는 수레에 탄 아내에게 손을 뻗어 말 위로 끌어 올려 자신의 앞에 앉히고는 서둘러 말을 몰았다.

“소와 수레는요?”

카사르 부족의 형편을 아는 우울렌이 두고 가는 재산이 안타까워 물었다.

“소와 수레보다 네가 중하다.”

카사르의 대답은 스쳐 지나는 바람마저 잠재우며 우울렌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이때, 전방에서 날아온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카라스의 말을 스쳐 지나갔다.

또 한 명의 커레이트 사내 항가이가 앞에 있음을 깨달은 카사르는 서둘러 말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달려라!”

말을 재촉하는 카사르의 외침과 동시에 뒤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그들을 쫓았다.

초원의 말은 고구려인들의 말에 비해 작고 느렸으나, 지구력이 좋고 힘이 월등하였다.

카사르와 우울렌, 두 명이나 태운 말은 조금 속력이 떨어졌으나, 여전히 힘차게 달렸다.

하지만, 이들 내외의 뒤를 쫓는 커레이트인들의 말 역시 지구력이 좋은 초원의 말이었기에, 조금도 지치지 않고 뒤를 쫓으며 포기할 줄 몰랐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며 날아드는 화살 수가 잦아지더니, 끝내 카사르의 어깨를 맞추었다.

“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카사르는 더욱 거세게 말을 몰며 상체를 돌려 화살을 연거푸 날렸다.

질주하는 마상에서 상체만 돌려 활을 당기는 사법은 추격하는 이들을 당황케 하기 충분했으나, 급히 날린 화살이라 위협적이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어깨에 꽂힌 화살로 인한 통증에 카사르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우울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숨을 곳 도와줄 이 하나 없는 초원 위를 달리면 달릴수록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들은 더욱 잦아졌다.

몸을 돌려 화살을 날리는 카사르에 비해 말을 달리며 정면에 화살을 날리는 카레이트인들의 화살은 정교하고 연사 속도도 빨랐다.

또 다시 카사르의 등에 화살이 박히고 고통에 겨운 그의 신음에 우울렌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돌려 활을 당기는 카사르의 등이 피로 흠뻑 물들은 모습에 가만히 손을 대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훗날 당신이 새로 아내를 맞이하는 날, 그녀를 우울렌이라 한 번만, 단 한 번만 불러 주세요.”

너무도 처연한 우울렌의 목소리에 카사르가 몸을 돌렸을 땐 그녀의 따스한 손길은 사라지고 말에서 뛰어내려 거친 풀밭에 뒹구는 우울렌의 가녀린 모습이 그의 커진 두 눈에 들어왔다.

“우울렌!”

야속한 말이 주인의 애끊는 심정도 모른 채 우울렌을 지나쳐 달렸고 어느새 쫓아온 항가이가 손을 뻗어 우울렌을 낚아채 말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우울렌은 커레이트인들이 카사르는 죽이되 자신은 죽이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 그를 살리기 위해 말 위에서 몸을 던졌으나, 카사르는 결코 그녀를 두고 갈 마음이 없었다.

말 머리를 돌린 카사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우울렌을 낚아챈 항가이를 향해 말을 몰아오자, 뒤따라온 커레이트인들이 말 달리는 속도 그대로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정확히 세 대의 화살이 카사르의 어깨와 가슴에 박혔고, 그 충격에 허리가 뒤로 젖혀진 카사르는 끝내 말 위에서 떨어져 풀밭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그만! 그만!”

우울렌의 울부짖음에 항가이가 손을 들어 더는 공격을 못 하게 제지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말을 몰아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죽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뒤쫓아 온 사내가 항가이에게 불만을 토로했으나, 어여쁜 우울렌으로 만족한 항가이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하였다.

“쉿! 그만하라 하지 않는가? 어차피 늑대 밥이 될 것이야. 살아도 뭘 어쩌겠는가? 말도 두고 가자. 살아난다면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께 감사하며 살겠지.”

항가이의 말속엔 자비심보다 아내를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못 할 몽고인을 비웃는 비정함이 담겨 있었다.

커레이트족에 비하면 카사르의 몽고부족은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카사르가 살아 있은들 복수할 길이 없음은 초원의 법칙상 당연하였다.

* * *

초원의 부족들은 척박한 삶 탓에 서로가 끝없는 약탈을 일삼았고, 그로 인하여 원한의 고리는 너무도 사방에 얽히어, 세가 약한 부족에게 복수란 인내하며 원수를 오히려 친구로 삼는 것을 택하게 했다.

하지만, 카사르는 우울렌이 남긴 말을 되새기고 되새기며 사라져 가는 의식을 끝까지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풀밭을 피로 물들이며 카사르가 꿈틀거리는 몸 위로 초원의 독수리들이 어서 그가 죽기를 바라며 맴돌기 시작하였고.

독수리가 맴도는 곳에 먹잇감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황야의 늑대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었다.

* * *

서쪽 하늘과 맞닿은 초원이 붉게 물들 무렵이 되자, 간신히 몸을 일으킨 카사르가 아직도 자신의 곁을 지키는 말의 고삐를 쥐고 겨우 허리를 펴자, 바닥에 내려앉은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의 날갯짓에 검은 깃털이 흩날리는 그 속에 피를 탐하는 늑대들의 공허한 눈빛이 드러났다.

말을 탄 인간은 위험하고, 활을 든 인간은 더욱 위험함을 잘 아는 황야의 늑대는 눈앞에 이 피로 범벅인 인간이 자신들의 먹잇감인지 혹은 자신들을 쫓을 사냥꾼인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집요히 탐색 중이었다.

카사르가 말에 올라 활을 들면 그는 사냥꾼이 되고, 그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면 늑대들은 그를 먹잇감으로 단정 짓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늑대들의 수는 모두 네 마리.

황야의 늑대 무리는 초원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척박한 환경 탓에 큰 집단을 이루지 못하고 단독 혹은 서너 마리가 무리를 이루었다.

황야의 늑대들이 큰 무리를 형성할 때는 오직 풍족한 사냥감이 확보될 때뿐으로 이는 초원의 민족들도 동일하였다.

초원의 민족은 강력한 지도자보다 풍족한 약탈지가 명확할 경우 서로 공통의 목적으로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 뭉쳐 왔었다.

카사르는 손발에 힘이 들지 않아, 말 위에 오르지 않고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들에 시선을 돌렸다.

고작 늑대 네 마리쯤은 안중에 두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였고, 이는 곧 늑대들에게 선택권이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카사르를 사냥할 것인가?

물러나 다른 짐승을 찾을 것인가?

감정이 실리지 않아 공허하였던 늑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지면에서 발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늑대 무리는 일제히 어둑어둑해져 오는 남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초원의 끝에서 달려오는 두 필의 말이 늑대 무리의 시야에 들어오자 카사르를 한 번 돌아보고는 아직 해가 남은 서쪽 초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늑대들이 사라지자, 카사르도 두 필의 말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구려인에 비하여 시력이 월등한 카사르는 점점 가까워지는 말 위에 익숙한 얼굴이 있음에 안심하며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었다.

정찰 나갔던 경우와 막바우가 독수리들이 맴도는 것에 의아함을 느껴 말을 몰아오던 중이었다.

* * *

“카사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카사르의 상처를 지혈하며 급히 응급조치를 취하는 경우에게 막바우가 물었다.

“그 불 지피지 마!”

경우가 잔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피려는 막바우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카사르의 등과 어깨에 천을 단단히 감아 주었다.

“고맙다. 나는 튼튼해 곧 말도 탈 수 있을 것이다.”

카사르가 감사를 표하자, 그제야 뻘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막바우에게 경우가 간단히 설명하였다.

몽고인의 말을 간단이라도 익힌 경우와 달리 막바우는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들어야만 하였다.

“카사르의 아내를 커레이트인들이 납치해 갔어. 우린 카사르를 도와 그들을 쫓을 거야. 그러니 불 지피지 마.”

“아니, 카사르가 뭔 아내가 있어? 뭔 소리야? 우리가 정찰 나올 때까지도 총각이더만. 그새 장가간 거야?”

“나도 몰라. 아무튼 카사르가 그렇게 말했고, 모른 척할 수 없어. 우리가 온 남동쪽에는 하루거리 안에는 그 어떤 부족은커녕 게르도 없었어.”

“…….”

“즉, 녀석들은 자신들의 부족까지 이틀거리는 가야 할 거야. 서두르면 야영하는 놈들과 만날 수 있어. 서두르자.”

여인이 납치되었다는 말에 유독 경우가 서둘렀고, 막바우도 이웃 부족의 족장인 카사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모른 척할 위인은 못 되었다.

“좋아! 가자. 그런데 카사르가 말을 탈 수 있을까?”

“말 위에서 죽더라도 아내 곁에 가겠다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경우가 카사르의 말을 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막바우가 카사르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려 주고는 그도 자신의 말에 올랐다.

“좋아, 가자! 놈들은 분명 불을 지피고 야영할 테니, 달리다 보면 불빛이 보이겠지. 아무렴.”

* * *

막바우의 말대로 달빛과 별빛에 의존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네 식경쯤 되자, 멀리 초원의 끝 어둠 속에 작은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하건대, 두 시진은 더 걸릴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울렌을 납치한 항가이 일행은 해가 지기 전, 야영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남의 아내를 약탈해 놓고 편안히 잘도 야영하는구나.”

인근에 다른 사람은 없으리라 막바우가 확신하며 저 불빛을 커레이트인들이 지핀 모닥불로 단정 지었다.

“서두르자. 놈들이 흉악한 짓을 하기 전에 가야 해.”

경우가 막바우의 말을 받으며 옆을 보니, 핏기 없는 얼굴의 카사르가 입술을 꽉 깨물고 앞서 말을 몰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카사르! 괜찮겠어?”

경우의 물음에 카사르는 얼마 전 선물 받은 우랑의 활을 들어 올리며 대답을 대신하였다.

싸울 수 있다는 의지가 확실하였다.

* * *

초원의 민족 대부분은 해가 떨어지거나 비가 내리는 날은 사냥과 약탈을 삼가했다.

이는 그들의 활이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어둠 속에서 위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를 되찾아야 하는 카사르와 경우, 막바우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말발굽이 내는 진동을 항가이 일행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말에서 내려 어둠에 몸을 의지해 걸으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아직 항가이 일행의 모닥불까지는 뜨거운 차가 식을 만큼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모닥불 주위에는 네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고, 바람에 일렁이는 모닥불에 언뜻언뜻 옷이 찢긴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카사르의 아내 우울렌이었다.

“이런 쳐죽일 놈들.”

창을 쥔 막바우가 신음을 뱉듯 소리 죽여 욕설을 퍼부었다.

“쉿!”

경우는 막바우의 말을 끊고 카사르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조금의 분노도 없었고, 오직 사랑하는 아내 우울렌에 대한 미안함만이 가득하였다.

조금 더 거리를 좁히자, 사거리가 긴 경우의 활은 닿고 커레이트인들의 활은 닿지 않을 거리가 마련되었다.

카사르의 활도 충분히 사람을 사냥할 준비가 되어 보였으나, 인질로 잡힌 우울렌이 염려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경우는 평소와 달리 막바우에게 상냥히 말하였다.

“이보게 막바우. 자네가 저 모닥불로 가 저 여인을 지켜주게나.”

“내가? 나 혼자? 저길?”

“그래, 자네가 저 모닥불 가에 가서 우울렌 곁에 있어 준다면 나와 카사르가 활을 당기겠네.”

너무도 태연히 계획을 말하는 경우를 빤히 쳐다보던 막바우는 카사르의 안쓰러운 얼굴에 한숨 한 번 내쉬고는 창을 들고 말에 오르며 말하였다.

“염려 말게나. 내가 먼저가 지키고 있을 테니, 마음껏 활을 당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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