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64화 (64/328)

064화 적봉진(赤烽鎭) (1)

기악의 바람과 달리 그의 동생들은 을지문덕의 명을 받은 총관부 군사들에게 추포되어 강이식 앞에 무릎 꿇린 상태였다.

“살고 싶으냐?”

을지문덕의 물음에 살길이 열리길 희망하는 간절함을 담은 기훈의 눈빛이 빛났다.

그러나 성미 급한 기범의 답변에 그의 희망은 깨지고 말았다.

“이렇게 잡힌 이상 죽을 것이요. 형님 곁에 넣어 주시오.”

기범의 단호한 어투에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살 수 있다는데, 그냥 죽을 것이냐?”

“하명하시옵소서! 듣겠습니다.”

둘째 기범이 답하기 전 기훈이 먼저 소리쳐 답하였다.

“그래, 살아야지. 아무렴. 내가 너희 형도 함께 살릴 방안을 알려 줄 터이니, 듣거라.”

을지문덕은 만족한 듯 웃으며 부드러이 말하였고, 기 씨 삼 형제는 동시에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옥을 하여 너희 큰 형을 구하고 북주 잔존 세력이 있는 돌궐로 도망치거라.”

“파, 파옥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파옥이다.”

“파옥을 한다 하여도 연고도 없는 돌궐로 어찌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기훈이 을지문덕의 말을 의심하여 조심스레 물었다.

“연고를 지닌 자들이 지하 감옥에 있으니, 그들도 꺼내 주면 될 것이다. 너희는 단지 파옥을 한 후 돌궐까지 가서 내가 원하는 것만 알아내오면 모든 죄를 사해 주겠다.”

“……!”

“어쩌면 돌궐까지 가지 않고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겠느냐?”

“저희를 믿으시옵니까?”

“믿지 않는다.”

“하온데 어찌?”

“한 명만 내 곁에 남으면 서로 믿음이 생기지 않겠느냐? 저 키 큰 친구가 좋겠군.”

을지문덕이 기룡을 가리키며 남으라 말하자, 기범과 기훈의 안색이 변하여 항의하려 했다.

그러나 기룡이 먼저 답하며 형제들을 달랬다.

“하겠습니다. 제가 남겠습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면 우리 사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당연한 일이다.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 공이 상당하여 총관부에서 자리를 내주어 너희를 중히 쓰겠다.”

강이식은 을지문덕과 기 씨 삼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대의를 위해서라면 중죄인과도 손을 잡는 을지문덕이 참으로 무섭고 냉정하다 생각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을지 공은 고구려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할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적이 되지 않고 벗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구나.’

“명심하거라! 너희가 함께 파옥시키는 이들은 북주의 간자로 의심이 상당할 것이니, 너희가 맡은 임무를 들키지 않도록 신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곳에 남은 형제와 다시 만나 함께 중히 쓰일 수 있느니라.”

기 씨 사 형제의 우애 깊음을 파악한 을지문덕이 자상히 말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허튼짓 할 시 총관부에 남은 기룡을 만나지 못할 것이란 엄포가 담겨 있었다.

* * *

“폐하 성주께옵서 문안 인사를 여쭙고자 납시었습니다.”

문밖에서 태왕의 처소를 지키는 환관이 아뢰었다.

“들라하라.”

단공과 단둘이 처소에 머물던 태왕이 이른 시간에 들린 동생을 맞이하였다.

“폐하, 기침하시었나이까?”

“아우는 편히 앉아 말하시게.”

태왕이 되지 못한 왕자, 고무는 이제 주름이 가득한 형에게 깊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자리하였다.

“아우는 어인 일인가?”

“건무와 평강 일행을 추방하였다 들었습니다.”

온달은 거론하지 않고 조카들의 이름만 입에 담은 고무였다.

이른 아침임에도 이미 추방령은 요동성 내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리하였네.”

“잘하신 결정이시옵니다. 예로부터 태왕이 될 수 없는 왕자들은 왕성 내에 머물지 않아야 목숨을 보전하는 법이지요. 제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태왕의 친동생이며 거침없는 성격으로 한때 따르던 이가 많아, 그를 태왕으로 옹립하려던 움직임이 많았었다.

당시 태자였던 평원 태왕은 연태조의 선친 연자유의 조언을 받아들여 요동성주로 고무를 임명하도록 선대 태왕에게 간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양원 태왕의 결정 덕에 오부 귀족들의 분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요동성은 일대에 가장 큰 성이며 요충지였으나, 요동성의 군권 대부분을 지닌 총관을 따로 임명하여 실상, 다른 성에 비하면 반쪽짜리 성주에 불과했다.

“아우는 내 결정이 옳았다 생각하는가?”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결정은 건무의 목숨을 살렸고 평강을 정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할 건무를 이용하여 오부 귀족들이 딴마음 품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그의 이 말은 건무를 향후에도 평양성 내에 두지 말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들려주고자 이른 아침에 나를 찾은 것인가?”

고무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태왕이 다시 물었다.

“실은, 역심을 품은 무리를 모두 소탕하지 못하였기에, 마음이 불안하여 폐하께 아뢰고자 뵈온 것입니다.”

“불안하다… 말 하시게.”

자신과 함께 늙어간 동생의 주름진 눈매를 들여다보며 태왕이 말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손을 먼저 놀리고 꾀가 많은 자는 머리를 정리하지요. 목원의와 우연순은 자신들이 지혜롭다 생각하였지만, 실상 우매한 자들로 힘을 함부로 과시하여 명을 단축하였습니다.”

“…….”

“그러나 인내하며 머리로 간교한 술책을 행하는 간적은 아직도 남아 외적과 내통하고 있사옵니다. 이들이 평양성으로 환궁하시는 폐하의 행차를 노릴까 우려스럽고 또한, 평양성으로 자리를 옮긴 제가회의에서 어떤 짓을 벌일지도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여.”

사설이 긴 고무의 말을 자르며 태왕이 핵심만 듣고자 하였다.

“하여, 소인이 감히 폐하께 아뢰고자 하는 것은 서부총관 강이식과 부총관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폐하의 행차를 평양성 내까지 호위하며, 제가회의가 끝날 때까지 머물게 하여 불순한 움직임을 사전에 막고자 하옵니다. 또한…….”

“계속하시게.”

“계루부의 대가 고강을 대장군직에서 물러나게 하신 후, 마침 평양성에 머문 강이식에게 대정군직을 내리시어 군권을 맡기시기를 간하나이다.”

“대장군을 내치고 그 자리에 강이식을 올리라?”

“그러하옵니다. 무릇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왕종은 평시에도 요직을 맡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음…….”

“우리 고구려는 오부 귀족 중 왕종인 계루부의 힘을 키워 절노부 이하 다른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군권마저 맡기고 있사오나, 지금은 크나큰 전란이 임박하였고 내부 귀족들의 움직임도 수상하오니, 고강의 힘을 빼심이 옳은 줄로 아뢰나이다.”

“아우 그대는 사촌 아우 고강은 못 믿고 강이식은 믿는다는 말인가?”

태왕의 물음에 고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강이식과 을지문덕은 태자와 죽마고우로 이들은 누가 태왕이 되어야 함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으나, 그들의 상황이 태자를 태왕으로 옹립하여야 명줄을 보존할 수 있으니 태자에게 이보다 더 믿을 만한 자들도 없을 것이옵니다.”

“아우의 의견은 알겠네.”

“하온데 폐하, 건무 일행은 어디로 추방하셨는지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사옵니다.”

태왕의 눈빛이 짧은 순간 차가워졌다가 다시 담담히 돌아왔다.

“아우는 이 방에 나와 단공뿐만 아니라 칼과 활을 든 무사 수십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태왕의 물음에 자신이 경솔하였다고 생각한 고무는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물, 물론이옵니다. 소인이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더듬더듬 고무가 답하자, 태왕이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듣는 귀가 많네. 강이식과 을지문덕에게 평양까지 따를 준비하라 이르고, 아우는 인제 그만 차를 드시게.”

* * *

“저곳이 수나라의 영주 총관부입니다. 몇 해 전만 해도 거란인들의 교역 장소였으나, 이제는 수나라에게 내어준 상태이지요. 아직도 수나라 상인들과 함께 돌궐과 말갈, 우리 고구려인들이 저곳에서 교역을 하고 있으나, 저희가 들러 쉬기는 어렵습니다.”

우랑이 넓은 평야에 우뚝 선 성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요동성을 떠나며 건무는 말수가 적어지더니, 이내 입을 다물고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평강이 지친 얼굴로 멀리 보이는 성벽을 응시하고는 온달에게 말을 건넸다.

“몇 년 만에 평야에 저리 큰 성을 쌓다니, 과연 수나라의 힘은 대단하군요. 우리에게 복속되었던 거란인들은 또다시 우리의 적이 되겠군요.”

거란은 본래, 고구려가 힘이 강할 때는 복속되어 동맹 관계로 함께 군을 움직였으나, 중원의 세력이 강성해지면 등을 돌리기를 반복해 왔었다.

이는 돌궐도 마찬가지로, 이를 잘 아는 수의 황제 양견은 북주 황위를 찬탈하자마자 거란의 세력에 대고구려 전초기지인 영주 총관부를 세웠고, 한편으론 선비족 출신의 장수 공손성을 대돌궐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돌궐을 견제했다.

그리하여 거란과 돌궐은 감히 수에 맞서지 못하고 따르며 고구려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에 북주의 잔존 세력을 규합한 우문도웅이 돌궐과 연합하여 북주를 재건할 땅을 찾으니.

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고구려가 됨은 당연한 일로, 동과 서로 분열된 돌궐 역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중원보다 고구려 땅을 택하여 전쟁은 필연이었다.

수의 문제(양견)는 공손성과 영주 총관부로부터 북방의 움직임을 보고 받으며, 우문도웅과 고구려의 전쟁을 내심 바라며 전면전으로 인하여 양측의 힘이 함께 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얽히고설키며 각 세력이 뭉치고 배신하는 혼탁함의 중심인 수의 영주 총관부를 온달 일행은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 * *

요하를 건너 요택의 질척한 습지를 지나며, 말과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갈 무렵.

영주 총관부가 눈에 들어왔으나, 쉬기 위하여 들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직, 고구려와 수가 표면적으로는 적대관계가 아니었으나, 영주 총관부에서 온달 일행을 결코 반기지 않을 뿐더러 어떤 세력에게 암습을 받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주 총관부를 지나 며칠을 더 서쪽으로 이동하자, 누런 모래가 휘날리며 얼굴을 때려왔고, 드문드문 풀이 난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불모지에 가까운 이곳은 수의 이간계로 돌궐이 둘로 나누어진 동돌궐의 세력지로 수의 양견에게 나라를 빼앗긴 북주의 잔존 세력이 동돌궐과 함께 힘을 기르고 있었다.

“여기서 더는 서로 갈 수가 없고 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초원이 나올 때쯤, 앞서 떠났던 이들이 하나둘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소매로 거세게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막으며 우랑이 말하고는 일행을 조심스레 북으로 인도하였다.

* * *

“우리가 온 방향은 거란과 돌궐은 물론이요. 수나라의 간자들에게도 노출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짙은 황사와 단단한 이 황야로 인하여 우리의 흔적이 사라질 것이오니, 안심하셔도 되시옵니다.”

요동성에서 곧장 북으로 올라가 흑룡강 하류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목적지인 홍산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온달 일행이 황야로 추방됨을 애써 노출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군요. 우리가 서로 갈지, 남으로 갈지, 혹은 북으로 가거나 되돌아 동으로 갈지 이곳에서는 예측하기 어렵겠군요. 헌데, 우리보다 앞서 떠난 이들이 있는가요?”

총명한 평강이 우랑의 말에 수긍하며 되물었다.

“서와 북, 동을 돌아 북과 서로 흩어져 떠난 이들이 있습니다. 상인으로 꾸미고, 승려로도 꾸미고, 사냥꾼으로도 꾸며 눈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들은 잘 모였을 것입니다.”

우랑의 설명에 온달이 놀라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모두 몇이나 됩니까?”

“이백이옵고 활과 양, 말을 이끌고 있습니다. 홍산에 적봉진을 세울 군사들로 부총관께서 사냥 대회 전에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아…….”

“또한 이후의 군마와 물자는 요동성에서 안시성에 보낸 후 이목을 끌지 않으며 몇 번에 걸쳐 오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랑이 차분히 답하자, 온달과 평강은 을지문덕의 치밀함에 감탄하였다.

우랑의 말대로 며칠 더 모래바람 속을 뚫고 북으로 오르니, 푸른 풀이 낮게 깔린 초원이 고원 위에 펼쳐지며 푸르고 드넓은 하늘이 한없이 이어져 땅과 맞닿고 있었다.

“사방 모두가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이로구나.”

고원에 올라 한없이 펼쳐진 초원에 감탄하며 건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울적하기만 했던 심사도 대해와 같은 초원에 압도되어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바다 같구먼유.”

일행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서 살았던 온동이 가장 적합한 비유를 하자, 건무가 돌아보며 웃음을 보였다.

“그렇구나. 실로 대해로구나!”

“온동 오빠, 바다가 이렇게 생겼어요?”

“물이 이렇게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게 바다여. 영아, 어떠냐? 참 좋지?”

어른도 지나오기 힘든 길을 온동과 독고영은 씩씩히 견뎌 내며 오히려 두 눈에 총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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