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영웅 기개 (4)
온달이 운철 대검으로 앞서 달려드는 사내와 검을 맞대고 살피니, 사내의 검은 검신이 무척 얇고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검의 손잡이와 이어진 검신은 두 치 정도에서부터 검면이 비고 양옆으로 검날만 있었다.
온달은 이토록 얇고 검면이 빈 검이 운철 대검과 부딪치고도 검날조차 상하지 않음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온달은 검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사내를 왼발로 밀어버리고는 다른 사내들이 건무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운철 대검을 크게 가로로 베어 거리를 두었다.
“작정하고 온 놈들이네. 온달, 자네 혼자서는 상대하기 어려울 거야.”
자신의 앞을 지키는 온달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옆으로 불러들이며 건무가 말하였다.
온달의 기세에 밀렸던 사내들이 다시 일제히 검을 빼 들고 건무와 온달의 급소를 제각각 노리며 빠르게 덤볐다.
온달과 건무는 더 이상 대화 나눌 여력 없이 사내들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사내들의 검은 무척 가볍고 빨랐다.
세 방향에서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이미 어깨에 화살을 맞아 검을 다루기 어려운 건무로서는 간신히 피하기에도 급급했다.
간신히 사내들의 검을 막아 내며 옆을 보니, 온달이 육중한 운철 대검을 가볍게 놀리며 사내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데 검술의 기본은 부족하지만 타고난 신력 자체가 뛰어나 조금도 밀리지 않아 보였다.
“훌륭하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어깨의 고통을 참은 건무도 힘을 내어 사내들을 대적했다.
그러니, 조금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사내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얍!”
온달이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운철 대검으로 내리치자, 바위도 부술 괴력으로 사내의 검을 일그러뜨린 후 그대로 방향을 틀어 당황한 사내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날이 서지 않은 온달의 운철 대검에 맞은 사내는 흉곽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두어 장 뒤로 날아가 쓰러졌다.
온달은 이 기세를 몰아 나머지 두 사내를 향해 운철 대검을 휘두르니, 구 척이 넘는 운철 대검의 길이에 밀린 사내들이 뒤로 거리를 두었다.
온달은 이를 놓치지 않고 왼편의 사내를 향해 머리 위로 운철 대검을 높이 들어 일자로 내리쳤다.
그러자 감히 맞서던 사내는 자신의 검과 함께 머리가 박살 나 일격에 즉사하였다.
우두머리가 남은 사내를 도와 온달에게 달려들자, 이번엔 온달도 기세를 올려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며 운철 대검을 휘둘렀고, 우두머리는 감히 온달과 검도 맞대지 못하며 간신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온달은 허공에서 운철 대검의 방향을 바꾸어 남은 사내의 머리를 노려 내리쳤고 이번에도 온달의 운철 대검을 막아내려던 사내의 검은 속절없이 부러지며 사내는 그대로 두개골이 박살 나 쓰러졌다.
“괴력이다.”
눈치 빠른 우두머리가 중얼거리며, 왼손을 들어 온달을 가리켰다.
그러자 소매에서 바람이 일더니, 손등에서 날카로운 비수 세 개가 온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딜 감히!”
갑자기 팽무성이 날아들며 쇠 종 치듯 크게 소리 지르고는 온달과 우두머리 사이로 불쑥 뛰어들더니 왼손을 펴고 휘저었다.
그러자 우두머리가 날린 세 자루의 비수가 모두 바람에 휩싸여 팽무성의 손에 들어갔다,
이어서 양만춘과 막바우가 급히 달려와 건무를 공격하는 사내들에게 덤비니, 어깨에 상처 입은 건무 하나에게도 밀리던 사내들은 기가 꺾여 도망칠 궁리만 하다가 건무에게 목이 베이고 양만춘에게 제압당하며 막바우의 창질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나 남은 우두머리는 갑작스레 뛰어든 팽무성의 신기에 이미 기가 질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급히 발을 구르자,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땅이 일어나며 흙먼지가 날리고 누런 유황이 퍼져 시야를 가리었다.
“유황이오! 모두 숨을 참고 뒤로 물러서십시오!”
팽무성의 외침에 일제히 유황을 피해 몸을 피하였고, 연기가 걷힐 무렵엔 우두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연기… 누런 연기는 멀리서도 보이겠지?”
푸르디푸른 하늘까지 누런 유황 연기가 피어오르자 건무가 중얼거렸다.
“때맞춰 오시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온달이 양만춘에게 미소 지으며 묻자, 양만춘이 막바우를 가리키며 답하였다.
“온달님이 잡은 노루는 왕자님의 수행원들이 대신 나른다 하여 맡기고 두 분을 찾아 숲으로 들어와 두 분을 찾았지요. 숲에 들어오자마자 막바우 이 친구가 신통하게도 이곳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는 쇳소리가 들린다 하여 급히 달려왔습니다.”
양만춘이 설명하는 동안 팽무성이 급히 건무가 걸친 범 가죽을 벗기고 어깨를 지혈하였다.
상처를 치료한 건무가 몸을 세우자, 양만춘과 막바우가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아니요, 됐소. 이런 사냥 대회에서 예를 표하면 끝도 없소.”
건무의 말대로 사냥에 참여한 장사들과 수행원은 사냥이 끝날 때까지 지위 고하에 따른 예를 표하지 않았고,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한 놈은 놓친 듯하구나. 그놈이 우두머리 같던데 아쉽구나. 누가 이런 쓸데없는 일을 꾸몄는지 캐어야 할 터인데.”
건무는 작정하고 달려든 살수들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한 것보다 우두머리가 보이지 않음을 더 애석히 여겼다.
태왕의 자리를 계승할 처지도 못 되는 자신을 누구도 사냥 대회에서 노릴 이유가 없음을 아는 건무인지라, 이 뒤에 숨은 세력의 의도가 궁금했으리라.
이때, 팽무성이 건무에게 다가와 우두머리가 날린 세 자루의 비수를 바치며 말하였다.
“형제단이옵니다.”
“형제단? 형제단이라 하였는가? 그들이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비수를 받아 들여다보며 건무가 묻자, 팽무성이 차분히 답하였다.
“소문으로만 들었으나, 산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살수들로 정확한 명칭은 누구도 모르고, 그들이 서로를 형제라 부른다 하여 세인들이 그들을 형제단이라 칭한다 합니다. 이렇듯 검면이 빈 암살검과 비수를 그들이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산동이라… 역시 중국인이구나. 헌데 그대는 누구인가?”
팽무성에게서도 한족 특유의 성조가 느껴진 건무가 묻자, 온달이 대신하여 답했다.
“중원 무림의 검술 명가, 하북 팽가장의 팽무성 장주이십니다.”
하북 팽가장에 관한 명성과 그들의 성품을 익히 들은 건무인지라 웃으며 치하하였다.
“위명이 자자한 팽 장주구나. 그래, 고맙소. 헌데 그대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인가?”
“사냥 대회를 돕고자 온달님을 수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당당하면서도 거짓 없어 보이는 팽무성의 눈빛이 마음에 든 건무는 껄껄 웃으며, 온달에게 다른 이들의 소개도 부탁하였다.
“이분은 총명하고 용맹하신 안시성의 젊은 성주 양만춘이옵고, 이 단단한 사내는 힘이 장사에다가 현명한 막바우란 사내이옵니다.”
“오호.”
“이 둘과 저는 미친 곰을 잡고, 이리 떼를 쫓으며 도적 떼를 함께 토벌한 사이로 식견과 능력이 부족한 저를 사냥 대회까지 오게 도운 고마운 분들이옵니다. 생각건대, 이 둘은 장차 고구려와 태왕 폐하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믿사옵니다.”
온달이 양만춘과 막바우를 성심껏 이 왕자 건무에게 소개하자, 건무가 흡족해 환히 웃으며 치하했다.
양만춘과 막바우는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그때, 유황 연기를 뚫고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선두에 선 사내의 손에 우두머리의 목이 베어져 들려 있었다.
* * *
“왕자 저하 무탈하시온지요?”
우두머리의 머리를 손에 쥔 사내가 건무의 앞에 서서 공손히 예를 표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내가 손에 쥔 머리가 자신을 습격한 형제단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본 건무가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소인 계부방이라 하오며, 태대사자 어른을 모시고 있사옵니다. 이번 사냥 대회에 참여하여 몰이를 하던 중, 숲속에서 불길한 연기가 피어올라 급히 수하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마침 소인이 도망치던 이자를 발견하여 목을 베어 가져왔나이다.”
“그러한가? 애썼네.”
건무는 계부방이 태대사자 우연순의 사람이란 소리에 아무 의심 없이 대하였다.
이는 아마도 살수들의 공격이 더 있을지 모를 상황에 지원군이 도착하여 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놈들은 중원에서 온 살수들로 생각되네. 마침 잘 왔네.”
건무가 바닥에 쓰러진 살수들을 가리켰다.
겨우 목숨이 붙은 살수 둘이 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고는 자신들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계부방을 올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들이 나를 노렸다면 태왕 폐하와 태자 전하도 노릴지 모른다. 저 두 놈을 포박하여 태왕 폐하께 간다. 준비하라!”
건무의 호령에 계부방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고는 손짓으로 수하들에게 살수 둘을 포박하라 지시하였다.
포승줄을 쥐고 앞으로 나온 사내들 앞을 막아서며 막바우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머뭇거리는 사내들에게서 막바우가 강제로 포승줄을 뺏고는 살수 둘을 단단히 결박했다.
막바우는 그것도 부족한지 발목마저 묶고는 또다시 살수 둘을 줄로 엮어 버렸다.
“마침 사람 수가 많으니, 하나를 넷이서 머리와 다리를 잡고 가시죠.”
막바우의 말대로 할 경우, 여덟 명의 사내가 호송하는데 필요해진다.
“아니, 그렇게까지?”
계부방이 적잖이 당황하여 막바우의 의도를 물었다.
우랑에게서 받은 창을 단단히 쥔 막바우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꾸하였다.
“만일 주변에 살수가 많이 있다면 또다시 왕자님을 노릴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왕자님을 노리기 어렵다면 이놈들 목숨을 노리지 않겠습니까? 이놈들의 목숨도 태왕 폐하 앞까지는 왕자님 목숨만큼 중요하오.”
“무엄하다! 이놈! 감히 뉘 앞이라 망발하느냐?”
계부방이 노하여 엄히 꾸짖으며 칼집에 손을 대었으나, 막바우는 오히려 창을 더욱 단단히 쥐고 우뚝 서서 되받았다.
“당신이 더 무엄하오! 어찌 감히 왕자 저하 앞에서 호통이오? 그대가 왕자 저하보다 윗선이오?”
막바우의 쩌렁쩌렁한 호통에 할 말 잃은 계부방을 대신하여 양만춘이 나서며 조곤조곤 막바우를 다독였다.
“이 사람 막바우, 자네도 왕자 저하 앞에서 왜 이리 언성을 높이는가? 태대사자의 측근으로 보이니, 너무 심하게 하지 말게나.”
양만춘이 좋은 말로 타일러도 막바우는 여전히 부리부리한 범의 눈으로 계부방 일행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막바우가 사람을 의심할 때는 이유가 있다.’
온달은 일전에 막바우가 양만춘과 경우를 사냥꾼이 아니라 대번에 파악한 것을 떠올리며, 계부방 일행을 천천히 살폈다.
하지만 그는 도통 의심스러운 점을 찾지 못했다.
“계부방이라 했는가? 여기 창을 든 장사는 내 누이 평강의 부군인 온달의 측근일세.”
“네.”
“그대가 태대사자의 측근이듯 말일세. 모두 나를 위하고 태왕 폐하를 생각하여 하는 행동일 테니, 다투지 말고 그의 말대로 넷이 하나를 짊어지고 가시게.”
이 왕자 건무가 막바우와 계부방을 번갈아 보며 좋은 말로 명하자, 모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내가 매듭을 만들어 놨으니, 그 매듭에 손을 넣고 당겨 쥐면 들어서 이송하기 쉬울 것이오.”
살수들을 들려는 사내들에게 막바우가 미리 만들어 둔 매듭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사내들이 보니 살수들의 다리에 두 개, 어깨에 두 개의 매듭이 있어 손을 넣고 당기니 촥 감기는 것이 들고 달려도 풀리지 않을 듯 잘 만들어져 있었다.
“언제 이런 것을?”
사내들이 막바우의 재주에 감탄하며 살수들을 들고 걷자, 온달 일행도 건무를 호위하며 뒤를 따랐다.
“헌데, 궁금한 것이 있소.”
앞서 걷는 계부방에게 막바우가 심드렁히 말을 건넸다.
“무엇인가?”
한 눈에도 신분이 낮아 보이는 막바우인지라, 계부방은 당연스럽게 하대하였다.
“이상하지 않소? 왕자님의 수행인 다섯이 인심 좋게 우리 온달님께서 잡은 노루까지 짊어지고 옮긴다고 하여, 우리가 이 숲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고, 그 통에 왕자님의 수하들은 여기 없는 것이고.”
막바우는 유독 다섯 명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건무가 자신이 잡은 노루의 일부를 온달이 잡은 것으로 하라 명하여, 그의 수행인들이 일부러 온달 것까지 옮긴다고 자처한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건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막바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헌데? 무엇이 문제더냐?”
계부방이 자신의 뒤를 따르며 신경을 긁는 막바우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뭐가 문제냐면 말이야. 어찌 왕자님보다 당신의 수행인이 더 많냐? 이 말이요! 보아하니, 잡은 노루도 없구먼. 스무 명이나 되는 수행인들로 범이라도 잡을 생각이었소? 아니면 다른?”
막바우의 비아냥에 계부방이 살수들을 이송하는 자신의 수행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의도치 않게 여덟 명이나 되는 수하들의 손이 묶인 상태였다.
‘이런…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