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을지문덕의 계획 (2)
건무와 온달은 동시에 무릎 꿇어 머리를 바닥에 대고 조아리며 명을 받았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국법이 지엄하나, 태왕 폐하께서 그대들의 충정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국외 추방을 명하노니, 날이 밝는 즉시 명을 받아 지정한 곳으로 떠나 그곳을 벗어나지 말지어다!”
“…….”
“또한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수나라인 팽무성은 이 왕자 건무 저하를 구한 공을 인정하여 국외 추방을 면하니, 이들을 제한 모든 일행은 온달과 건무 저하와 함께 지위 구분 없이 고구려를 떠나야 한다.”
추방을 알리는 을지문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건무와 온달은 동시에 머리를 바닥에 대고 명을 받들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온달, 명을 받드옵니다.”
이제 열여덟 나이의 건무는 국외 추방을 받아들이며 가슴 깊이 슬픔이 밀려와 끝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덩달아 강이식은 자신이 벌을 받은 듯 얼굴이 벌게져 을지문덕을 멍하니 바라보며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이런… 이런…….”
강이식의 탄식에도 태자 원은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담아 을지문덕에게 명을 내리었다.
“죄에 대한 합당한 처분을 받았으니, 부총관은 공도 살펴주시구려.”
을지문덕이 다시 허리 숙여 태자의 명을 받들었다.
“왕자 저하와 온달은 들으시오! 홍산에 적봉진을 세워 우리 고구려의 비밀 군사 기지로 이용할 것이니, 각기 총관과 부총관을 맡아 향후 닥쳐올 적의 공격에 맞서 선봉에 서시오.”
“…….”
“태왕께서 공식적인 직함을 내리실 수 없고, 오부 귀족 그 누구도 몰라야 할 것이며, 두 분은 국외 추방 중으로 알릴 것이니, 이점 유념하시기 바라오.”
을지문덕이 태자의 명을 받아 대신 하교를 내리니 건무와 온달은 얼떨결에 명을 받았고, 그제야 강이식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 * *
온달과 건무가 행장을 꾸리기 위해 물러나자, 강이식이 걱정스러운 듯 을지문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온달의 일행들도 모두 함께 이동해도 상관없는 것이오?”
“공주께옵서는 온달과 함께하시는 것이 오부 귀족들 눈을 속이기 쉬울 것이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제한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 온달을 따라가야 함께 죄를 물었다 여겨 의심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중원인도 섞여 있는데 괜찮겠소?”
여전히 강이식이 불안한 듯 되묻자, 을지문덕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독고 씨 오누이가 요동에 들어온 이래로 사람을 붙여 알아보니, 양견의 장인 독고신의 여섯째아들이 그들 오누이의 부친으로, 수의 독고황후가 그들의 고모가 되더군요.”
망우산에서 독고선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도적 떼에게 맞섰던 강이식은 그가 독고황후의 조카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 버벅거렸다.
“독고황후라 하셨소? 수의? 허면, 정보가 샐 수도 있지 않소?”
을지문덕은 여전히 침착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의 부친은 수의 양견이 북주의 황위를 찬탈할 때, 그 반대편에 서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수와는 불구대천 원수입니다.”
을지문덕의 설명을 듣고 보니, 또 다른 의문이 생긴 강이식이 재차 물었다.
“허면 북주의 잔존 세력과 결탁할 수도 있지 않소?”
이번에도 을지문덕은 차분히 답을 내었다.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조부 독고신은 우문 씨에게 역심을 품었다는 모함을 당해 스스로 자결하였기에, 독고 씨는 우문 씨와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연태조에게 몸을 의탁한 모용 씨 남매와 같은 처지이지요.”
을지문덕의 설명에 그제야 안심한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팽 장주는 어떻소?”
“제가 그의 부친과 평소 친분이 있어 오래전 팽장주의 상을 보았는데, 그는 성품이 신의를 중시하여 죽을지언정 온달을 배신해 입을 놀릴 위인이 아닙니다.”
“오호.”
“더구나 한족 출신으로 선비족인 북주 잔존 세력과 수의 황제 양견에게 충성을 바치진 않을 인물입니다. 탁현은 요충지로 훗날 수와 충돌 시 그의 도움이 필요하나, 제가 알아본 바로는 찾는 물건이 있고 팽가장을 꾸려야 하니, 온달 일행과 더는 함께하지 못할 듯합니다.”
술술 나오는 을지문덕의 답변에 강이식이 탄복하여 활짝 핀 얼굴로 말하였다.
“부총관은 어찌 그리도 막힘이 없소?”
“저들이 우리 고구려에 간자를 보내듯, 우리도 사방에 사람을 보내어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이제 남은 것은 거란과의 동맹을 굳건히 맺는 것이옵니다. 시일은 걸리겠으나, 다가올 전쟁에 거란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태왕이 태자 원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하였다.
“원아, 평강이 돌아오면 잘 돌봐야 하느니라.”
근처에 두고도 만나지 못한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마치, 이후에도 볼 수 없으리라 단정하듯 태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폐하께선 평강을 다시 볼 수 있으시오며, 소자 언제나 한결같이 건무와 평강을 아끼겠나이다.”
태자의 답변에 만족한 태왕이 강이식을 바라보며 명하였다.
“총관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통하여 적봉진에 병사와 물자를 공급하고 수시로 상황을 확인하기 바라오.”
을지문덕은 태왕과 강이식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며 곧 있을 평양성에서의 살육을 생각하며 바삐 머릿속을 정리하여 나갔다.
‘온달과 건무 저하는 평양성에서 뿌려질 피와 무관하겠구나. 폐하의 올바른 결정 덕에 그들이 공을 세우고 돌아올 때, 그들의 자리를 반대할 이들은 세상에 없을 것이야.’
* * *
고구려를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진 건무는 온달과도 말을 섞지 않고 홀로 숙소에 들어 떠날 채비를 하였다.
평강 일행이 머문 숙소에 온달이 들자, 모두가 기뻐하였다.
온달이 무사한 것에 안심한 팽무성은 을지문덕의 예상대로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를 되찾기 위해 서둘러 인사를 건넨 후 다시 만나길 바라며 떠났다.
아마도 외부인으로 고구려의 정쟁에 더 이상 휘말리는 것이 꺼려진 모양이었다.
“온달 대인, 함께하지 못함을 이해하여 주시오.”
온달도 그가 금강대도를 찾아야 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미 팽무성에게 큰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의 일은 함께하기 어려움을 알기에 붙잡지 못하고 반드시 다시 만나자 다짐하였다.
“팽장주님이 탁현에 계신지 누구나 알고 있으니, 이 온달 반드시 찾아가 뵙겠습니다. 부디,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를 찾기 바라겠습니다.”
을지문덕의 지시로 요동성 군사 누구도 팽무성의 앞길을 막지 않았고, 그가 금강대도를 찾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하였다.
남은 일행에게 온달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제한 모든 일행이 국외 추방을 명받아 내일 일찍 떠나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우랑님에게 이미 간략히 설명을 들었습니다만, 공을 세운 이에게 어찌 이리도 처분이 가혹한가요? 제가 폐하를 뵙고 사정해 보겠습니다.”
평강이 나서 말하자, 온달이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죄를 지어 추방을 당함 이외에 다른 뜻이 있는가 봅니다.”
“다른 뜻이오?”
사람 속일 줄 모르는 온달인지라, 독고선 남매가 이방인이지만 의심하지 않고 모든 일행들에게 자신과 건무가 홍산에 적봉진을 세우러 감을 설명하였다.
“이제 와 돌아갈 수 없죠. 나도 온달님을 따라 반드시 공을 세워 고향으로 갈 것이구먼요.”
막바우의 생각과 같은 경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왜인지 온달 일행이 염려스러운 해진은 이들을 돌보기 위해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구려에서마저 추방령을 받아 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는 독고선, 독고영 오누이의 선택은 온달을 따라 홍산으로 향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 외에 다른 수는 없었으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만이 물자와 군사를 비밀리 조달해야 하기에 아쉬운 표정으로 곧 있을 이별을 서운해 했다.
온달과 평강, 건무, 해진, 경우와 막바우, 독고선과 독고영 오누이 그리고 온동은 광활한 요동벌을 지나 북서쪽 멀리 떨어진 홍산까지의 여정에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랑이 홀로 이들의 숙소에 찾아와 길 안내를 시작하니, 누가 봐도 국외 추방당하는 몰골이 분명하였다.
우랑이 앞서고 온달 일행이 찬 이슬 맞으며 요동성을 떠나는 모습에 성문을 지키는 병사 십여 명만 안타까워 배웅할 뿐이었다.
요동성에서 몽고인들의 초원에 자리한 홍산까지는 수의 대고구려 전초기지인 영주 총관을 지나, 거란 세력을 통과하고, 돌궐의 지배를 받는 황야에서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 험하고 먼 길이었다.
을지문덕의 명을 받은 우랑이 홀로 일행의 길 안내를 맡으며 다른 수행원 하나 없는 여정이었기에, 희망을 품고 사냥 대회로 향하던 날과는 크게 달랐다.
“어머님은, 총관께서 살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온달의 마음을 헤아려 평강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제야 온달은 자신의 표정이 어두워 다른 이들까지 불안하게 함을 깨닫고 예의 순박하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당신이 있어 참 좋소.”
* * *
북주의 간자 장 씨 삼 형제는 을지문덕의 명에 따라 은밀히 요동성 관아로 옮겨져 하옥되었다.
지하와 지상으로 나누어진 전옥소의 지상에는 이미 망우산 도적 떼가 하옥된 상태였고, 이들 장 씨 삼 형제는 어둡고 습한 지하 감옥에 가두어졌다.
“형님, 우리를 잡범들처럼 옥에 가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둘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장 첫째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답하였다.
“더 물을 것이 없단 뜻이다.”
그의 말대로 심문할 것이 남아 있고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면 총관부에 남겼을 것이 분명하였다.
“하오면…….”
“우린 곧 처형될 것이다.”
“아니, 심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처형한다 말입니까? 어찌 그런…….”
“둘째야, 심문하면 답할 생각이었느냐? 어차피 간자는 적에게 잡힐 시, 답해도 죽고 아니 하여도 죽을 운명이니라.”
“아니, 그래도 어찌 이리도 빨리…….”
장 둘째가 허탈해하며 목소리를 높이자, 장 셋째가 손가락을 들어 소리를 낮추라 신호를 보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쉿, 둘째 형님, 저기 누가 있습니다.”
장 셋째가 가리킨 맞은편 옥에 머리가 하얀 중늙은이가 귀신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누가 있으면 어떠냐. 어차피 저놈도 죽을 것을…….”
장 둘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흔들리는 횃불에 의지하여 장 첫째가 건너편 옥의 중늙은이를 천천히 살펴보며 조용히 물었다.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가?”
장 첫째의 물음에 중늙은이가 입을 열자,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이 어두운 옥 안에 울렸다.
“시끄럽게 떠드니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지 않은가? 간자질하다 잡혀 온 것이로군. 곧 죽겠지.”
“뭐? 간자질? 그래 네놈은 뭐하다 잡혀 온 것이더냐?”
간자질하다가 잡혀 온 것이 맞음에도 장 둘째가 공연히 화를 내며 중늙은이에게 물었다.
“나? 나는 산적질하다가 잡혀 왔지. 나도 곧 죽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떠들어도 된다. 네놈들 이야기 들어봐야 알려 줄 곳도 없다.”
중늙은이의 말에 장 첫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산적질이라… 망우산 도적 떼가 잡혀 왔다더니, 네놈이 괴수인가 보군. 그래 자네를 처형한다 하던가?”
건너편 옥의 중늙은이는 망우산 도적 떼 두령 기 씨 사 형제의 맏이 기악이었다.
“지하에 갇히면 참형된다는 뜻이라 하네. 언제 처형할지는 모르나 아마도 일의 편의상 그대들과 함께 참형하지 않겠는가? 곧 목이 떨어질 신세라 매끼 밥은 꼬박꼬박 주니, 편히들 지내게.”
여기까지 말한 기악은 두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댄 채 마음 편히 쉬었다.
‘분명, 영리한 막내 훈이가 뭔 수를 낼 것이야. 밥 든든히 먹고 몸을 만들며 기다려야, 한 걸음이라도 빨리 달릴 수 있다. 헌데, 이 옥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옥에 갇혔음에도 반드시 동생들이 구할 것이라 믿는 기악은 벌써부터 갈 곳을 생각해 보았으나, 세상 어디도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