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65화 (65/328)

065화 적봉진(赤烽鎭) (2)

북으로 며칠을 더 올라가니, 우랑의 말 대로 온달 일행을 기다리는 이백여 명의 군사가 양 떼와 수레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며칠 동안의 여정에도 지나치는 사람과 인가가 없던 차에 자신들을 맞이하는 군사들이 더해지니 온달 일행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말을 급히 달려왔으면 좀 더 빨리 이들과 합류할 수 있었겠으나,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이 남아 있기에 말이 지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부디 해량하여 주십시오.”

우랑이 공손하게 건무와 온달에게 설명하고는 군사들에게 수레와 양 떼를 끌고 다시 출발을 명하였다.

‘참으로 차분한 자로구나. 과연 을지 공이 우랑으로 하여금 우리 장군님을 보좌케 한 것은 이유가 있구나.’

평강은 을지문덕이 자신의 부장인 우랑을 따라 보낸 이유를 깨달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헌데, 숱하게 말을 타고 지나면서도 어찌 마주치는 이 하나 없는 게요? 여기 사람 안 삽니까? 이 정도 거리를 지나면 깊은 산골에서도 마주치는 사람이 있을 건데, 여긴 어찌 이 모양입니까?”

초원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 구경을 못 한 막바우가 궁금증을 못 참고 우랑에게 물었다.

“이 초원은 거란의 지배를 받는 곳이나, 실상 거란인은 들어오지 않는다네. 이곳은 여러 초원의 부족들이 주인으로 우리가 향하는 홍산 일대는 초원의 부족 중 주로 몽고인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그들은 양을 먹일 풀과 강을 따라 이동하기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네.”

“아! 그렇구만.”

“초원은 바다와 같이 넓고 이들은 계속 이동하니, 초원의 부족들조차 서로 부딪치기가 쉽지 않다네. 대체로 부족과 부족 사이는 말을 달려 이틀거리에 있다고 들었네.”

우랑의 설명처럼 몽고인을 포함한 여러 초원의 부족들은 가족 단위로 부족을 이루어 생활하였고, 각각의 부족들은 혼사를 통하여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이들 가족 단위의 작은 부족에서 뛰어난 부족장이 나오게 되면, 인근의 친밀한 다른 부족이 스스로 가족을 이끌고 합류하며 그 세력이 점점 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적대 관계의 부족이 인근에 있을 경우, 싸움을 피할 수 없어 부족 간의 거리를 항상 유지하며 왕래를 줄이고 서로 피해 드넓은 초원을 이동하였다.

초원의 부족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시력이 월등히 뛰어나, 지평선 끝에서 말발굽이 만드는 흙먼지까지 인식할 수 있었고.

이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만들어 낸 흙먼지 역시 이미 파악해 천막을 걷어 이동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긴 여정 동안 마주치는 이들이 없음은 당연하였다.

을지문덕은 만일에 대비하여 이동 경로를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부족을 마주하면 아이와 늙은이까지 몰살하라 우랑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 떼를 몰고 가며 일부러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켜 초원의 부족들이 미리 피하도록 배려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우랑으로서는 그동안 누구도 마주하지 않음을 크게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넓기는 무진장 넓은가 보군요. 그래도 아무도 없이 휑하니 참 적적합니다.”

눈치 없는 막바우의 말에 우랑이 싱겁게 웃을 뿐이었다.

* * *

온달 일행은 이백여 명의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동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올라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멀리 초원 위에 우뚝 선 붉은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돌과 붉은 흙으로 초원 위에 솟아오른 붉은 산.

온달 일행의 목적지인 홍산이었다.

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낮고, 그 면적 또한 작아 작은 구릉 정도였으나, 평지 위에 홀로 선 탓에 주변이 환히 들어올 천혜의 요충지는 분명하였다.

비록 높지도 넓지도 않은 산이었으나, 정상이 평평하여 목책을 세우고 천막을 올리면 족히 이천의 군사는 물론이요.

그 이상의 말과 가축들 역시 함께 머물 공간은 충분해 보였다.

“산이라 하기에, 작으면서도 초원을 내려다보고 있어 전략적 가치는 충분해 보입니다만, 대군에게 둘러싸일 시 무척 곤란해 보이기도 합니다.”

평강이 소리 낮춰 말하자, 온달도 느낀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하였다.

“둘러싸이지 않아야겠군요.”

단순하지만 명료한 답이었다.

점점 홍산과 가까워지며, 산 아래 초원에 자리한 천막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들 천막은 게르라 불리는데, 기둥을 세우고 짐승 가죽을 덮는 단순한 방식에도 초원의 거센 폭풍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이들 천막의 수는 무려 오십여 개가 넘고, 그 앞 들판에 눈이 내린 듯 온통 하얀 것이 풀을 뜯는 양 떼가 틀림없었다.

“거, 장관이다. 상당한 세력을 지녔나 봐요.”

눈이 좋은 막바우가 먼저 알아보며 말하자, 온달도 우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하였다.

‘가족 단위의 부족이 아니구나. 우리의 수를 보고 먼저 피하지 않았으니, 저들도 믿는 것이 있고, 지킬 것이 있겠구나.’

이런 온달의 생각에 화답하듯 양 떼 사이를 뚫고 세 필의 말이 질주하여 온달 일행을 향해 곧장 달려왔다.

가까워질수록 말 위에 앉은 사내들의 행색이 뚜렷해지며 이들이 등에 짧은 활을 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활이 겨우 닿을 수 있을 거리인 이백 보 밖에서 멈춘 사내들은 잠시 온달 일행을 응시하더니, 그중 한 사내만이 말을 천천히 몰아 다가왔다.

한 사내는 이십여 보 밖에 서서 몽고인의 언어로 크게 소리 내어 물었다.

“그대들은 거란인인가?”

목소리가 젊고 수염이 짙지 않아 스물 초반으로 여겨졌다.

몽고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온달과 건무를 대신하여 우랑이 나서 답하였다.

“우린 거란인이 아니다.”

“그럼 돌궐인이냐?”

사내의 목소리에서 깊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수와 고구려에 비하면 돌궐과 거란은 경제 규모가 열악하였고, 돌궐과 거란에 비하면 타타르, 위구르, 커레이트, 부리야트, 올구누트, 메르키트, 망구트, 야쿠트, 오로도드, 옹기라트, 나이만 등 수많은 초원의 민족들은 더 열악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보다 북방 고원의 몽고인들은 가장 가난하고 세력이 약하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양 떼와 말 그리고 천막이 전부인 초원의 민족 중, 몽고인들은 가장 작은 단위로 모여 살았으며, 다른 부족들의 약탈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쇠로 만든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없으며 전장에서 얻어 대대로 물려받는 작은 비수가 고작이었다.

한편으로 몽고인들은 유독 피가 몸에 닿는 것을 꺼려 근접 무기로 칼을 잘 사용하지 않고, 짐승이든 사람이든 활로 대적하기를 즐겼다.

이렇듯 가난한 몽고인에 비하면 거란이나 돌궐은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하여 온달 일행의 행색이 반듯함에 사내가 거란이나 돌궐로 물은 것이다.

우랑은 사내가 칼을 차고 있지 않음을 눈여겨보며 답하였다.

“우리는 돌궐인도 아니며, 거란인도 아닌 고구려인이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인가?”

고구려인이란 우랑의 답변에 사내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조금 느슨해졌다.

돌궐과 거란에 비하면 고구려인과는 작은 분쟁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나의 올루스(나라, 백성)로 나는 부족장 카사르다. 여기는 왜 왔는가?”

젊은 부족장치고는 꽤 규모가 있는 몽고인의 부족을 이끌고 있어 우랑은 적지 않아 놀랐다.

자신을 부족장 카사르라 밝힌 사내의 표정을 살핀 우랑이 온달과 건무에게 나지막이 말하며 의견을 구했다.

“을지 공께서 마주하는 사람이든 부족이든 몰살하여 행적을 노출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지금 저들을 없애야 합니다.”

우랑의 말에 멀리 보이는 천막들 속에 노인과 여인은 물론이요.

아이들까지 있음을 잘 아는 온달과 건무는 놀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 단위의 부족이라 하지 않았소? 아이들도 있을 것인데.”

“몰살이라 했는가? 아니 어찌 그런 참혹한…….”

온달과 건무가 얼굴 가득 난색을 표하자, 우랑도 난처하여 답하지 못하였다.

곁에서 가만히 듣던 평강이 망설이는 사내들에게 웃으며 해답을 내었다.

“역시, 을지 공은 치밀하기 그지없습니다. 제 짧은 생각에 을지 공이 지금 이 자리에 있고, 이처럼 홍산 아래에 터를 잡고 있는 부족이 있을 경우엔 을지 공도 몰살이 아닌 다른 방안을 마련하였을 것입니다.”

“…….”

“우랑님은 제 말을 저 사내에게 대신 전하여 주십시오.”

평강의 말에 우랑이 즉시 반응하였다.

“명하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의 양과 초원을 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저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산이다. 우리가 저 산에 올라 머물 수 있게 배려해 준다면 우리의 양들을 모두 그대들에게 넘기겠다.”

“양을 모두 말이십니까?”

평강의 말에 우랑이 놀라 되물었으나, 평강은 그저 환히 웃어 답했다.

결국 우랑은 별수 없이 카사르에게 그대로 평강의 말을 전했다.

“양을 모두 준다니, 그대들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카사르도 우랑이 전한 말에 크게 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저 붉은 산은 풀이 없으니, 올라갈 필요도 없는 곳인데 귀한 양과 바꾼다니, 이상할 만도 했다.

초원의 민족에게 양이란, 고기와 우유, 옷과 천막 및 담요까지 마련해 주는 의식주의 모든 것이었다.

“단, 우리가 저 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 부족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오.”

평강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우랑이 즉시 받아 카사르에게 전하였다.

카사르는 여인인 평강이 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조금의 불편한 기색 없이 편하게 받아들였다.

몽고인들은 부족장이라도 모친이나 아내의 말을 잘 듣고 수용하는 편이었고, 서로 의논도 잦았다.

그렇기에 여인이 명하는 온달 무리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이 많은 양을 우리에게 넘기는 귀한 손님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대들에 대하여 다른 부족들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허나, 그대들은 양을 모두 우리에게 주고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카사르의 물음에 평강이 웃으며 답하였다.

“우리가 식량이 부족하면 그대들에게 양을 사겠다. 값은 우리의 활로 지불하겠다.”

고구려의 활이 뛰어남은 사냥한 짐승 가죽을 거란인들과 거래하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적으로 활 제조 기술이 많이 뒤처진 상태였기에, 카사르 역시 활을 다루는 사냥꾼이자, 전사인지라 단번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우랑이 등에 멘 활을 가리키며 평강이 말하자, 자신들의 활보다 매끈한 각궁에 눈이 휘둥그레진 카사르가 크게 기뻐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였다.

“그대들이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당신들을 손님으로 맞아 저 붉은 산을 지키겠다. 환영한다. 고구려인.”

광활한 초원에서 먼 길 가는 나그네는 사람이 머무는 게르(천막)를 스쳐 지날 경우, 며칠이 지나도 다른 게르를 발견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했다.

이런 경우, 나그네는 초원의 차가운 풀밭 위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게 된다.

따라서 카사르가 손님으로 맞는다고 표현한 것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으로 목숨까지 책임짐을 의미했다.

여분의 활이 충분하였기에 우랑은 평강의 명에 따라 카사르에게 자신의 활을 건넸고, 카사르는 몸을 돌려 활을 높이 치켜들고는 두 번 흔들었다.

그러자, 멀리 양 떼들 사이에서 말과 함께 무릎을 꿇고 대기하던 몽고 사내들이 일제히 말고삐를 쥐고 일어서더니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는 곧바로 내달려 온달 일행과 이백 보 밖에서 멈추었다.

일백 기가 넘는 몽고 사내들의 얼굴에는 적의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아 귀한 손님을 맞아 나온 사람들 같았다.

이들이 말을 다루는 재간에 우랑은 내심 놀라 평강의 현명한 지시 덕분에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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