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66화 (66/328)

066화 적봉진(赤烽鎭) (3)

‘평강 공주의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천막으로 향하던 길에 매복에 걸려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우랑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행 중 단연 체구가 큰 온달 앞에 선 카사르가 자신의 가슴에 엄지를 대고는 기분 좋게 말하였다.

“저 산에 당신들이 목책을 세우고 게르를 올릴 수 있도록 우리가 돕겠다.”

우랑이 이 말도 전하자, 온달과 건무가 기뻐 화답했다.

평강은 잠시 생각하더니, 우랑에게 다시 말을 전하라 명하였다.

“저 붉은 산에는 물이 없는가?”

“그렇다. 당연히 전혀 없다.”

물이 없으면 기지가 노출되었을 시 적이 별다른 공격 없이 포위망을 펼치기만 하여도 버티기 어려울 것은 당연하였다.

이것은 카사르 부족민들이 홍산에 오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카사르의 답변에 평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전하라 명했다.

“근처에 물이 있으며 외적을 맞아 싸우기 용이한 장소를 아는가? 거리는 저 붉은 산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우랑이 다시 말을 전하자, 카라스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우리가 들판을 가득 메운 적의 공격을 받으면 피하는 곳이 있다. 양 떼들이 먹을 풀도 충분하고 물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말을 달려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다.”

“오, 좋아!”

카라스의 말을 들은 막바우는 눈치 없이 좋다며, 신나 하였다.

“에헴, 거기에 좁은 협곡을 지나면 꽤 넓은 곳이 나오는데, 그 끝은 높은 벼랑으로 막혀 있고 한쪽에 위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그 위에 오르면 물과 풀이 충분하다. 우리 부족 말고 다른 부족들은 모르는 곳이다.”

카사르의 말에 평강이 만족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안전한 곳이 있는데, 왜 이곳에 천막을 쳤는가?”

카사르는 평강의 물음에 껄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곳은 적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지만, 적이 협곡 입구를 막으면 우리도 나오기 힘들다. 적에게 둘러싸여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방 어디로도 도망칠 수 있는 이곳이 차라리 좋다.”

“음…….”

“또한, 항상 그곳에 있으면 안전한 그 협곡도 노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그곳이 노출되지 않아 위급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일리가 있는 대답이었다.

평강은 온달과 건무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이곳 홍산에 목책과 천막을 세우고 망루를 올려 드넓은 초원을 살필 수 있는 적봉진의 전초기지로 삼고, 저자가 말한 협곡 깊숙이 적봉진의 본진을 세운다면 위치 노출도 되지 않을뿐더러, 서로 호응하여 적을 맞아 싸우기에도 용이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온달과 건무는 평강의 계획을 이해하고 크게 기뻐하며 동의하였다.

이런 절차로 적봉진은 홍산에 전초기지와 협곡에 본진으로 나누어 세워지는데, 누구나 적봉이란 명칭 탓에 붉은 산 위에 세워진 전초기지만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협곡의 본진은 찾을 생각조차 못 하게 된다.

* * *

평강의 지시로 이끌고 온 양 떼를 선물 받고 여분의 활마저 오십 개나 받은 카사르의 부족민들은 사냥이 수월해지고 타 부족의 습격에 대한 부담을 던 것 같았다.

이들의 생활은 온달 일행이 찾아오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카사르의 부족민들은 제 일처럼 홍산과 협곡에 진영이 갖춰질 수 있도록 함께 일하였고, 두 군데의 성채가 형태를 갖출 무렵 안시성을 거친 군사 오백이 물자를 실은 수레와 함께 도착하였다.

평강은 이번에도 여분의 물자가 넉넉하여 건무와 온달에게 제안하여 카사르 부족민들에게 양과 활을 넉넉히 선물하였다.

물자와 함께 도착한 군사들 역시 을지문덕의 지시로 모두가 활을 잘 다루는 궁기병 일색이었고, 이는 빠른 속도 위주의 전격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가을에 한 번 더 군사와 물자가 충원될 것이라는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장에게 평강이 글을 써 을지문덕에게 전하라 건넸고, 평강의 편지를 지닌 부장은 군사 둘만 데리고 다시 떠났다.

* * *

병력이 충원되자, 온달이 홍산의 전초기지를 지키고, 협곡은 건무가 지키는 것으로 정하여 병력을 나누었다.

또한 새로 합류한 군사는 협곡으로 이동하여 건무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홍산에 세운 전초기지는 물이 부족하여 카라스의 부족민과 협곡의 본진에서 수시로 보급을 받지 않으면, 며칠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형편이었다.

그렇기에 카라스의 부족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기지를 두 군데 나눠 세운 평강의 지혜 덕분에 겨우 운영할 수 있었다.

온달은 향후 있을 전쟁에서 적의 보급 부대를 급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적의 본진 후미를 들이치는 것이 적봉진의 목적이었기에, 막바우와 경우에게 명하여 주변 지형을 살피고, 수나라의 영주 총관까지 최단 거리를 파악하게 시켰다.

막바우와 경우는 카사르의 부족민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끝없는 초원을 내달리며 지형을 파악해 나갔고.

해진과 독고선은 틈틈이 온동과 독고영에게 무예를 가르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총명한 온동은 해진과 독고선이 가르치는 무예를 단번에 외우고 따라 하여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온동의 아이답지 않은 대담한 성격과 마음속 분노를 헤아린 평강은 온동의 재능을 아끼면서도 혹여 세상의 군심 거리가 되지 않을까 늘 고심하였다.

‘본성은 착하나, 복수를 위하여 서슴없이 살인을 언급하는 거침없는 심성은 자칫하다간 만인들의 해악이 될 수 있다. 내가 이 아이를 잘 가르쳐 바른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평강의 이런 근심도 모른 채, 온동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 * *

그날의 아침도 하늘까지 닿은 초원 어디에도 위험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래 몽고인의 천막이 유난스레 소란스러워 파산귀검을 수련하던 온달이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웬일로 카사르가 알록달록한 새 옷을 꺼내 입고 말 위에 오르는데, 그 뒤로 성질 사나운 초원의 검은소(야크)가 끄는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카사르가 어딜 가는 것인가?”

온달이 홀로 중얼거릴 때, 살며시 나타난 평강이 늘 그렇듯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신부를 데려오러 떠난다 합니다.”

“신부를 데려온다니, 장가간다는 말인가요?”

“장가는 이미 어려서 갔는데, 신부를 데려올 지참금(持參金)이 부족하여 오 년간 신부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몸으로 갚기로 했다는군요.”

“…….”

“헌데, 부족을 이끌던 카사르의 부친이 돌아가시어 신부를 두고 돌아왔다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선물한 활로 지참금을 대신 지불하고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모양입니다.”

카사르의 처지를 들은 온달은 늦도록 장가들지 못하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평강을 향해 싱겁게 웃었다.

“허허, 좋은 일이군요. 허허.”

말에 오르던 카사르는 홍산 위에서 온달과 평강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두가 기분 좋은 아침에 카사르는 말에 올라 소가 모는 수레까지 끌고 홀로 길을 떠났다.

“말을 달려 반나절 거리에 있는 올구누트 부족이라 했으니, 돌아올 때는 더 걸리겠군요. 막바우님과 경우님도 남동쪽으로 내려가 지리를 살피는 중이신데, 오가며 만날 수도 있겠어요.”

신부를 데리러 떠나는 카사르의 뒷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평강이 말하였다.

싸우지 않고 친구가 되어 자신들이 선물한 활을 지참금 대신 치르고, 두고 온 신부를 데리러 가는 카사르의 모습에 평강이 더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 * *

카라스의 장인은 초원과 숲에 터를 지닌 민족인 올구누트의 부족장이었다.

그는 이들 초원의 민족들은 부족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며, 언어와 종교가 달라도 함께 어울리고 혼례를 치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서로 간의 약탈과 습격이 잦은 초원의 민족 특성상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적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적을 줄이기 위하여 친구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타 부족 간의 혼례가 일상이었고, 올구누트 부족은 카라스의 몽고 부족에 비하여 풍요로웠으며, 어지간한 일로는 타 부족과 다툼을 피하는 평화로운 민족이었다.

이들도 가족 단위의 작은 부족으로 퍼져 지냈고, 카라스와 인접한 부족이기에 서로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카사르의 부친에게 먼저 혼사를 제의하였었다.

몽고인들의 궁핍함은 초원의 민족 누구나 아는 일로 지참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자존심 강한 카사르가 받아들이지 않고 데릴사위로 지내며 갚겠다고 한 것이었다.

염치가 없어 처가에 아내를 두고 온 지 이 년 만에 찾아가는 그의 마음은 두둥실 떠 있었다.

고구려인의 활이라면 초원의 말 다섯 필과도 충분히 거래가 될 물건이니, 장인이 흡족해할 것은 분명했다.

수레에 실은 활 다섯 자루와 양 가죽 여섯 개.

그는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 부족을 이끌어 양을 치고, 열심히 사냥해 양 떼의 수를 늘려가면서도 부족의 공동 재산인 양으로 두고 온 아내를 데려올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온 반가운 손님 덕에 모든 근심이 한 번에 날아가니, 이보다 더 즐거운 날은 세상에 나온 뒤로 처음인 것 같았다.

밤이 깊어 도착한 장인의 지역 게르에서 이 년 만에 만난 어린 아내 우울렌은 못 볼 줄 알았던 남편의 방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반겼고, 장인과 장모는 그가 마련한 선물에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열었다.

올구누트인들은 여인이 아름답고 남자는 총명하다고 초원에 널리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라 곱게 차린 아내의 모습은 이 년 전보다 더욱 고왔다.

장인은 혹여 카사르가 곤란할까 봐 물음 한번 없이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양 가죽에 활을 둘둘 말아 감추었다.

그리고는 카사르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말했다.

“애썼네. 아이들이 태어나면 선물로 돌려보내겠네.”

‘인정받는다는 것. 사람 사는 맛이로구나.’

그렇게 모두의 기쁨이 큰 날이었다.

다음 날, 양 가죽을 깐 수레에 아내를 태우고 장인, 장모와 올구누트 부족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카사르는 자신의 부족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은 수레가 흔들려 아내가 힘들까 염려되어 속도를 내지 않았다.

카사르가 조금만 늦게 출발하거나, 속도를 좀 더 내었다면 그들과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인데,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 * *

초원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고 몇 안 되는 직업들이 존재했다.

양치기, 사냥꾼, 도적 이 세 개의 직업 이외에 농사를 짓거나, 시를 쓰거나, 비단을 만드는 등의 다른 직업들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사르 내외가 지나는 초원에는 얼마 전부터 커레이트족이 종종 들어와 사냥을 했는데, 이날의 아침도 커레이트 사냥꾼들이 들어와 두 내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이 올구누트의 세력지라 해도 경계가 모호하고 광활한 초원을 유랑하는 초원의 민족 특성상 너무 겹쳐 양해 없이 양 떼에게 풀만 먹이지 않는다면 분쟁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커레이트, 부리야트, 올구누트, 메르키트, 망구트, 옹기라트, 야쿠트 등 부족명 끝이 ‘트’인 부족들은 흑룡강 부근에 주로 머물렀고 바이골(옛 몽골어로 현재의 시베리아 바이칼호)호까지 이동하여 거주하였다.

이들은 몽고인과 마찬가지로 오래전에는 삼한인과 한 뿌리로 메르키트는 말갈, 부리야트는 부여, 커레이트는 고려(고구려) 등이 뿌리였다고 하지만 고구려와 크게 교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커레이트의 세 사냥꾼들은 초원의 세 가지 직업 중 상황에 따라 모두를 번갈아 업으로 삼았으니, 이날 그들의 직업은 사냥꾼에서 도적으로 변하였다.

“우울렌, 올구누트 부족민들이 우릴 걱정해 배웅하는 것인가?”

시력이 좋은 카사르는 계속 자신들을 주시하는 언덕 위 사내 셋이 신경 쓰여 수레에 탄 아내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저들은 커레이트인들이에요. 종종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지요.”

이제 열여섯으로 나이 어린 우울렌은 초원의 직업이 양치기와 사냥꾼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냥꾼? 사냥꾼이 짐승을 쫓지 않고 왜 우리를?”

불길함을 느낀 카사르가 시선을 언덕 위 사내들에게 고정하여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한 명이 없네요?”

우울렌도 심상치 않은 카사르의 분위기에 언덕 위 사내들을 살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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