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영웅 기개 (1)
“대대로, 가람이옵니다.”
마침 가람이 돌아와 방문 밖에서 부르자, 성미 급한 모용상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살펴보았느냐?”
대뜸 연태조가 묻자, 가람이 머리 숙여 예를 표한 후 빠르면서 낮게 말하였다.
“목원의는 요동 일대의 각 성에서 사병을 계속 불러 늘리고, 그 수가 삼천으로 사냥 대회엔 일천의 정병만 이끌고 참여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계속 해 보아라.”
“또한 우연순은 중원에서 살수를 몰래 불러들이고 있사옵니다. 목원의는 이를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병 수를 믿는지 감시 인원조차 붙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가람의 보고에 모용상이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연순과 목원의가 우리를 포함해 서로에게 사람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태왕을 찾아가 자신들이 의심받지 않도록 뭐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만약 저들이 나라를 뒤집을 정변을 꾸미고 있다면 그 준비 기간과 계획이 미숙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나서 우가와 목가 수괴들의 목을 베어 제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고 계획이 미숙할 것이라 했느냐? 세상 모든 곳의 정변은 예로부터 늘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미숙한 계획으로 일어났느니라. 이는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
“계획이 치밀하다면 정변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항상 정변을 일으키는 자들이 대의를 말하지만, 실상은 어떤 연유에서든 밀리면 죽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정변을 꾸미기 때문이었다.”
연태조는 말을 이어 갔다.
“우연순과 목원의는 서로를 의심하여 누가 먼저 일을 벌여 자신이 밀릴지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은 밀리면 죽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하오면 태왕을 찾아가 상대의 수상한 움직임을 고변하지 않는 의도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이들이 태왕을 찾아뵙고 상대의 수상한 움직임을 아뢰지 않는 것은 자신들도 일을 꾸미기 때문에 그것이 틀어질까 우려함이다. 이들은 고름이다. 곪아 터져 가만 내버려 둬도 솟아오를 고름이었다. 우린 환부를 눌러 터트렸을 뿐.”
“목원의의 대군에 우연순은 고작 살수로 맞선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살수라… 우연순이 이 요동 일대에서 목 씨 일가를 상대로 군사로 대적하긴 어렵지 않겠느냐?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정변에선 수괴만 척살하면 상대 세력은 쉽게 제압하기 마련이다.”
“아…….”
“우연순은 역시 노련한 늙은이야. 우리도 이제 내일 있을 살육을 준비하자. 네 누이의 예언대로 우연순은 목충에게, 목충은 온달에게 죽을 것이고, 우린 살아남을 것이다.”
우연순의 움직임을 파악한 연태조의 입가에도 모용설과 마찬가지로 미소가 번졌다.
연태조의 이야기대로 이후 세상 대부분의 정변은 항상 준비 기간이 짧고 어설픈 계획으로 시작해 대의를 부르짖게 되나, 실상은 어떤 연유에서든 밀리면 끝이란 절박함에서 비롯된다.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그러하듯이.
* * *
계부방이 우연순 앞에 앉아 내일 있을 살수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태대형은 사냥 대회를 마치고 모두가 태왕 앞에 모여 우승자를 가릴 때, 보란 듯이 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그가 이끄는 정병은 일천으로 저희를 포함한 오부 귀족 모두에게 위협이 될 것이오나, 총관부와 태왕을 호위하는 중앙군을 제압할 정도는 못 되옵니다. 하여.”
“하여?”
“그들은, 총관과 부총관의 목을 베어 총관부 정병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게 한 후, 망령되게도 내평 목충 그자가 태대사자 나리의 목울 노리고 연태조의 목 역시 벨 것입니다.”
“허허허, 발칙한 놈이로군. 계속하시게.”
“하여, 우리는 그들보다 먼저 손을 써야 하옵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중원에서 데려온 살수들에게 목원의가 이끌고 온 사병의 표식을 달아 이번 사냥 대회에 참여하는 이 왕자 건무의 목을 베도록 한 후…….”
계부방은 침을 한 번 삼킨 뒤,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바로 호위 무사를 이끌고 뒤따라 살수들의 목울 베어 이 왕자 건무의 시신과 살수들의 시신을 수습해 태왕에게 보이겠습니다.”
“태대형이 꽤나 당황하겠군.”
“태대사자 나리께옵선 아랫것들에게 명하시어 사냥 대회가 예정된 시간에 끝나지 않아 당황한 태대형과 내평을 추포하여 태왕 앞에 무릎 꿇리어 역도들을 벌하라 하시옵소서.”
“그래야지. 하하.”
“태대형은 외적과 내통한 연태조를 만난 후 바로 사병을 집결시켰으니, 의심받기 충분하여 오부의 귀족 누구도 태대사자 나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옵니다.”
“좋아, 좋아. 태대형이 사병을 집결시키자, 비 맞은 개마냥 벌벌 떨기만 하며 목소리도 못 내던 쓸모없는 것들이 나를 의지하겠군. 우리가 먼저 움직여 서부총관을 지킨다면 목원의의 사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야. 좋아, 아주 좋아.”
큰 싸움을 벌이지 않고 외적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만 씌워 수장들의 목만 베는 계획은 목원의나 우연순 모두 동일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북주 잔존 세력과 내통한 진범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었다.
* * *
온달 일행의 천막 중, 막사 겸 회의 천막으로 이용하는 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근심이 드리워졌다.
그 가운데 팽무성만이 혼자 기분이 들떠 연신 떠들어 댔다.
“고구려의 사냥 대회는 군사 훈련을 방불케 하며 중앙군뿐만 아니라 귀족들마저 사병을 이끌고 세를 과시한다더니, 과연 대단합니다. 요 며칠 사이 병장기를 든 군사가 이곳까지 즐비하니, 내일 있을 사냥 대회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뭐가 기대 되슈? 난 왠지 불안하구먼. 해진님은 사냥 대회를 많이 보셨을 터인데, 이렇듯 군사를 많이 끌고 오던갑쇼?”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생존 본능은 타고난 막바우가 근래 느껴진 살기와 일행들 얼굴 가득한 근심을 읽고 물었다.
“보통은 먹고 재울 양식을 고려해 이렇듯 많이 이끌고 오지 않는다네. 더구나 지금은 오직 태대형의 사병들로 군사의 수가 늘은 거라 무척 괴이한 상황일세.”
“그렇죠? 사람은 먹고 싸고 자야 하는데, 그게 모두 돈이라 당장 전쟁 치를 것이 아니라면 애써 이렇듯 위세를 부릴 필요가 없겠지요?”
자신의 의심이 맞았다는 것에 괜히 의기양양해진 막바우가 으스대며 말하자, 보다 못한 경우가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리 신나서 목청 높이는 게요?”
“아니, 나는 여기 팽 장주가 세상 물정 모르시기에 내가 경계하라는 뜻으로…….”
막바우가 목을 움츠리며 간신히 변명하였다.
“나는 본디, 산골에서 자라 이렇듯 많은 사람은 물론이요. 군사 또한 보지 못하여 적지 않게 놀라고 있습니다. 들어 보니 신크마리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 듯하온데, 다른 귀족들과 태왕 폐하께옵서 어찌 반응이 없으신지요.”
온달이 공주와 양만춘, 해진 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경우가 대신 나서며 답하였다.
“다들 갑작스레 목원의의 사병이 들이닥쳐 불어나니, 누구도 감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눈치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우, 무엄하다. 어찌 태왕 폐하와 서부총관부마저 태대형의 눈치를 보는 듯 말하는가? 어느 분의 앞이라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양만춘이 평강을 위해 경우를 엄히 꾸짖으니, 경우가 급히 일어나 평강에게 허리 숙여 용서를 구했다.
“송구하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됐소. 괜찮습니다. 총관부와 연태조마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름 대비가 있다는 뜻일 겁니다.”
“…….”
“물 위에 떠 유랑하는 배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나 실상 노를 젓는 이들은 분주하고 죽을 맛이지요. 누군가 쉬지 않고 대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평강이 담대히 말을 받으니, 다들 가냘픈 여인이라도 일국의 공주는 과연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내심 감복하였다.
“허나, 무엇을 위해 이토록 사병을 불러들였든 그 쓰임새는 바로 내일을 위함일 터이니, 다들 단단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간자들이 수집한 정보가 기록된 책을 받아 간 공손향이란 여인을 사냥 대회에서 찾으려 했던 생각은 이제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대군이 집결한 사냥 대회에 공손향이란 여인도 모용설을 찾아 나타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날이 밝으면 태대형 목원의가 어찌하여 사병을 불러들였는지 알 수 있을 거란 평강의 이야기에 일행 모두의 손에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 * *
모두가 다른 꿈을 꾸며 날이 밝았다.
소문이 무성했던, 온달 일행이 드디어 낙랑 사냥 대회장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바탕의 깃발에 황금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속에 다리가 셋인 금칠한 까마귀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길게 늘어서 펄럭이는 곳이 태왕과 태자가 자리하여 사냥 대회를 참관하는 곳이었다.
그 양옆으로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원과 붉은색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들이 오부 귀족들의 자리였다.
고구려는 황제의 나라와 대등하도록 자신들의 군왕을 왕이 아닌 태왕이라 칭하며 황제의 색인 찬란한 금색을 태왕의 색으로 사용하였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칠한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 아래, 서부총관부의 정병들이 도끼와 검을 들고 길게 늘어서서 도열했다.
그 아래로 동일한 삼족오 깃발 아래 오부 귀족들이 이끌고 온 사병들이 열과 오를 맞춰 늘어서 있었다.
전통적으로 낙랑 사냥 대회는 오부의 귀족들이 각기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이, 삼백에 이르는 사병을 각기 이끌고 태왕의 행차를 호위하며 충성을 보였었다.
매년 이들 오부 귀족들이 이끄는 사병의 수가 도합 수천에 이르고 요동 서부총관부의 정병 오백이 태왕을 근접에서 호위했기에, 오랜 세월 진행되어 온 이 사냥 대회에서 감히 변란은 없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도 태왕의 중앙 호위군 수는 이백여 명에 불과했고.
을지문덕은 총관 강이식에게 요동성 군사와 문관들에게도 목원의의 입김이 닿을 수 있으니, 많은 수보다 믿을 수 있는 정병을 선별하자 건의하여 예년처럼 오백의 정병만 도열하였다.
태왕의 호위군 이백과 요동성의 정병 오백, 목원의의 사병 일천을 포함한 오부 귀족의 사병 이천오백이 삼족오 깃발 아래 도열한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이루고 그 위세가 대단하여 당장이라도 외적을 맞아 대적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태대형 목원의의 사병들 수가 이상하리만치 압도적으로 많아, 다른 귀족들의 사병들은 은연중 불안에 떨어야 했다.
태왕의 아우이자, 요동성 성주 고무는 사냥 대회에 참관하지 않고 성에 남아 군을 지휘하며 불의의 사태가 발생할 시 군을 이끌고 달려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동성 주위 목원의의 사병 일천이 언제든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온달 일행도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을 마련해 한 곳에 자리를 마련하여 도열하였다.
그동안 태왕과 함께 참관했던 평강으로서는 처음으로 낮은 곳에서 도열하여 참관한 것이니, 온달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사냥 대회에 참여할 장사는 나오란 외침에 온달이 누렁이를 타고 나섰다.
또한 다른 쪽에서는 가벼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친 사내들이 탄탄한 근육을 지닌 말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중, 호랑이 가죽을 금색으로 물들여 가볍게 만든 사냥용 갑옷을 걸친 사내가 백마를 타고 온달의 곁에 서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온달인가?”
눈빛이 깊고 어깨가 넓은 사내로 아직 스무 살이 채 못 되어 보였다.
온달은 난데없이 하대를 하는데도 자신의 신분이 낮음을 잘 알기에 불쾌한 기색 없이 공손히 머리 숙여 예를 표하며 답하였다.
“소인이 온달 맞사옵니다.”
“하하하, 소인은 무슨, 거인이구먼. 하하하.”
사내의 너털웃음에 주위 다른 장사들도 모두 따라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건무 왕자님 말씀대로 거인이옵니다.”
“하하하, 역시 이 왕자님께옵선 활을 메고 검을 차 말에 오르시면 밝아지십니다. 훗날 태자께옵서 태왕에 오르시고 이 왕자께서 대장군에 오르시어 군을 이끄신다면 그 어떤 외적도 감히 우리 고구려를 넘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사내는 이 왕자 고건무로 평소 말수가 적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도 검을 차고 말에 오르면 성격이 바뀌어 태자나 평강과 마찬가지로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변하였다.