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영웅 기개 (2)
자신에게 말을 건 사내의 정체가 이 왕자 건무란 사실에 온달이 놀라 황망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하려 했다.
그러자 건무가 말에서 뛰어 내려 온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온달은 건무가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세웠지만, 그 힘이 대단하여 크게 놀랐다.
“어서 말에 오르시게. 곧 사냥 대회가 시작이니, 준비해야 하지 않은가. 내 누이동생 평강이 자네의 처가 되었으니, 나를 형님이라 불러야 하네.”
“…….”
“자네가 나보다 십여 살 많다고 손윗사람인 나를 업수이 여기면 안 된다네. 하하하.”
시원시원하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건무의 태도에 온달은 감격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소인이 어찌…….”
“소인은 무슨 거인이면서, 하하하.”
건무의 웃음이 맑고 푸른 하늘 위까지 오를 듯 청량해 멀리서 두 사내의 만남을 지켜보던 평강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온달, 오늘 이 형님이 자네를 이 대회 우승자로 만들어 태왕께서 대형 자리를 내리시도록 할 터이니, 자네는 이 형님의 뒤만 잘 따르시게나. 하하하.”
애써 사냥 대회를 참가할 필요 없는 건무였지만,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온 것은 오직 온달을 도와 그와 누이동생 평강의 혼례를 태왕은 물론이요.
오부 귀족들에게 인정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나저나 이 누런 말은 참으로 대단하군.”
비쩍 마른 누렁이가 거대한 운철 대검을 등에 메고 온달마저 태웠으니 건무가 놀랄 만도 하였다.
“고생이 많지요.”
온달이 누령이의 목을 쓰다듬으며 돌려 칭찬하였다.
건무가 온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온달이 준비한 철궁과 효시를 알아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헌데, 온달 자네 화살집의 살은 효시들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왕자 저하.”
“형님이라 부르라니까. 효시라… 평강의 수로군. 좋아! 내가 말하면 살을 날리시게.”
온달이 설명하지 않아도 건무는 철궁과 효시의 쓰임새를 이미 파악한 것이다.
아침 햇살이 따사로워지자, 마침내 태왕이 손을 들어 올렸고 기다리던 나팔 소리가 일제히 울리며, 낙랑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건무는 나팔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달리는 말들 속에서, 온달이 내달리지 못하게 누렁이의 고삐를 쥐더니 소리쳤다.
“살을 날리시게!”
건무와 온달만이 여전히 말을 달리지 않자, 태왕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온달은 건무의 말을 이해하여 철궁에 살을 먹이고는 팽팽히 시위를 당겼다.
“좋구나! 좋아! 역시 듣던 대로 신력이로세!”
일부러 건무가 더욱 소리 높여 외쳤고, 말 달리던 장수들마저 고개 돌려 온달을 주시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철궁에서 효시가 날며 매의 울음으로 하늘을 갈랐다.
쐐애액—
효시가 머리 위를 지나자, 훈련이 덜 된 말 몇 마리가 놀라 다리를 들었고, 풀숲에서 꿩과 작은 새들이 일제히 솟구쳐 반대 방향으로 날았다.
효시는 점점 멀리 나르며 긴 울음을 남겼는데, 멀리 노루 떼가 솟구치며 내달리는 소리마저 더해져 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와! 벌판 끝까지 나른다!”
“온달의 활이 제일이다!”
온달이 날린 효시는 일천 보 이상 나르며 보는 이에게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사전에 강이식과 을지문덕의 지시를 받은 서부총관부의 정병들이 이에 호응하여 환호성을 지르며 모든 장사 중 온달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이제 우리도 달리세! 가세!”
온달이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앞서 말을 달렸고, 그 뒤를 건무가 따르며 소리쳤다.
“온달! 말 달리며 한 발 더 날리시게나! 누가 이 사냥 대회의 주인인지 모두에게 보여주시게!”
건무의 격려로 힘을 받은 온달이 난생처음 말을 달리며 철궁의 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체구가 당당한 온달이 크고 시커먼 철궁을 말 위에서 당기는 모습은 모두의 기를 질리게 했다.
이 모습에 강이식의 지시를 따라 서부총관부 정병들이 더욱 환호하며 응원하였다.
“온달이 철궁을 당긴다!”
“무쇠로 만든 시커먼 철궁을 당긴다!”
쐐애액—
또다시 효시가 하늘을 가르며 매의 긴 울음을 울었고, 그 기세에 눌린 말들 사이를 온달의 누렁이가 빠르게 뚫고 지나고 있었다.
온달의 철궁이 날린 효시는 여전히 나르며 그 어떤 전장의 효시보다 크게 울며 곧게 뻗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굉음을 일으켜 듣는 모든 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 * *
나팔이 울리고 사냥 대회가 시작되자, 온달이 날린 효시와 함께 누렇고 비쩍 마른 누렁이의 질주 역시 돋보이게 되었다.
그 어떤 효시보다 길게 울며 귀청을 찢는 앙칼진 매의 울음에 다른 말들이 놀란 가운데, 이미 익숙해진 누렁이가 기골이 장대한 온달을 태우고도 막힘없이 내달렸다.
그것은 지켜보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훤히 지켜보던 태왕의 눈에도 시커멓고 거대한 철궁을 질주하는 말 위에서 당기는 온달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각궁도 아닌 철궁을 어찌 저리도 쉬이 당길 수 있는가? 경들은 저 장사가 누군지 아는가?”
태왕의 물음에 바로 곁에 앉은 태자 원이 온달의 뒤를 바짝 쫓는 동생 건무를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동생 건무에게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어찌 왕자의 몸으로 장사들과 공을 다투기 위하여 사냥 대회에 출전하느냐?”
그러자 동생 이건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었다.
“제가 온달을 수행하여 그를 우승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동생 건무의 말을 떠올린 태자 원은 그가 뒤따르는 이가 온달이라 확신하고는 태왕의 물음에 답하였다.
“저 장사는 온달이 분명하옵니다. 이곳 어딘가에 평강도 참관하고 있을 듯하옵니다.”
태자 원의 대답에 평원 태왕이 내심 기뻐하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퉁명스레 말하였다.
“고얀 것. 왔으면 아비를 찾아와 인사할 것이지. 저 장사가 온달이라… 듣던 대로 신력이 대단하구나.”
태왕의 이 말은 목원의와 우연순은 물론이요.
오부 귀족 모두가 또렷이 들을 수 있어 그들의 속내를 불편케 하였다.
사냥에 참여한 장사들이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주인이 잡은 짐승을 챙기기 위해 수행원들이 말에 올라 천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온달 일행은 체격이 건장한 양만춘과 막바우, 팽무성이 말에 올라 나섰다.
범 가죽을 걸친 양만춘과 곰 가죽을 두른 팽무성의 모습은 모든 수행원 중 단연 돋보여, 이 역시도 평원 태왕의 눈을 사로잡을 만하였다.
“저들은 평범한 수졸들로 보이지 않는구나.”
이에 기다렸다는 듯 서부총관 강이식이 나서 공손히 아뢰었다.
“범 가죽을 걸친 장수는 안시성의 젊은 성주로 양만춘이라 하오며, 그 기개가 높고 의협심이 굳은 자이옵니다.”
“오호라…….”
“또한 곰 가죽을 두른 사내는 일전에 서부총관부를 찾아와 망우산의 도적 떼를 소탕한 온달에 대하여 물은 바 있는 자이온데, 하북의 검술 명가 팽가장의 젊은 장주 팽무성이라 하옵니다.”
“하북 팽가장의 장주? 허허, 그리하구나. 어쩐지 범상치 않다 하였는데, 그래 저 둘은 누구를 수행하는 중인가?”
안시성의 성주와 중원 무림의 명가 팽가장 장주가 수행하는 인물이 궁금해진 태왕이 다시 물었고, 주위 오부 귀족들도 강이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온달이옵니다.”
강이식이 짧으면서도 우렁차게 답하자, 모두가 놀라 온달을 다시 바라보았다.
“온달이라 했는가? 어찌 그런…….”
“폐하, 온달은 사냥 대회를 참여하기 위해 오던 중, 오골성 인근에 출몰하여 민가를 습격하는 겨울곰과 이레 떼를 소탕하였고, 망우산에 산채를 짓고 약탈을 일삼는 도적들을 토벌하였습니다.”
“뭐라? 그런 일이…….”
“양만춘을 비롯한 여러 장수는 그의 의기에 감복해 따르며 이 사냥 대회까지 수행한 것으로 아옵니다. 하오며, 온달의 수행원 중에는 조의선인의 큰 스승 해진님마저 계시오며, 현재 공주님 곁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조의선인 한 무리의 큰 스승 신크마리 해진마저 온달을 수행한다는 강이식의 설명에 태왕은 물론이요.
오부 귀족 모두가 놀랐고, 그중 해진이 속한 소노부는 온달을 다시 보게 되었다.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사람 좋은 인상의 대장군 고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태왕의 앞에 나서며 아뢰었다.
“폐하, 온달이 인근 백성들을 위하여 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폐하의 홍복이오며 모든 장수들이 본받아야 하옵니다. 대저, 장수의 검이란 나라의 백성을 돌보고자 하는 태왕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인즉, 백성들을 돌볼 능력과 의지가 충만한 온달은 가히 누구 못지않은 장수라 사료되옵니다.”
“그리 생각하는가?”
“그러하옵니다. 하여, 감히 말씀드리오니, 온달을 이번 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공을 치하하심이 옳은 듯하옵니다. 부디, 소장의 뜻을 내치지 마시옵고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고구려의 군권을 쥐고 있으며 계루부의 대가인 고강이 직접 온달에게 상을 내리라 청하자, 오골성을 관할지로 둔 목원의의 안색이 변하여 잠시 살기가 돌았다.
대장군 고강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태왕은 목원의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오골성 일대는 예로부터 그대 목 씨 일가의 관할지가 아니던가? 태대형은 그대의 관할지를 돌본 온달에게 상을 내리란 대장군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떨떠름한 표정의 목원의가 입을 열지 못하자, 눈치 빠른 연태조가 먼저 나서며 의견을 올렸다.
“소인 절노부의 대가 연태조 한 말씀 올리나이다. 온달과는 망우산 인근 객잔에서 만난 적 있습니다. 당시 소신은 수행하는 이가 적어 망우산의 도적 떼를 피해 요동 총관부로 달려갔었나이다.”
“…….”
“허나, 온달은 몇 안 되는 인원으로 망우산의 도적 떼를 소탕하기 위해 산을 올랐고, 이를 소신이 부총관 을지문덕에게 알린 바 있사옵니다.”
“허허.”
“예로부터 강자가 약자를 돌보고, 나라가 백성을 돌봄을 아끼지 않는다면 흥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 하였사옵니다. 온달은 장수의 도리를 지켰사오니, 치하하심에 주저하지 않음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나이다.”
절노부의 대가 연태조마저 온달의 공을 치하하자, 불순한 마음을 품은 오부 귀족들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다만, 오골성이 관할지로 자신의 책무를 등한시한 목원의와 목충 두 부자는 얼굴이 벌게져 노골적으로 볼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태조 저놈이 태왕의 심기를 살펴 입안의 혀처럼 구는구나. 오냐, 네놈이 오늘을 무사히 넘길지 어디 두고 보겠다. 평민 출신의 온달을 치켜세울수록 오부 귀족의 불만은 쌓일 터이니, 나의 명분만 단단해지느니라.’
목원의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을지문덕은 하나하나 귀족들의 안색을 살피며 남몰래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연태조는 영리하구나. 일부러 목원의를 자극하여 섣불리 움직이도록 충동하는군. 오냐, 어서 행동을 보이시오. 태대형 어른.’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와중에 이미 흡족한 대답을 충분히 들은 태왕은 웃음을 감추고, 애써 손을 내저으며 사냥터로 시선을 옮겼다.
“경들의 충언은 잘 들었노라! 허나 지금은 사냥 대회 중이니, 그 일은 따로 논의하도록 하자.”
태왕의 이 말속에는 사냥 대회와 무관히 온달을 따로 치하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