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영웅 기개 (6)
강이식은 우연순이 미리 배치한 사내들을 경계하며 태왕의 앞에 서서 언덕 아래를 향해 크게 외쳤다.
“목원의의 사병들은 모두 무릎 꿇고 태왕 폐하의 명을 기다리거라!”
목원의 부자의 목에 칼이 겨누어진 상황에 강이식의 호통마저 더해지자, 언덕 아래 도열한 목원의의 사병들은 총관부 정병들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신 태대형 목원의 단 한 번도 불충한 마음 지닌 일 없이 이날까지 살아왔사옵니다. 소신은 저자들을 모르오며 이는 모함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목원의가 태왕에게 소리쳐 애원하자, 우연순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놈! 목원의! 네놈이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사병을 집결시켰느냐? 이는 모반을 꾀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더구나 너는 외적과 내통한 연태조와 만난 후 요동성과 신성에 각기 일천의 병사를 집결시키고 사냥 대회에도 일천의 병사를 끌고 참관했지 않느냐.”
“뭐라… 이놈! 우가야! 감히 나를 모함하느냐?”
“모함? 네놈이 정변을 일으키려 함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너는 수하들을 시켜 이 왕자 건무 저하를 암습하였고, 여기 증자가 있는데도 발뺌을 하려느냐?”
“그러는 너는 어찌하여 태왕 폐하를 모시는 곳에 무장한 사병을 준비해 둔 것이더냐?”
목원의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사내들을 가리키며 호통을 치고는 태왕을 향해 읍소하였다.
“폐하, 소신 목원의 군사를 준비한 것은 역심을 품은 간악한 무리가 이와 같은 일을 벌일 것을 염려하여 행한 일이옵니다.”
“…….”
“우연순 저자는 연태조가 정혁을 의미하는 불충한 장기를 두고자 제안한 것을 폐하께 고변하지 않은 자이옵니다. 저자의 간교한 세 치 혀를 믿지 마시옵소서!”
“닥치거라! 폐하, 외적과 내통하여 역심을 품은 간악한 무리를 모두 참하셔야 하옵니다.”
태왕의 앞을 지키는 강이식과 을지문덕은 우연순이 몰래 배치한 사내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그들이 지닌 검의 모양새가 기이함을 깨달았다.
“총관, 저 검은 중원의 암살검이오.”
을지문덕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으나, 이 소리는 태왕과 태자에게도 전해졌다.
“중원의 암살검이라 했는가?”
태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게 을지문덕이 몸을 돌려 답하려는 순간, 언덕 아래에서 이 왕자 건무가 뚜벅뚜벅 걸어 오르며 대신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곰 가죽을 두른 사내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모용설의 예언을 떠올린 목원의는 건무의 등장에 기가 질려 할 말을 잃고 길게 탄식하였다.
“어찌하여…….”
억울하게도 누구나 그가 건무의 목숨을 노렸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모양새였다.
이어서 건무의 뒤로 팽무성이 계부방을 결박하여 어깨에 걸쳐 메고 오르자, 우연순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아니, 어찌하여…….”
우연순의 이 탄식 또한 듣는 이로 하여금 의구심을 지니게 하였다.
“태대사자, 이자가 그대의 책사 계부방이 맞소? 내가 듣기로 이 계부방은 그 옛날 후연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민 국상 계연수의 후손이라 하더이다. 이 역시도 맞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 왕자 건무가 태대사자 우연순에게 질문을 건넸고, 우연순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무릎 꿇은 연태조가 고개 들어 태왕을 바라보며 크게 아뢰었다.
“폐하! 약조한 시간이옵니다. 소신 연태조, 폐하의 명을 받들어 외적을 맞아 큰 전쟁을 치르기 전, 내부의 간적들을 모두 밝혀내었나이다.”
태왕은 연태조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게 연태조 저자가 약조한 것은 분명하나, 그가 저들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분명치 않구나.’
이때, 대대로 대실호연이 급히 나서 태왕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폐하, 소신 대대로 대실호연 아뢰나이다. 연태조는 소신을 찾아와 간적들을 속여 그들이 스스로 몸을 드러내게 하겠다 말한 바 있사오며, 그 계책이 궁에 왕을 대신하여 차를 두는 장기로 스스로 불충한 생각을 품은 듯 행동하여 역당들의 의중을 떠보겠다 하였나이다.”
“…….”
“충심을 지닌 자들이라면 즉시 연태조를 고변하여, 연태조가 역심을 품었다는 죄를 쓰고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오로지 폐하와 고구려를 위한 충정으로 행한 일이옵니다.”
대실호연은 계속해서 아뢰었다.
“이는 거짓 투항하여 조조의 백만 대군을 막은 오나라 정수 황개의 고육지계와 비견되는 영웅 기개이오니, 부디 해량하여 그를 치하하여 주시옵소서.”
대실호연의 이 말에 태왕이 살며시 고개 돌려 을지문덕을 바라보니, 을지문덕이 조용히 머리 숙여 말을 대신하였다.
“연태조는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라. 그대의 공은 다음에 따로 듣겠노라.”
태왕의 명에 연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직도 칼을 겨누고 있는 사내들이 우연순을 바라보며 명을 기다렸다.
“무엄하다! 당장 칼을 거두거라!”
이에 강이식이 크게 호통을 치며 몸을 날려 낭아봉을 휘두르니, 사내들의 몸이 허공에 뜨며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연태조에게 칼을 겨눈 사내들을 제압한 강이식이 목원의 부자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사내들을 노려보자, 겁에 질린 사내들이 칼을 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산동의 악명 높은 살수, 형제단도 강이식의 낭아봉에 기가 질린 것이다.
강이식 한 명조차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 세운 허망한 계획이었다.
이때, 천지분간 못하는 목충이 제 성격을 못 이겨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우연순을 향해 내달리며 외쳤다.
“어찌하여 일을 벌여 우리 앞길을 막느냐!”
목충이 휘두른 칼에 우연순은 답도 내지 못하고 즉사하였고, 목충은 이 기세를 살려 대실호연마저 칼로 베려 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온달이 목충을 제압하기 위해 몸을 날려 운철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목충이 급히 칼을 들어 막아 보았으나, 바위도 부술 온달의 운철 대검에 의해 허무하게 칼이 부러지며 그의 두개골마저 으깨지고 말았다.
목충의 성미가 스스로 죽음을 찾은 셈이다.
“충아!”
아들의 허망한 죽음에 목원의가 분노해 일어나며 언덕 아래 자신의 사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쓸어 버려라! 내 아들 목충의 원한을 갚고, 이 고 씨 일족을 찢어 죽이거라!”
그의 외침에도 이미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목원의의 사병들은 총관부 정병 앞에 무릎 꿇고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분개한 건무가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어 손날로 목을 치니, 목원의의 늙은 몸뚱이가 맥없이 쓰러졌다.
건무와 온달은 이들 목원의 부자의 목숨을 끊을 의도가 아닌 단지 막기 위해 바삐 몸을 놀린 것이었으나, 이들의 명은 여기까지인 듯 허망하게 절명하였다.
우연순은 목충에게, 목충은 온달에게, 목원의는 곰 가죽을 두른 건무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며 모용설의 예언이 맞아떨어지자, 연태조는 의아한 시선으로 대실호연을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이자는 살게 된 것인가? 그리고 이자는 어이하여 내가 하지도 않은 말로 태왕께 나를 두둔한 것인가?’
연태조는 사전에 대실호연과 상의한 바가 없기에,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폐하 앞에서 감히 검을 휘두른 저 온달이란 자를 당장 추포하거라!”
이때 을지문덕이 추상같은 호령을 하니, 총관부의 정병들이 언덕을 뛰어 올라왔다.
* * *
온달을 추포하란 을지문덕의 외침은 오부 귀족들마저 놀라게 하였다.
군권을 쥔 대장군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성품이 유순한 고강이 상급자로서 나서지 않을 수 없어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부총관! 어찌 이러시오?”
을지문덕은 낙랑 사냥 대회에 우승하고도 고구려의 전설적 명재상 을파소의 후손이란 이유로 그의 재능을 시기한 오부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는 태왕에게 관직을 받지 못한 채 오랜 친구 강이식을 찾아가 서부총관부에서 강이식을 보좌하며 부총관이란 직위를 얻었으나, 이 직위는 태왕이 내린 관직도 아니었고, 오부 귀족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던 차였다.
그런 을지문덕을 계루부의 대가이며 고구려의 군권을 쥔 대장군 고강이 부총관이라 부를뿐더러 존대마저 하는데도, 태대형과 태대사자의 목에서 흩날리는 피에 질린 오부 귀족들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어 을지문덕의 부총관 지위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오늘 누가 더 죽는다 하여도 이상할 것 없는 날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목을 간수하기 바빴던 것이다.
“태왕 폐하의 호위를 담당하는 서부총관의 정병 이외에 그 누구도 이 자리에서 감히 검을 빼어 들지 못합니다. 사냥 대회는 폐하를 모시고 짐승으로 적을 대신하여 군사 훈련을 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자리입니다.”
“음…….”
“이는 곧 폐하가 친정하신 전장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온달과 왕자 저하는 군령을 어기고 검을 휘둘렀으니, 군법으로 다스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무엇 하느냐! 왕자 저하도 추포하거라!”
을지문덕이 한술 더 떠 건무마저 추포하라 명을 내리자, 고강은 자신이 대장군이란 지위마저 까맣게 잊고 한발 물러서야 했다.
“왕자 저하와 온달은 외적과 내통한 간적들의 목을 베고 역심을 품은 자들을 추포하였소. 부총관은 너그러이 생각하시기 바라오.”
이번에는 대대로 대실호연이 나서서 을지문덕에게 사정하고는 태왕을 향해 읍하며 아뢰었다.
“폐하, 왕자 저하와 온달은 폐하의 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간악한 무리를 벌하였습니다. 이는 공이 크고 과오는 적으니 상을 내리심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대실호연이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여러 사람을 두둔하고 나서자, 을지문덕의 눈빛에 순간 웃음기가 돌았다.
조용히 대실호연의 말을 듣던 태왕이 무겁게 입을 열어 엄히 물었다.
“대대로의 생각이 오부 귀족 전체의 생각인가?”
태왕의 물음에 대실호연이 살며시 고개 돌려 주위 귀족들의 안색을 살피니, 모두가 제 살 궁리에 바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답하지 못하는가?”
태왕이 되물었으나, 대장군 고강마저 고개 숙여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 세가 약한 대실호연은 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태왕은 그런 대실호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손을 들어 이미 절명해 바닥에 널브러진 목원의와 우연순을 가리켰다.
“대대로, 그대는 어찌 저들 중에 외적과 내통한 이가 있다고 단정하는가? 저들이 역심을 품었다는 것은 미뤄 짐작할 수 있으나, 누가 외적과 내통한 간적인지는 아직 확증은 없지 않은가?”
“…….”
“태대형과 태대사자는 죽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다 죽었는데, 그대가 보기에 태대형과 태대사자 중 누가 외적과 내통했다고 생각하는가?”
태왕의 이 물음은 많은 뜻을 담고 있어 아직도 자신들의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용상이 가만히 연태조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혀 하나 잘못 놀리면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연태조가 소리 죽여 말하고는 더욱 자세를 낮춰 엎드렸다.
그가 보기에 평원 태왕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달리 살기가 돌았고, 총관부의 정병들은 마치 대기하였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왕은 북주 잔존 세력과 결탁한 이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단정 내린 것이다.’
연태조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오늘따라 열심히 다른 이를 두둔하는 대실호연과 고강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태왕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을지문덕은 더없이 지혜롭다. 분명 이 행동에는 다분히 의도가 담겨 있다.’
누구도 답을 내지 않자, 태왕의 곁에 앉아 있던 태자 원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고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폐하, 역심을 품은 무리를 모두 소탕하였는지 알 수 없으며, 외적과 내통한 간적 무리 역시 모두 뿌리를 뽑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온달과 건무는 감히 지엄한 군령을 어겼으니, 총관부에 가둔 후 공과를 살피시옵고, 오늘의 사냥 대회는 마치시어 행차를 돌리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태자마저 아직 더 피를 볼 것을 은연중 언급하자, 오부 귀족들은 몸이 떨려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부총관 강이식에게 시선을 옮기자, 낭아봉을 굳게 쥔 강이식이 앞으로 나오며 크게 호령하였다.
“목원의 부자와 우연순의 시신을 수습하고, 간적들의 사병들 또한 모두 포박하여 총관부로 압송하거라!”
강이식의 위세에 눌린 오부 귀족들 앞으로 총관부의 정병들이 달려와 목원의 부자와 우연순의 시신을 거적때기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짊어졌다.
귀족들 한 명, 한 명 일부러 눈을 마주하며 살핀 강이식이 몸을 돌려 다소곳이 태왕을 바라보며 아뢰었다.
“폐하, 온달과 왕자 저하를 총관부로 뫼시어 두 분의 공과는 폐하의 뜻을 기다리겠나이다.”
온달과 건무는 총관부의 정병들이 자신들을 단단히 결박함에도 조금의 억울함이나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고 묵묵히 처분을 받았다.
온달은 을지문덕이 이야기한 군령의 지엄함을 수긍하였고, 건무는 평소 자애롭던 태왕과 태자의 냉정한 표정에 기가 질려 자신을 버렸다 생각해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날의 사냥 대회에서 온달이 잡은 짐승의 수가 많고, 효시로 몰이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누구보다 돋보여 태왕을 기쁘게 하였으나, 사냥 대회는 이렇듯 마무리되어 그 어떤 관직과 상도 받지 못하였다.
을지문덕은 포승줄에 묶인 온달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내심 생각하였다.
‘온달의 상에 인복이 많으나, 애석하게도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